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6월 항쟁을 만화로 그려낸 최규석의 최근작. 역시나 나는 출간 소식을 신문에서 보자마자 구입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에서 제안을 받아 그린 작품인만큼, 이런 류의 만화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의 말에도 나와있지만, 잘해야 본전이고 거기다 하나마나한 작업이 되거나 자칫 교조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안을 거절했던) 다른 이유는 배알이 꼬여서였다. 87년 이전 공고를 졸업한 동네 형님들은 20대 후반이면 혼자 벌어서 제 소유의 자그마한 주공아파트에서 엑셀을 굴리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었지만, 지금 내 또래의 친구 중에 부모 잘 만난 경우를 빼면 누구도 그런 사치를 부리지 못한다.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격리된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였던 철거민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맞고 쫓겨나고 있고, 노동자들은 제 처지를 알리기 위해 전태일 이후로 수십년째 줄기차게 목숨을 버리고 있지만 전태일만큼 유명해지기는커녕 연예인 성형 기사에조차 묻히는 설정이다. 선생님이 멋있어 보여 선생님을 꿈꾸던 아이들이 지금은 안정된 수입 때문에 선생님을 꿈꾸고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나눈다.

  이런 것들이 민주화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과 관계가 없는 거라면 그럼 민주주의란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란 말인가. 지배층과 대거리를 할 만큼 똑똑해서 그들의 통치에 대해 훈수나 비판을 던질 수 있는 수존 높은 사람들이 더 이상 황당한 이유로 끌려가지 않게 되는 것이 민주화란 말인가. 민주화란 게 겨우 그런 거라면 할 말 좀 참고 좀더 배불리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이 낫다는 사람들의 흐름을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 사회의 문제로 고통받으면서도 제 탓만 하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20년 전에 이룩한 민주화를 찬양하는 것은 삶의 질과 민주주의가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다고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행사장 귀빈석에 앉은 분들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 같은 것으로 만드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이 만화가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만화 뒷 부분에는 '학습만화'가 포함되어 있다(말은 학습문화인데 킥킥대면서 봤다).

 

녹용씨 : 여튼 우리의 민주주의 모델이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이런 말 한다고 현실이 바뀌냐고. 괜히 들떠서 설레발치다가 인생 말아먹기 딱 좋지.

촛농 : 재수없어!!

나레이터 : 그러게요. 재수없습니다. 녹용씨 같은 사람들만 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노예가 존재하고, 여성은 투표권이 없고, 하루 16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불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을 겁니다. 타인의 피로 얻은 과실을 따먹고 계시다면 감사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빈정대지는 말아야죠.

 

학습이라니, 손발이 오그라드는가?

6월 항쟁으로 얻어낸 투표지 한 장이 있다고 해서, 시스템의 정당성이 갖추어졌다고해서, 권력의 정당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지겨울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겹다는 말을 할만큼 학습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현실을 보라.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답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지금이야말로 학습이 필요한 때다.

 

항상 그렇지만, 최규석의 미덕은 그의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댄다는 것이다.

절대 롱샷으로 가지 않는다. 사람 하나하나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대신 롱샷이 아닌 롱테이크로 간다.

한없이 심각하면서도, 피식하는 웃음이 있다.

그럼에도 동감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 여기가 바로 최규석이 빛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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