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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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을 만화로 그려낸 최규석의 최근작. 역시나 나는 출간 소식을 신문에서 보자마자 구입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에서 제안을 받아 그린 작품인만큼, 이런 류의 만화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의 말에도 나와있지만, 잘해야 본전이고 거기다 하나마나한 작업이 되거나 자칫 교조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안을 거절했던) 다른 이유는 배알이 꼬여서였다. 87년 이전 공고를 졸업한 동네 형님들은 20대 후반이면 혼자 벌어서 제 소유의 자그마한 주공아파트에서 엑셀을 굴리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었지만, 지금 내 또래의 친구 중에 부모 잘 만난 경우를 빼면 누구도 그런 사치를 부리지 못한다.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격리된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였던 철거민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맞고 쫓겨나고 있고, 노동자들은 제 처지를 알리기 위해 전태일 이후로 수십년째 줄기차게 목숨을 버리고 있지만 전태일만큼 유명해지기는커녕 연예인 성형 기사에조차 묻히는 설정이다. 선생님이 멋있어 보여 선생님을 꿈꾸던 아이들이 지금은 안정된 수입 때문에 선생님을 꿈꾸고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나눈다.

  이런 것들이 민주화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과 관계가 없는 거라면 그럼 민주주의란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란 말인가. 지배층과 대거리를 할 만큼 똑똑해서 그들의 통치에 대해 훈수나 비판을 던질 수 있는 수존 높은 사람들이 더 이상 황당한 이유로 끌려가지 않게 되는 것이 민주화란 말인가. 민주화란 게 겨우 그런 거라면 할 말 좀 참고 좀더 배불리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이 낫다는 사람들의 흐름을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 사회의 문제로 고통받으면서도 제 탓만 하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20년 전에 이룩한 민주화를 찬양하는 것은 삶의 질과 민주주의가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다고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행사장 귀빈석에 앉은 분들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 같은 것으로 만드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이 만화가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만화 뒷 부분에는 '학습만화'가 포함되어 있다(말은 학습문화인데 킥킥대면서 봤다).

 

녹용씨 : 여튼 우리의 민주주의 모델이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이런 말 한다고 현실이 바뀌냐고. 괜히 들떠서 설레발치다가 인생 말아먹기 딱 좋지.

촛농 : 재수없어!!

나레이터 : 그러게요. 재수없습니다. 녹용씨 같은 사람들만 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노예가 존재하고, 여성은 투표권이 없고, 하루 16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불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을 겁니다. 타인의 피로 얻은 과실을 따먹고 계시다면 감사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빈정대지는 말아야죠.

 

학습이라니, 손발이 오그라드는가?

6월 항쟁으로 얻어낸 투표지 한 장이 있다고 해서, 시스템의 정당성이 갖추어졌다고해서, 권력의 정당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지겨울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겹다는 말을 할만큼 학습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현실을 보라.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답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지금이야말로 학습이 필요한 때다.

 

항상 그렇지만, 최규석의 미덕은 그의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댄다는 것이다.

절대 롱샷으로 가지 않는다. 사람 하나하나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대신 롱샷이 아닌 롱테이크로 간다.

한없이 심각하면서도, 피식하는 웃음이 있다.

그럼에도 동감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 여기가 바로 최규석이 빛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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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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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더군다나 목적지마저 알 수 없는 그런 길.

 

초기에는 실에 수의 같은 옷을 걸친 난민들이 우글거렸다. 몰락한 비행사처럼 마스크와 고글을 쓰고 넝마를 걸친 채 도로 가에 앉아 있었다. 밀고 가는 손수레에는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 뒤에도 수레나 카트를 끌고 있었다. 두개골 속의 눈은 반짝거렸다. 열(熱)의 나라에 이주한 사람들처럼 비틀거리며 인도를 걷는 신념 없는 껍데기 같은 사람들. 마침내 만물의 덧없음이 드러났다. 오래되고 곤혹스러운 쟁점들이 무와 밤으로 해소되었다.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극한의 상황에서는 인간이 인간이 되지 못하고 시간마저 시간이 되지 못한다.

그 와중에도 그 무엇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걸까.

 

다른 좋은 사람들도 있다 그랬죠. 아빠가 그랬어요.

그래.

그런데 어디 있는 거예요?

숨어 있지.

뭘 피해서 숨어 있는 거예요?

서로를 피해서.

많은가요?

모르지.

하지만 있기는 있죠.

있기는 있지.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이야.

하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거죠.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해.

알았어요.

내 말을 안 믿는구나.

믿어요.

그럼 됐다.

언제나 믿어요.

안 그런 것 같은데.

믿어요. 믿어야 해요.

 

그래. 극한이 아닌다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존재하기 위해 믿는 것인가, 믿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젠 존재 자체가 버거운가?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매카시는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쓰지 않는다.

너무도 건조하게 서술을 해버려서, 그의 자세한 묘사와 설명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을 정도다.

비가 방수포를 후두둑 때리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엔 사막이 그려지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 습기라고는 하나 느낄 수 없는, 그런 건조함. 허공에서 손을 모아쥐면 무엇인가 바스라질 것만 같은 건조함.

그렇다고 찌는 듯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암흑만이 '보일' 뿐.

 

글을 나누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통짜로 가버리기 때문에, 읽는 것이 엄청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쉽게 '희망' 따위를 던져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암흑의 사막'이 그저 암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정말 모를 일이다.

글을 읽는 중간 중간, '소년'에게 짜증이 울컥울컥 났다. 지금 '그따위' 소리를 지껄일 때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나, 그렇다고 이 소년에게 '배가 고프니 갓난아이를 구워먹자'는 말을 기대하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다음의 한 마디가 기억에 두고두고 남는다.

 

남자는 소년과 소년의 관심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잠시 후에 남자가 말했다. 네 말이 맞을 것 같다. 아마 죽었을 거야.

  그 사람들이 살아 있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 걸 뺏는 게 되잖아요.

 

정말 간만에 읽었던 소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었던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날만큼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는 소설치고 너무 힘겨운 소설을 고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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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대한민국 사법부를 향해 석궁을 쏘다 우리시대의 논리 12
서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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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사건'을 기억하는가? 한 교수가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다는 '테러'.

그 동안 언론에서 이 사건을 주목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가십 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누구를 위한 법인가'라는 근본적이고도 회의적인 질문을 떨칠 수가 없다.

 

  누군가를  가리켜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가끔 듣는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그 말은 그 사람의 심성이 착하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법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은 그런 온유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법은 무섭고 두려운 실체다. 그들에게 법과의 대면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신세를 자칫 망치게 하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앞서 조미영 씨가 말했듯이 자신의 억울함을 법에 호소해 해결하려는 것은 어리석거나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게 한국의 법 현실이다.

 

이 책은 르포처럼 현장감 있는 장면과 목소리를 전달한다. 김 교수를 둘러싼 공판과정을 중심으로 사건의 전말을 풀어간다.

글을 읽을 수록 저자의 표현대로 김교수가 '팍팍'하고 '불편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그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설령 누군가가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고, 도덕적으로도 흠이 많고, 타인의 선처나 바라는 비굴한 사람일지라도, 체제로부터 부당하게 핍박받는다면 그를 옹호하는 것이 좀 더 인간적이고, 그럴 때 용기를 내는 것이 진짜 용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빡빡한 삶인가. 그러나 난 그걸 나쁘게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해서 그를 대면하는 게 괴롭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가 주는 피곤함은 상식과 기본이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법조계의 문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석궁을 들고 법관에게 항의를 하러 간 김 교수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진 않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그에게 그런 잘못이 있다고 해서 그가 요구하는 정당한 법적 절차를 기각할 정당성도 없다.

그것도 판결에 핵심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증거의 확인(피해자 증인 대질, 혈흔분석, 석궁의 확인, 부러진 화살의 추적)이 왜 무시되는가?

아마도 '감히' 사법부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법의 수호자들'은 '감히' 국민의 기본 권리를 무시할 수 있는 건가?

 

  그러나 법이 있다고 해서, 혹은 법이 누구나 따라야 할 의무나 규범으로 부과되었다고 해서 법의 지배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엄정한 독재 정권 시절에도 법은 있었고, 당시의 현실과 무관하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쓰여 있는 헌법도 있었다. 1971년 전태일이 분신할 때에도 그는 무슨 '계급혁명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다. 이승만 정권도, 박정희 정권도, 전두환 정권도 다 법치를 외쳤다.

  법의 지배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보통의 시민보다 영향력이 큰 사회적 강자 집단들과 국가의 권력 집단이 법의 지배에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보통의 시민들이 법의 지배에 따르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가족들과 오락삼아 화투를 치기도 한다. 그 때 종종 나오는 농담조의 대사 중에 '법대로 하쇼'라는 말이 있다.

피박, 광박을 모두 면한 다음에 하는 대사인데, 이번 판을 지더라도 크게 잃을 게 없다는 나름의 배짱(?)인 셈이다.

시시껄렁한 농담이기는 하지만, 나는 왠지 다른 생각이 든다.

'법대로 하라'는 말은 왠지 떳떳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아쉬울 것이 없는' 혹은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하는 말 같다는 점이다.

'법치'를 강조하는 현 정부와 경찰이 그러하지는 않은가? 틀린 말은 아니지 않냐고?

글쎄, 그렇다면 '법대로 하라'고 똑같은 대사를 외치는 김 교수는 왜 무시되어야 하는가.

 

'김 교수의 생각대로만 책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김 교수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채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그 지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당신은 순식간에 책을 다 읽어버리게 될 것이다. 한 편의 재미있는 블랙코미디 추리극을 만나게 될터이니.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고는 블랙코미디 추리극이 아니라 비극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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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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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소설은 단 하나 밖에 읽지 않았지만, 너무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모 인터넷 서점에서 연재를 했던 소설을 책으로 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인터넷 연재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 있어서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구가 읽어보라고 품에 안기듯 던져줘서 자연스럽게 읽게 되었다.

뭐, 역시 '재미있게' 글쓰는 솜씨는 여전한 것 같다. 하지만 전보다는 조금 덜 가벼운, 나름 진지한 사랑 이야기.

박민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인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불만족의 시대에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

 

요한은 말했었다.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

 

  이를테면  집을 다녀오는, 그런 사소하고도 당연한 일이... 서로의 불을 밝힌 인간에게는 더 없이 크고 다행한 일이 될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무어라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생각이 안나. 이런 나 자신을 납득하기도 힘들지만... 이해해 줘. 마찬가지로, 말을 잘 못하는 인간도 세상엔 있는 거니까. 대신 그 대답은 아주 먼 훗날에 들려줄게. 천천히, 아주 조금씩 그 대답을 만들어가고 싶어.

 

  영원한 장소도 영원한 인간도 없겠지만, 영원한 기억은 있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느린 마차처럼 서울로 돌아오던 버스와... 그 속의 지친 공기, 누군가 벗어둔 신발의 말똥 냄새마저도 그저 인간이 발할 수 있는 인간의 체온으로 느껴지는 밤이었다. 터미널을 나와 나는 그녀의 단추를 목으로 채워주었고, 밤의 광장과 지하도를 건너 집으로 가는 버스에 우리는 다시 몸을 실었다. 그 어디에도 색색의 조명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더 없이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밤이라고 생각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단순한 건 또 뭐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추녀를 사랑하는 미남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저는 언제나 '진행형'의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였습니다. 끝없이 덧나고 영원히 이어질... 그런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그런, 흉터를 가진 여자일 뿐이에요.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인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의 여자에게 얼마나 큰 기적인지도 짐작할 수 없을 겁니다. 말하자면 제게... 당신은 그런 남자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다. 비록 드라마에 등장했던 김삼순이 '현실적'인 캐릭터로 사랑을 받았다지만, 나는 그것이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추남, 혹은 추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박민규가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잔인한 진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내게 진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던가.

그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꿈꿀 때에도, 그것은 '시시한 것'이 되어야 한다.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지금 70년대의 냉전을 돌아보듯, 마치 지금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은 돈다 믿었던 중세의 인간들을 돌아보듯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걸.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볼 수 있는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저는 만들고 싶었습니다.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왜?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분입니다.

 

  우리는 진화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능은 자기 자신, 즉 자기의 힘을 믿는 것이라 고리끼는 말했습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런 재능을, 힘을 지닌 존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개인처럼, 이제 인류도 스스로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때입니다. 이 진화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며 저는 아름다움에 대해, 눈에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의 시시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인간의 얼굴에 대해 말입니다.

 

너무 진지하고, 재미없고, 구태의연하다고?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쿨하게, 실용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볼 땐 그래, 그래서 경제력이 좋은 남자를 만난다거나 그런 일들... 그러니까 일단은 그래서 눈에 들어온다는 얘기지. 직업을 본다거나 집안을 따진다거나... 말하자면 그런 배경이 있어야 오우, 케이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에 맞는 결혼을 한다거나 그에 따른 윤택한 출발을 하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 영리활동이란 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고의 얘기가 아니라... 뭐랄까, 그런 활동을 통해 어쨌거나 그만큼의 이익을 얻은 거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사랑해 주지 않는다거나, 생일인데도 그냥 넘어갔다거나... 말했듯이 그 언니가 몸이 아픈데도 마쁘다며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거나... 그런 일들 말이야. 그런 건 그야말로 욕심인 셈이지. 즉 이윤을 추구해놓고 자기최면이라고 하듯 이건 연애야, 그래서 우린 결혼한 거야 라고 다들 믿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러고는 사랑이 식었다는 둥, 환상이 깨졌다는 둥... 애당초 동기가 된 영리활동에 대해선 끝까지 부정하면서 말이야.

 

그러니, 당신이 너무나 유치하고 뻔하다고 얘기할지라도,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기적을 잊지 말라. 제발.

 

인터넷에 연재한 소설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간 부분 늘어지는 설교는 좀 지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하지만 실재할리 없는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이 판타지를 <시시하다>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시하지 않았다.

그것을 내 삶이 아직은 시시하지 않음의 증거로 생각하고 싶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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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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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호의 인터뷰를 모은 책. 방학 동안 '시의성'이 떨어지면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을 우선 '처리'(?)하기로 하고 읽은 첫 번째 책.

표지에 나와있는대로 총 7명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이 책이 2007년도에 출간되었고 인터뷰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판의 날은 주로 개혁세력, 노무현 정권을 향해 있다.

때문에 지금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에 지금 이 책을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과오 중에 하나라면, 바로 '빨갱이'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빨갱이가 어디에 있는가?

 

노무현 정권은 큰 틀에서 한나라당도 밀어붙이기 쉽지 않은 정책들을 밀어붙여서 관철해왔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정치적인 제스처를 제외하고는 굉장히 오른쪽의 두 세력이 경쟁하면서 그 나머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이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꼴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요.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내지는 진보로 인식되거나 실제 그렇게 자처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현실감각이 없는 외계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승호)

 

이를테면 노무현 정부는 개혁적 보수라든지 자유주의 보수라든지 이렇게 규정해야 하는데요. 기존의 보수, 진보 이런 나눔, 그런 것에 매몰되면서 잘못된 현상이 나타난 거죠. 그래서 결국은 진보의 가치가 퇴색해 버리는, 동반해서 퇴락해 버리는 이런 현실을 낳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구요. (홍세화)

 

  굉장히 슬픈 일인데, 우리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나은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믿음 같은 것이 적어요. 그래서 만날 '우리 현실에서 이것만 해도 어딘데'라는 생각이 지배해요. 개혁이라는 것이 진보의 기초적인 부분과 겹치기도 하지만, 개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사회를 좀더 합리화하는 데 있죠. 상상력이 없으니 그 부분을 놓치게 되는 거죠. 개혁이 갖는 소박하고 진보적인 경향에 너무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만 해도 어딘데'하면서. 그것은 어리석은 게 아니라 착한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착함 때문에 된통 작살이 나는 거죠. 누가 어떤 놈이 밟았는지도 모르는 채 삶이 너무 고달파지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이제 진보고 개혁이고 뭐고 싫고 무슨 사회, 이념도 다 싫다.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이야. 이명박이 제일이야"하는 식으로 가는거죠. 이명박은 디지털 시대를 토목 건설로 해결하려는 몽상가인데 어떻게 된 게 이 사람이 가장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렸죠. 이것은 대단한 역사적 반동인데, 정말 슬픈 일입니다.

  개혁이 실패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한 셈이죠. 개혁의 목적은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니까요. (김규항)

 

유연한 진보, 중도, 신진보, 이런 다양한 수식어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수식어야말로 진보답지 않은, 진보로부터 뭔가 얻으려는 태도라고 봅니다.

…… 형식적 민주주의는 YS, DJ를 거치면서 사실은 공고화된 것입니다. 탈권위나 지역주의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임에는 틀림 없고 여전히 의미 있는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표를 준 다수 서민들의 가장 핵심적인 요구와 기대였느냐?'라는 점에서는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형식적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그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해서 다수 서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구한 것이구요.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시대적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오히려 자본의 전면적인 자유화를 도모하면서 서민의 삶을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모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얘기하는 '유연한 진보'는 사이비 진보고,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가장 적극적인 대변자로서 진보의 카운터 파트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심상정)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후,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제는 정반대로 왜곡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기감도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하고 싶어했으나, 그는 진보가 아닌 '자유주의자'였다.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진보의 핵심 개념인 '계급'을 생각한다면, 노무현 정권을 '진보' 혹은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상식이하'의 일이다.

(여기서 북한을 들먹거릴 수도 있겠는데, 훗. 그가 과연 '친북주의자'였을까? 아니, 그 전에. 북한이 어디 '빨갱이 국가'인가, 왕조국가지)

그럼에도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를 진보였다고 규정해버리는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그는 진정성을 가진 자유주의자였으며, 그들을 둘러싼 일파들은 그보다도 못한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그 일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나름의 진정성을 수없이 왜곡시키고 외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랬던 현실을 그의 죽음으로 다 묻어버리고, 살아있는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함께 묻으려 하고 있다.

그, 혹은 그들에 대한 비판을 '죽음'이라는 엄숙함을 내세워 인신공격으로 되받아치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저 이명박 대통령 같은 괴물과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집단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이럴 때일 수록 선을 더욱 분명히 그어야하고, 내 자신의 위치를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인터뷰 모음집이다 보니 쉽게 잘 읽히는 편이지만, 인터뷰 대상에 따라 읽는 속도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홍세화 씨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여기 그의 인터뷰를 읽는 것은 왠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반면 김규항의 인터뷰는 100% 동감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터뷰를 읽는 내내 많이 생각하고 또 많이 웃기도 했다. ^^;

 

뭐... 지금 굳이 사서 보길 권할 그런 책은 아니지만, 분명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오히려 지금.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의 제목은 틀렸다. '두 개의 대한민국, 하나의 현실'일뿐.

 

글은 제가 보기에는 불편해야 돼요. 그리고 사람이 글을 잘 쓰자면 위험해야 돼요. 위험하지 않은 학문은 이미 죽은 학문입니다. 학문이 위험해야 재미가 있죠. 독자들이 실망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건 각자 판단의 문제인데 위험하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글은 안 쓰는 게 더 낫죠. 자기 연구나 하는 게 낫습니다. (박노자)

 

'시민 사회가 얼마만큼 이 모순 구조를 극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느냐, 같이 동참할 수 있겠느냐'를 고민하고 나서 비판을 하든지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홍세화)

 

부모들은 아이들 때의 인생이라는 것은 나중에 진짜 인생을 위한 준비기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인생은 매순간이 중요하고 매순간 세계와 나의 소통이 있는 것이죠.

 

계급이라는 말은 어떤 지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체라는 겁니다. 우리가 계급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현실을 바라보자는 말일 뿐이예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불편함과 똑같은 양의 위로를 주는 글을 나는 혐오한다. 내 글이 담는 불편함은 '과시'가 아니라 '권유'다. '글이나 읽고 해소하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함께 실천을 고민해야죠' 하는 권유 말이다. (김규항)

 

꼭 누굴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는 처벌하려는 게 아니거든. 우리는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거야"라는 얘기를 너무 쉽게 했단 말이죠. ……

  처벌이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했어요. 처벌이 안 되니까 보복이 생기는 거예요. 처벌과 화해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보복과 처벌이 대립하는 개념이지. 사회가 책임져야 할 사람을 책임지지 못했을 때 그 가족들은, 남아 있는 당사자들은 그 한을 어떻게 풉니까? 우리가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보복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뭡니까? '보복하지 마라. 대신 사회가 처벌해준다'고 하니까 비로소 막을 명분이 생기는 거죠. 이걸 포기해놓고 뭘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화해를 구걸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한홍구)

 

최종적으로 해방된 사회의 상을 그리고 나머지 운동들을 그쪽으로 나가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별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진중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학생들이 워낙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는 환경에 있다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학생들의 보수화를 걱정하기에 앞서서 교수들의 보수화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손석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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