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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박민규의 소설은 단 하나 밖에 읽지 않았지만, 너무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모 인터넷 서점에서 연재를 했던 소설을 책으로 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인터넷 연재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 있어서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구가 읽어보라고 품에 안기듯 던져줘서 자연스럽게 읽게 되었다.
뭐, 역시 '재미있게' 글쓰는 솜씨는 여전한 것 같다. 하지만 전보다는 조금 덜 가벼운, 나름 진지한 사랑 이야기.
박민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인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불만족의 시대에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
요한은 말했었다.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
이를테면 집을 다녀오는, 그런 사소하고도 당연한 일이... 서로의 불을 밝힌 인간에게는 더 없이 크고 다행한 일이 될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무어라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생각이 안나. 이런 나 자신을 납득하기도 힘들지만... 이해해 줘. 마찬가지로, 말을 잘 못하는 인간도 세상엔 있는 거니까. 대신 그 대답은 아주 먼 훗날에 들려줄게. 천천히, 아주 조금씩 그 대답을 만들어가고 싶어.
영원한 장소도 영원한 인간도 없겠지만, 영원한 기억은 있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느린 마차처럼 서울로 돌아오던 버스와... 그 속의 지친 공기, 누군가 벗어둔 신발의 말똥 냄새마저도 그저 인간이 발할 수 있는 인간의 체온으로 느껴지는 밤이었다. 터미널을 나와 나는 그녀의 단추를 목으로 채워주었고, 밤의 광장과 지하도를 건너 집으로 가는 버스에 우리는 다시 몸을 실었다. 그 어디에도 색색의 조명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더 없이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밤이라고 생각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단순한 건 또 뭐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추녀를 사랑하는 미남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저는 언제나 '진행형'의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였습니다. 끝없이 덧나고 영원히 이어질... 그런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그런, 흉터를 가진 여자일 뿐이에요.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인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의 여자에게 얼마나 큰 기적인지도 짐작할 수 없을 겁니다. 말하자면 제게... 당신은 그런 남자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다. 비록 드라마에 등장했던 김삼순이 '현실적'인 캐릭터로 사랑을 받았다지만, 나는 그것이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추남, 혹은 추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박민규가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잔인한 진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내게 진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던가.
그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꿈꿀 때에도, 그것은 '시시한 것'이 되어야 한다.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지금 70년대의 냉전을 돌아보듯, 마치 지금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은 돈다 믿었던 중세의 인간들을 돌아보듯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걸.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볼 수 있는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저는 만들고 싶었습니다.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왜?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분입니다.
우리는 진화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능은 자기 자신, 즉 자기의 힘을 믿는 것이라 고리끼는 말했습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런 재능을, 힘을 지닌 존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개인처럼, 이제 인류도 스스로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때입니다. 이 진화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며 저는 아름다움에 대해, 눈에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의 시시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인간의 얼굴에 대해 말입니다.
너무 진지하고, 재미없고, 구태의연하다고?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쿨하게, 실용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볼 땐 그래, 그래서 경제력이 좋은 남자를 만난다거나 그런 일들... 그러니까 일단은 그래서 눈에 들어온다는 얘기지. 직업을 본다거나 집안을 따진다거나... 말하자면 그런 배경이 있어야 오우, 케이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에 맞는 결혼을 한다거나 그에 따른 윤택한 출발을 하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 영리활동이란 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고의 얘기가 아니라... 뭐랄까, 그런 활동을 통해 어쨌거나 그만큼의 이익을 얻은 거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사랑해 주지 않는다거나, 생일인데도 그냥 넘어갔다거나... 말했듯이 그 언니가 몸이 아픈데도 마쁘다며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거나... 그런 일들 말이야. 그런 건 그야말로 욕심인 셈이지. 즉 이윤을 추구해놓고 자기최면이라고 하듯 이건 연애야, 그래서 우린 결혼한 거야 라고 다들 믿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러고는 사랑이 식었다는 둥, 환상이 깨졌다는 둥... 애당초 동기가 된 영리활동에 대해선 끝까지 부정하면서 말이야.
그러니, 당신이 너무나 유치하고 뻔하다고 얘기할지라도,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기적을 잊지 말라. 제발.
인터넷에 연재한 소설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간 부분 늘어지는 설교는 좀 지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하지만 실재할리 없는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이 판타지를 <시시하다>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시하지 않았다.
그것을 내 삶이 아직은 시시하지 않음의 증거로 생각하고 싶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