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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놓은지 백만년은 된 것 같은데, 이제서야 읽게 된 책.
어느새 '한국의 미', '우리 문화의 힘' 따위의 말에 근거 없는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래서 저자의 머리말도 그닥 와닿지 않았었다. '월드컵 4강', '조상들의 문화와 예술', '자긍심' 따위의 단어들은 되려 거부감만 들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특강'을 듣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런 거부감을 일소에 없애버릴만큼 재미가 있다.
재미만이 아니라 무엇인가 '배웠다'라는 느낌을 분명히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알려주는 그림을 볼 때 알고 있어야할 기본적인 요령을 알고 그림을 보니, 정말 저자의 말대로 보이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왼쪽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그림을 훑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즉 옛사람들의 방식대로 그림을 보니 감상 또한 물흐르듯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안목'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고, 알아야 그리고 사랑해야 볼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볼 시視 자에 볼 견見 자, "보기는 보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청이불문聽而不聞', 들을 청聽 자, 들을 聞 자, "듣기는 듣는데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고 듣는데 왜 안 보이고 안 들릴까요?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애초 찬찬히 보고 들을 마음에 없이 건성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앞 글자 둘을 합하면 시청각 교실이라고 할 때 시청視聽이 되죠? 뒤 글자를 합하면 체험한다는 견문見聞이 됩니다. 아무리 시청각 교실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고 들리지 않습니다.
꼼꼼이 뜯어보고 곱씹어보고, 그러면서 그림을 느끼고 사랑하게 된 저자가 그대로 드러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
이제 나의 근거 없는 거부감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나의 냉소가 선생의 애정에 비할 가치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때문에 강좌의 끝맺음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제가 이십대 후반에 호암미술관에서 큐레이터(박물관 학예연구직)로 근무했을 때 일을 소개하면서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그때 중국회화사의 세계적 대가인 제임스 캐힐James Cahill 박사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오셨어요. 당시 나이가 벌써 육십이 넘으셨는데 정말 세계적인 학자이기 때문에 "아, 그분은 우리나라의 명화들을 과연 어떻게 감상하실까? 대학자니까 뭔가 보는 눈빛부터 다르겠지"하고는 2,3일 전부터 잔뜩 긴장해 가지고 목욕도 깨끗이 하고 옷도 쫙 빼입고, 그러고서 손님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그분이 적어도 한 두세 시간은 꼬박 그림을 볼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분이 그림을 별로 오래 보지 않는 겁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동안에 벌써 이쪽 코너를 돌아서 다시 저쪽 구석으로 또 꺾어졌습니다. 즐비한 국보, 김홍도의 <군선도>며 정선의 <금강전도>며 <인왕제색도>며, 그야말로 눈부신 우리 명작들을 너무 짧은 시간에 대충 보고 지나가고 또 보곤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서화실을 거의 다 둘러봤을 무렵에는 제 속이 부글부글 끓어가지고, 정말이지, 막말로 쌍시옷 자가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습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중국 그림은 그렇게 대단하고, 우리 것은 하찮다는 것이냐?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그런데 마지막 그림을 지나쳐서 도자실로 막 넘어가기 직전에, 이분이 갑자기 우뚝 섰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정색을 하고는 마지막 그림을 꽤 긴 시간 유심히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만 저의, 불같이 솟았던 화가 눈녹듯 싹 풀렸습니다. 그것이 무슨 그림이었느냐 하면 추사 선생님의 제자 중에 고람 전기(1825~1854)라는 분이 그린 <귀거래도>라는 그림인데, 이 작품은 그 전시실 안에 있던 그림 중에서도 가장 중국풍이 두드러진 그림이었어요. 가장 중국적인 그림, 말을 뒤집으면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그림! 캐힐 박사 이 양반은 중국 그림을 연구하는 분이니까 바로 그것을 주목했던 것입니다. 박사의 눈에는 오직 중국 그림과 닮은 것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 분에게 마냥 주눅이 들어 있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그림은 이러저러한 풍토와 역사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서, 우리 옛 그림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이러저러한 독특한 장점이 있는 예술품이다, 하고 오히려 가르쳐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제가 나이는 어렸지만, 마땅히 또 당당히 그렇게 설명 드렸어야 했어요. 예를 들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흔히 음악의 제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카라얀이야 서양 음악의 제왕이면 제왕이지, 판소리의 제왕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전통 음악에 대해서는 저만큼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옛 그림을 보고도 느끼셨겠지만 건축이며, 도자기며, 옷이며, 춤이며,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국의 전통 문화는 중국, 일본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실은 완전히 속내가 다릅니다. 춤을 춰도 춤사위가 아주 걸지고 씩씩하며, 음악도 삼박자에 농현이 출렁출렁해서 속 맛이 아주 깊습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술 세계입니다. 사실 세상에 예술이며 문화만큼 울타리가 높은 것은 없습니다. 예술에 국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국경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습니다.
얼핏 단순한 국수주의자의 말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림 하나를 꼼꼼하게 '공부'하고 '분석'하여 그림을 그리고 화가를 느끼는 태도.
또 그것을 쉽게 풀어내는 오주석 선생의 '강의'를 듣다보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정말 재미있게, 천천히 곱씹으면서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편집 또한 굉장히 맘에 든다.
대상을 사랑하는 진지한 마음, 그것 하나만으로도 제3자를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묻게 된다. 지금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고.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다. 틈틈이 선생의 다른 책들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