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 2월쯤 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거의 반년이나 걸려 읽은 셈;;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이니 가지고 있던 것은 더 오래된 일 -_-;;)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가 없다거나 너무 어렵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책이 그만큼의 명성을 얻고, 곰브리치가 한 분야에서 대가라고 불리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역작.

자신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나 건축물은 도판상으로 꼭 제시를 하면서 차분하고도 맛깔나게 설명해나가는 책이다.

 

하나의 '통사'를 쓴다는 것은 어느 분야나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이 책은 그 어려운 일을 너무도 '쉽게' 해내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특히 16판까지 개정판을 내면서 개정판을 낼 때마다 서문을 다시 고쳐쓰고 쳅터를 추가해서 넣고 하는 점은

그가 마지막 쳅터에서 하는 다음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끊임 없이 수정을 요하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가슴설레이는 기쁨 중의 하나가 아닐까?

 

다 읽고 나서도 언제든지 아무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좋을만한 책.

요새 책 가격을 생각하면 600페이지가 넘는 컬러도판인 이 책의 가격이 비싼 편도 아니다.

 

죽기 전에 이런 책 한 권 써낸다는 것. 정말 멋진 일 같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만이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미국 내에서도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수전 손택의 마지막 저서.

 

보통 책을 읽다보면 크게 3가지 종류의 느낌을 받게 된다.

2가지는 아주 일반적인 느낌으로, 속으로 박수를 쳐가며 동의와 지지를 보낸다던가 아니면 반대로 계속 반박을 해가면서 읽는 느낌.

그러나 이 책은 그 두 가지가 아닌 나머지 한 가지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었다.

그 느낌은 마침 책 뒤, 번역자의 말처럼(어찌 나와 그리 일치할 수 있는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내가 그렇지 못한데, 옳은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해버리는 저자.

재작년이던가 김규항의 책을 읽을 때보다도 더욱 불편했던 책이었으나, 또 역시 그러하기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수전 손택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를 인용하면서 그동안 당연시해왔던 것부터 문제를 삼아야한다고 화두를 던진다.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화두를 던지면서 저자는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신화를 자근자근 깨부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정작 이상한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표된 가장 기억할 만한 사진들을 비롯해, 과거의 그토록 많은 상징적 보도 사진들이 연출된 듯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 사진들이 연출됐다는 것을 알고 나서 깜짝 놀라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것이다.

 

같은 사진이 양극단의 정치적 입장 모두에게서 이용된다는 사실은 이제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내가 살가도의 사진들을 보면서 뭔가 2% 캥기던 느낌에 대하여 수전 손택은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오직 유명인사들만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39개국에서 이주민들의 모습을 찍은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연민'은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만 악행과 살육이 일어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예상을 만들어내며

이 예상은 또 다시 카메라의 렌즈를 '저곳'에만 돌리게 만든다.

그리고 가끔 비춰지는 이 곳의 살육과 저 곳의 살육에 대한 층위를 스스로 만들게끔 한다.

 

그렇다고 수전 손택이 포토저널리즘을 완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무기력한 연민의 문제점은 그 '무기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날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대학교 초년생 때였을까. 종종 도서관 옆에 걸리곤 했던 사진들. 5.18의 만행이나 주한미군의 살육에 관련된 적나라한 사진들.

나는 그 때, 저 사진이 보여주는 참상이 분명 심각한 문제임에는 틀림 없으나, 저 사진을 보고 놀라야하는 나 또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온몸이 처참하게 찢긴 사진과 '**씨가 죽었다'라는 말 한 마디. 사실 그 두 가지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둘 다 한 인간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전달하는 근본적인 면에서는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저 끔찍함에 눈을 돌리고 입으로 신음을 뱉어내며 인상을 찌푸리고, 때로는 분노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가? 나는 이제 저렇게 처참한 모습이 아니면 분노하지도 못하는 것인가?

물론 그 사진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휘젛어 놓는' '최초의 자극'을 제공할 수는 있으나 사실 99.9%,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없다.

 

앞에서 이미 한번 언급했듯이, 수전 손택이 비판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 될 수 밖에 없는 '렌즈' 그 자체가 아니다.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진 채 고통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이미지를 비난해 왔다. 마치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 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지를 통하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본다고 해서 그냥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그들이 겪어왔떤 일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그 이해하지 못함이 '옳다'고 역설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전 손택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벌써 1년 전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

그때 그야말로 '타자'가 되는 굉장한 경험을 했었는데, 그 강의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남성들이 싫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발언의 시작은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였지만.)

상황적으로나 말 자체로나 매우 도발적인 발언인 셈이었는데, 나중에 그 자리에서 그 말의 의미를 부가설명하기도 했지만 나의 이 말은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가 싫다. 라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 곳곳에서 욕을 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것은 나 스스로도 정말 싫어하는 일이다.

(대체 그들이 비난하는 '페미니즘'이란 것은 무엇인가? 비난하는 그들 스스로가 그게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지 궁금하다. 나도 모르기에.

 그들이 증오하고 공격하는(뭐 실제로 '공격'하는 것은 키보드를 두들기고 술자리에서 투덜대는 것 이상이 아니지만)여성부가 페미니즘인가? 웃기는 일이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어차피 여성이 될 수 없는 남성은 자신이 여성이 될 수 없는 한계 아니 특성을 인식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이해가 가지 않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자신을 솔직히 설명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가 필요하단 것이었다.

괜히 주변의 분위기 때문에 혹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하여 페미니스트니 뭐니 떠들어 대고서는

뒤로는(혹은 일상생활에서) 그것과 정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인간들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범위의 한계를 알고, 타인의 입장을 모른다는 고백이 있을 때야 비로소 '역지사지'가 가능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타인을 정말 모를 때야 비로소 '역지사지'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바로 '무기력한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제조건이 아닐까.

 

어쨌거나 간만에 굉장히 불편한 책,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도 불편해져보라고 권할만한 책 한 권을 읽었다.

책 뒷 편에는 수전 손택의 연설과 신문 사설이 실려있다.

9.11이 일어난 2주 뒤, 그 살벌한 '애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라고 외쳤던 그 존경스러운 용기를 볼 수 있었던 사설도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실명은 원래 옮지 않는 것이지만 이 소설 속에서 실명은 온 도시의 사람들을 눈먼 자로 만든다.

어두운 암흑으로 빠져드는 눈멈이 아니라 하얀 눈멈. 아이러니의 극치.

도시전체가 눈이 멀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최악과 최악을 거듭한다.

시작부터 급박하게 시작되어 그야말로 산넘어 산.

읽으면서 너무나 괴로웠지만 끝끝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주제 사라마구가 이야기하는 실명은 그저 신체적인 면에서의 실명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마음에 대한 실명이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눈이라는 기관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기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은 어찌보면 실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싸움이란 건 언제나 실명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직접적인 묘사가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고 상황 자체가 현실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왜 주제 사라마구가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가라고 불리는지 느낄 수가 있다.

직접 보았으나 단어로만 내게 다가오는 '실명'을 여러가지 상황으로 너무나도 실감나게 독자에게 설명하는 그 과정 때문이다.

 

계단이 어두컴컴했으나, 그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는 초조해서 서두르는 바람에 두 번이나 비틀거렸다. 그러나 웃음으로 털어버렸다. 참 나, 눈을 감고도 오르내릴 수 있던 계단인데. 상투적 표현이란 그런 것이다.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무시해 버린다. 예를 들어 이 경우에는 눈을 감는 것과 눈이 머는 것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가를 서서히 제시한다.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그런데 이 고약한 작가는 독자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로 몰아넣고서 '사랑'을 꺼내어든다.

고약한 낙천주의자 같으니라고.

 

내가 과거의 그 여자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조금 전의 그 말을 한 사람은 오늘의 이 여자예요. 그럼 내일의 여자는 또 어떤 말을 할까. 나를 시험하는 건가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내가 뭔데 아가씨를 시험하겠소, 그런 일들을 결정하는 것은 삶이오. 그럼 삶은 이미 한 가지 결정을 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를 영화화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금새 이 눈먼 자들의 지옥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눈뜬 자에 대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동시에 주제 사라마구의 경고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움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보기 싫다고 눈을 감고 살 수는 없다. 눈 감은 척하면서 살 수도 없다. 그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스터디의 일환으로 읽기로 했던 책이었는데 빠르게 읽히지는 않아서 이제야 다 읽은 책.

그러나 더딘 독해 속도와는 별도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

물론 제목만 보고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식의 서술을 기대해선 안된다.

 

저자는 나치 시대에 살았던 '작은 사람들'의 삶에 주목한다. 밑에서부터의 역사 연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접근으로 그는 우리가 거시적으로 볼 때 명확해보이는 많은 부분이 사실은 너무나도 복잡한 양상을 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상사에 접근할수록 연구자의 이론적 방법론적 확실성이 흔들릴 뿐만 아니라, 개별자의 경험과 행위를 이해하고 복원하는 과정 속에서 도덕적 가치 기준마저도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책이 발간될 당시(1982년) 꽤나 논란을 빚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근대화'의 개념을 제시한다.

왜 한국의 경우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근대화'.

 

"근대화"는 낡은 권력 관계를 유지한 채 사회가 재조직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때 근대화는 사회주의적인 의미에서 가장 "반동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자는 '나치혁명'은 오버센스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근대의 발전사가 자유를 향한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결국 나치의 등장은 서구 근대의 중간에 뜬금 없이 등장한 '괴물'이 아니라 서구가(혹은 우리가) 맹신하고 있었던

근대가 발전(?)할 수 있는 병리학적인 현상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청소년의 동원과 거부'라는 부분인데

저자는 이 부분에서 작은 사람들이 소요할 수 있었던 미시적인 전략 공간을 흥미롭게 제시한다.

 

학교와 청소년단이라는 두 권위 조직의 관계는 결코 근원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양자 사이의 경쟁은 갈등의 공간을 낳았고, 청소년들은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은 학교를 핑게로 히틀러 청소년단 모임에 빠지기도 하고, 거꾸로 나치당과 청소년단이라는 "보다 높은" 대의를 들이대며 교사들을 괴롭히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사료를 읽는 방법 혹은 관점에서도 저자의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치의 공식적인 보고서들은 스윙 청소년들의 혼숙, 그룹 섹스, 미성년 섹스, 특히 나치가 황폐화로 간주하던 성애 그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이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현상을 강조했다. 그러나 나치 보고서가 선택한 단어와 강조점을 보면, 보고서는 통상 청소년들의 행태보다 오히려 보고서를 쓰고 읽는 자들의 관점을 드러낸다. 작성자는 자신의 불안과 억눌린 소망을 청소년들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채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허풍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어쩌다 발생한 개별적인 "사건"을 일반화했다.

 

그와는 별개로,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약 21만 9천명의 집시가 살해되었고 그들의 '재생산'을 막기 위하여

강제 불임시술을 받은 사람은 1945년까지 20만 내지 35만 명에 달한다는 부분에서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는 논리을 읽으면서 나는 자꾸 그 좋다는 (신)자유주의를 겹쳐보게 된다.

 

나치들은 사회적 현상을 병리적 관점으로, 즉 전염병처럼 바라보면서 확산을 두려워하며 근절을 외쳤고

결국은 사회적인 일탈을 인종주의의 시각(선천적인 유전획득)에서 파악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삐뚤어진 관점은 과학이라는 화려한 탈을 쓰고 유래 없는 대규모 학살을 낳았던 것이다.

여기서 왜 나치를 그 아름다운 자유주의와 겹쳐서 바라보느냐하는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음의 두 질문을 비교해보라.

 

"환경은 완벽한데 대체 왜 저런 족속들이 나타나는 것인가? 역시 저 놈들은 태생적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다."

"자유가 만연한 평등 사회에서 대체 왜 저렇게 낙오하는 것인가? 저들은 미숙아이거나 게으름이 병처럼 몸에 박혀있을 뿐이다."

 

결론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되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적 관점이든 도덕적 관점이든, 그것은 모두 개인이 초래한 것이며 잘못은 그들의 유전자에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왜 저들은 이 사회의 조건이 무균질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유주의'가 현상을 왜곡하여 제시하고 결론을 이끌어 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쨌거나 무척이나 많은 부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책. 그리고 분명 한 번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은 길이다 - 루쉰 아포리즘
루쉰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이철수 그림 / 예문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부제에도 써있지만 말 그대로 루쉰의 아포리즘. 자기 반성의 기록이 왜 중요한가를 느끼게 해준 책.

 

죽은 자가 산 자의 마음 속에 묻히지 않을 때 그는 참으로 죽고 만다.

 

돈이란 말은 매우 귀에 거슬린다. 고상한 군자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의견이란 것은 어제와 오늘이 다를 뿐만 아니라 식전과 식후가 왕왕 다른 법이다. 무릇 밥은 돈을 줘야 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저하면서도 돈 소리 하는 것은 비천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있다......

 

공자가 그랬다. "여자와 어린애들은 다루기 힘들다. 가까이 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여자와 어린 아이를 함께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자기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훗날 도학자 선생들은 표면적으로는 어머니를 존경하였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중국에서 어머니가 된 여성들은 자기 아들 이외의 모든 남자들의 경멸을 받고 있다.

 

니체는 피로 쓴 책을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피로 쓴 문장은 아마 없으리라 글은 어차피 먹으로 쓴다. 피로 쓴 것은 핏자국일 뿐이다. 핏자국은 물론 글보다 격정적이고, 직접적이며 분명하다. 하지만 쉽게 변색되고 지워지기 쉽다. 문학의 힘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루쉰은 뒤에 모순된 말을 하고 있기도 하다.)

 

......전해지기만 하면 좋은 문학이요, 소실된 것은 나쁜 문학이다. 천하를 빼앗으면 왕이고, 빼앗지 못하면 역적이다. 중국인의 이런 역사관이 문학에까지 그대로 연장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루쉰 선생의 날카로운 통찰 또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고 이름을 붙여 분류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당신은 국민입니다"이고, 하나는 "당신은 세계인입니다"이다. 전자는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하게 된다고 두려워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명에 위배된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말의 진정한 뜻을 살펴보건대, 비록 일관된 주장은 없지만 모두 인간의 자아를 압살하고 획일화하여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대중들 속에 매몰시키려는 것이다..... 두 가지 주장이 상반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개성을 말살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역시 내 마음을 울리는 구절은 소설 '고향'의 저 구절. 지겹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결코 지겨워서는 안된다.

혹시 저 구절은 알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일독을 권한다. 분량도 아주 적으니까.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 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아..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뒤에 MSN 대화명이 선생의 유언 중 한 구절로 바뀌었다.

 

그들이 나를 증오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나 역시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를 말하기엔 아직 나는, 증오조차 하지 못했다.

진정 그러하다. 부끄러운 줄을 알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