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김경미.조혜란 지음 / 돌베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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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을 전공한 세 명의 여성이 쓴 조선시대 14명의 여성에 대한 글을 모은 책.

사실 이런 류의 책에 실망한 적이 많아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기대를 안해서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가장 기억이 남는 여성은 이옥봉.

 

강은 갈매기 꿈을 품어 넓고                  江涵鷗夢闊

하늘은 기러기 슬픔에 들어와 멀다          天入雁愁長

 

  번역하기 어려운 시란 이런 시일 것이다. 어려운 글자도 없건만, 번역을 해놓으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비문이거나 반쪽이 된다. 워낙 교묘하게 말을 놓았다. 강이 갈매기의 꿈을 적시고 하늘이 기러기의 슬픔으로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거꾸로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이 강과 하늘에 들어와 담기는 것을 수도 있는 문법구조이다. 그래서 넓고 먼 것이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강과 하늘일 수도 있게 만들어놓았다. 넓고 먼 강과 하늘은 철새인 갈매기나 기러기와 사슬처럼 얽히며 더욱더 넓고 멀어진다. 동시에 물에 젖은 꿈도, 하늘에 번진 슬픔도 아득히 넓고 멀어진다. 가을 하늘에 깔리는 깃털 구름처럼 여러 겹의 정서적 결이 서로 약간씩 어긋나며 잔잔히 이어지도록,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문법구조 속에 짜 넣었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징을 시적인 애매성으로 기막히게 살려낸 경우이다. 가를 모를 쓸쓸함과 맑고 유장한 호흡이 이런 의도적 모호성과 다의성 속에 녹아 있다. 이런 시를 두고, 읽으면 읽을수록 말 밖에 무한한 정취가 있다고 하는 것일 터이다.

 

이렇게 멋진 시를 지어낼 문재가 있었던 여성은, 그러나 조선의 여성이었다. 하긴 굳이 조선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테지만.

저자는 이옥봉의 도도함 속에서 컴플렉스를 발견해낸다. 아니, 직접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옥봉은 그(정실의 아들 조희철)를 향해, 그대의 글씨는 바람도 놀래키고, 내 시는 귀신도 울린다고, 그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나란히 부각시킨다. '귀신도 울린다'는 것이 애당초 이태백의 시를 지칭하는 말이니, 그녀 자신, 이태백에 필적하는 시인이라는 도도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비록 소실이지만 예술적 재능으로 집안의 명성을 드높인다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이 도도한 선언에서는 역설적으로 옥봉의 신분적 컴플렉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이 교유한 인물들과 조원(남편)의 나이 차이가 그다지 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옥봉은 조원과 나이 차가 많았을 것이다. 오히려 세대로는 조희철의 세대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더할 나위 없는 명예가 모두 어린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적자를 향해 '모자'라고 내세우는 그녀의 힘겨운 자존심이 안타깝다. 소실을 자처해 예술가로서 삶을 선택했던 그녀의 자의식에 놓인 분열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밖에 열녀의 '현실적' 모습을 보여주는 풍양 조씨의 '자긔록'이나, 현실과 욕망의 뒤얽힘을 보여주는 김삼의당의 경우도 매우 흥미롭다.

 

아무래도 이 책의 저자들이 여성이라는 점이 꽤 긍정적으로 작용한듯 싶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의식은 언제나 진지하고, 보통 이상의 것을 끌어내는 법.

때문에, 나에게 가장 솔직한 것이 타인들의 동감을 얻어내기에도 쉬운 방법인 셈이다.

 

책 표지를 검은색으로 하는 것은 종종 도박일 때가 많다. 그만큼 예쁘고 깔끔하게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듯.

그런 의미에서 표지도 그럭저럭 괜찮은데, 아쉬운 것은 제목. 내용에 비해 다른 그런저런 책들과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섹시한 제목을 뽑으려 노력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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