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5
D.H. 로렌스 지음, 김정매 옮김 / 민음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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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긴 소설이 주는 충만감이랄 게 있다. 이야기가 길면 길수록 그 안에 담긴 등장인물과 사건사고와 생각할 거리의 수가 늘어날 테고 시공간적으로 폭넓은 배경을 종횡무진하는 체험이 가능해지는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오는 보람도 무시할 수 없겠다. 로렌스의 『무지개』는 도합 900페이지 분량의 두툼한 2권짜리 소설이다. 소설은 브랑원 가의 톰과 이방인 렌스키의 만남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딸, 손녀로까지 발을 넓힌다. 그리하여 방대한 분량의 소설은 또 방대한 가문의 서사로 뻗친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도 보람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을 테다.

1.

브랑윈 가문은 본래 농장의 대지주다. 그들보다 훨씬 앞선 세대부터 농사일을 시작했기에 브랑원 가는 넓은 밭과 하늘, 그리고 교회 첨탑이 우뚝 솟은 시골 풍경에 아주 익숙하게 자랐다. 그런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노동, 활기, 번창, 상속이었다. 남자들은 몸통을 낮추고 땅이나 말의 등판에 딱 붙여 일했다. 여자들은 몸통을 들춰서 시골 바깥의 상류사회를 바라보고 동경했다. 때마침 영국 사회는 한창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 교육, 공장, 도시, 새로운 직업과 자아실현 문제가 새로 꿈틀대는 중이었다.

작가의 얼굴

그래도 브랑윈 식구들은 농사일에 전념했다. 오래된 습관이 바로 깨지는 법은 없고, 변화는 서서히 찾아들기 마련이다. 이때 어릴 적부터 시와 자연을 사랑했던 브랑윈의 막내아들 톰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여인은 폴란드 출신으로, 남편과 사별한 뒤 어린 딸을 데리고 이곳 시골에 찾아왔다고 한다. 톰은 갈수록 그녀를 향한 마음이 커져간다고 느꼈다. 두 사람은 결혼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 사이가 원활하지는 못했다. 톰의 아내가 된 리디아 렌스키에게는 과거가 있었다. 그녀의 전남편은 폴란드의 독립운동가였는데, 애국주의라는 강력한 신념 하에 항상 무언가를 하느라 바빴다. 그녀에게 전남편은 사실 없는 사람과 같았다. 전남편은 항상 정의를 운운하며 사회로 나가 싸웠지만 가정 일은 매번 뒷전에 뒀으니 말이다. 그래도 렌스키 남편의 비위에 맞춰 알아서 행동해야만 했다. 남편이 곧 정의였으므로. 그 일이 결국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더래도.

그러니 렌스키가 조용하고 수동적인 여인이라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가뜩이나 폴란드에서 꽤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이었던 그녀로서는 브랑윈 가문을 높게 칠 수 없었을 테다. 반면 톰은 그녀가 여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딴에는 아내란 남편에게 말도 건넬 줄 알고 살갑게 대해줘야 한다고 여긴 것 같다. 그 둘은 서로를 사랑하긴 하는데 어느 하나 내색하고 표현하는 일에 서툴렀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지레짐작하며, 상대방을 두려워하고, 속으로 울분을 터뜨렸다. 그들은 싸우고 사랑하기를 반복한다.

렌스키와 브랑원의 첨예한 대립

2.

이들을 지켜본 어린 딸 애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 애나는 어머니를 닮아 고고한 혈통을 알게 모르게 중시했고 새아버지를 닮아 풍요로운 재산을 누릴 줄 알았다. 이 같은 성장 배경으로 그녀는 완만하고 밝은 성격을 갖추되 종종 남에게 불만을 품으면 모멸차게 공격할 줄도 알았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신앙을 배울 때도 그녀의 마음에 피어난 생각은 다소 반항적이다. 그녀 딴에는 신앙심이란 마음속에 있는 동안은 격렬하게 감동적이지만 목사의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천박해진다고 봤다.

이 같은 생각은 나중에 남편 될 사람, 윌리엄을 만나면서 더 날 서게 된다. 두 사람은 사촌 관계로 교회에서 처음 만나게 됐다. 당시 애나는 윌을 어딘가 서툴고 모자란 녀석이라 보고 무시할 생각이었지만 찬송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역시 그는 어딘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그 일로 애나는 윌을 자꾸 떠올렸고, 그와 친해졌으며, 마침내 결혼했다.

이 첫 만남에 주목하자면, 윌리엄과 애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찬송가를 부를 때 그는 한껏 진지했을 것이다. 그런 진지한 태도, 어찌 보면 지나치게 과장된 경건함이 애나를 웃기게 하지 않았을까? 애나는 종교의 의미를 고찰하지도 않고 무작정 믿는 사람들을 깔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바로 그 중 하나였고. 결혼 후 윌리엄이 한창 아담과 하와 조각상을 만드는 일에만 열중하자 애나는 성경 속 내용을 두고 그와 언쟁하기도 한다.

"왜 목각을 계속하지 않아요? 아담과 하와 상을 왜 끝내지 않아요?"

이렇게 묻긴 했어도 아내는 아담과 하와 상에 관심이 없었고, 남편은 그 조각에도 또다시 손을 대지 않았다. 아내는 하와의 모습을 보고는 "꼭 작은 꼭두각시 같네요."라고 빈정댔다.

"왜 저렇게 몸집이 작지요? 아담은 하느님만큼이나 몸집이 큰데 하와는 꼭 인형같이 만들었군요.

아내는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가 남자 몸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모든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남자들이란 얼마나 무례하고 건방진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318-319

애나가 종교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애나는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없었고 상처 난 예수의 몸을 전시하는 피에타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것의 의미를 물어봐도 누군가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바로 옆의 남편 윌리엄 또한 그렇지 않은가.

"그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야."

남편은 격렬한 어투로 냉혹하게 맞섰다.

"당신은 알고 있는 것만 조롱하고 모르는 것은 못하지."

"제가 무얼 몰라요?"

"사물의 의미지."

"그럼, 그 의미가 뭐예요?"

그는 대답하기를 꺼렸다. 대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도대체 그 뜻이 뭐란 말이에요?"

아내가 다그쳤다.

"부활의 승리지."

아내는 주저하며 낭패감을 느꼈다. 공포가 엄습했다. 도대체 이런 것들이 다 무언가? 어떤 강력하고 어두운 존재가 그녀 앞에서 뻗어나가는 것 같았다. 결국 그건 놀라운 것인가?

그렇지만 그건 아니야, 그녀는 이를 부인했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295

"물이 포도주로 변했든 안 변했든 그건 나에게 별 상관없어. 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니까."

그가 말했다.

"그래, 있는 그대로가 뭐지요?"

아내는 기대에 차서 다그쳐 물었다.

"그건 성경 말씀 그대로지."

그런 식의 대답에 아내는 격분해서 남편을 멸시했다. 성경에 대해서는 나서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로 하여금 그를 멸시하게끔 만들었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315

성경을 존중하면서 그것을 무작정 수용하려 들지 않는 애나는 상당히 현대적인 인물이다. 이 말은 그녀가 세상의 이치,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살피고 탐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나의 자아실현 욕구는 아쉽지만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출산을 하면서 어머니로서 역할에 보다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남편에게 종속되려 하지 않은 애나였지만, 그녀 생활에서 어린 자식의 비중이 그녀 자신보다 훨씬 커져버린 셈이다.

비교적 구체적 내용을 담은 책의 차례들.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제6장 '승리자 애나'에서 따왔다

3.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다음 세대인 어슐라가 곱게 받아들일 리 없다. 어슐라는 애나와 윌리엄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이다. 그녀를 낳을 적에 부부는 당연히 기뻐하고 감사했으나 둘째와 셋째가 연달아 태어나면서 아무래도 어슐라를 소홀히 대하게 됐는데, 그 때문인지 천성적으로 모계로부터 이어받은 자아실현 욕구 때문인지, 그녀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관심을 쏟았다. 어떻게 하면 진정 어슐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세상은 무엇으로 이뤄지고 돌아가는지 등을.

어슐라도 어머니 애나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의미를 먼저 고찰했다. 그녀는 성경에 쓰인 모든 이야기가 우리 삶에 모두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나중 가서 사제 관계로 만난 잉거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 더 단단해졌다.

어슐라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종교가 결국은 인간의 열망에다가 특별한 옷을 입힌 것이란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열망은 진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입힌 옷은 거의 국가적인 취향이나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발가벗은 아폴론 신을 섬겼고 기독교인들은 흰옷 입은 그리스도를, 불교도들은 싯다르타 왕자를, 이집트 사람들은 오시리스 신을 섬겼다. 갖가지 종교는 지역적인 것이나 종교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는 지엽적인 분파였다. 아직은 지엽적인 여러 종교들이 하나의 종교로 동화되지는 않았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167

지적이고 자주적인 스승에게 한껏 경도된 어슐라는 몰래 잉거를 흠모했다. 단순히 그녀를 선생님으로서 동경하는 게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 로맨틱한 기류가 흐르는 순간도 찾아오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슐라는 그 뒤로도 수많은 사람과 만나 어울리게 됐다. 장차 사람과 사랑을 알아가며 어슐라는 자기도 남성의 세계, 소위 말해 직업 여성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됐다.

어슐라의 동성애 성향이 드러나는 구절

이 점이 이전 세대의 여성들과 달리 어슐라가 한 발짝 앞선 특징이기도 하다. 1대 렌스키와 2대 애나는 자아에 대한 고민을 끌어당기긴 하나 어디까지나 가정에서의 역할로 한정됐다. 아무래도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굳이 직업을 갖지 않고도 생계가 어렵지 않던 시절이라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슐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브랑윈 가에 머물며 편히 살 수 있음에도 어슐라는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경제력을 갖춰야지 독립적인 주체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직업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어슐라가 남성의 세계라 일컬은 직장은 예상대로 남성의 논리로 돌아갔기에 그녀로서는 오히려 제 자아를 직업의 틀 속에 욱여넣어야 했다. 어슐라가 첫 직장으로 삼은 초등학교에서 얼마나 부푼 꿈을 꿨던가. 그러나 교사 노릇이란 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고, 교장은 실적 없는 교사들을 내쫓는 궁리나 했으며, 동료 교사들은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그녀도 가르침을 받는 학생보다 그 학생이 제출한 숙제에 더 눈길을 돌렸다. 자아실현을 꿈꾸며 시작한 일이 그녀를 점차 잠식해 가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여러 동료 교사들은 그런 현실을 하등 문제 삼지 않았다. 대체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교육 체제와 관료제를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어슐라도 차마 이 현실을 고치려 들지 못하지만, 무언가 잘못됐음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는 어슐라와 다른 동료의 차이점이자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직업의 세계는 남성의 무대, 즉 이미 남자들에게 익숙한 세계였다. 그래서 기존의 불합리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일에 남자들은 길들여져 있었다. 처음 직장에 발을 디딘 어슐라에게 보이는 것들이 외려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관료제를 그대로 따르는 교사의 초상

그런 면에서 소설의 도입부는 남녀의 관점 차이를 더없이 적절하게 요약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내가 처음 『무지개』의 첫 장을 펼친 당시만 해도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소의 젖을 짜고, 말을 타고, 자연과 하나 됨을 느끼는 데 반해 여자들은 고개를 돌려 먼 세상을 바라봤다는 것이. 로렌스는 어쩌면 사회 진출을 막 시작한 여성들만이 바라볼 수 있는, 관성적이고 딱딱한 남성 세계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하는 일에 익숙해져 땅바닥에 고개를 박은 남성들과 달리 허리를 바로 세워 현실을 볼 줄 아는 여성상을 제시하려 한 것 아닐까?

5.

아무튼 이 야심차고 장대한 서사는 내가 쓴 글처럼 두부 자르듯 선명히 나뉘지 않는다. 어슐라 또한 여러 면에서 자기모순적인 인물이고 좌절과 실패를 반복하며 무너질 때도 있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을 것처럼 말하면서 사실 꽤 많은 영향을 받고, 자신의 실수에 관대하게 굴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침울해지는 대신 밝은 면을 바라보며 더 나은 장래를 꿈꿀 준비를 한다. 그녀가 어머니와 할머니보다 더 현대적인 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 있다.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찬 긍정. 그런 그녀에게 하늘은 무지개를 띄어준다.

무지개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뿐 아니라 너와 함께 지내며 숨 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계약의 표는 이것이다.

내가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가 될 것이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구약 성경 창세기 9장 12~15절

(『무지개 2』, p.127 참고)

종교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 듯한 이 작품은 또 한편으로 더없이 종교적이다. 그래서인지 어슐라를 비롯한 브랑원 가의 서사는 쾌활하고 복작하면서도 경건한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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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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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제목을 보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숫자 9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도 생각해야 했다. 구라고 읽을 수도 아홉이라 읽을 수도 있겠는데 둘의 뉘앙스는 또 다르지 않는가. 구 번이라 하면은 보통명사로 특정한 무엇을 지칭하는 듯하다. 아홉 번이라 하면은 횟수가 먼저 연상된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 숫자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이것은 에 관한 소설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사실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는데 내용이 온통, 지독하게 일 얘기뿐이다. 주인공은 일만 하나? 그래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한몫한다. 생활비가 빠듯해서 마트에서 2교대로 근무하는 아내. 대학 진학을 목표로 독서실을 나다니는 아들. 하지만 저성과자로 찍혀 회사로부터 은근히 퇴직을 강요받는 주인공.

양가 부모님께서 모두 아프시고, 설상가상으로 아내마저 몸이 성치 않다. 다시 말해 이런 상황에서 보통 일은 부수적인 기능, 요컨대 자아실현이라든지 직무 능률 향상 따위를 다 제쳐두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면 족하고 만다.


작가의 얼굴

퇴직을 요구하는 회사 측에서 주인공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일감을 줄 테니 시키는 일을 하라고. 그는 그렇게 회사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농가의 판매 부서로 발령받게 된다. 그곳이 차로 한 시간 거리든 두 시간 거리든 그로서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영업일은 본래 그의 담당이 아니었다. 그는 엔지니어였다. 26년 동안이나, 이곳 통신회사에서. 사실 그가 이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였을 적부터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해야 했다. 하지만 일찍 직감했더라도 뭔가 달라졌을까. 그는 실제로 영업을 시작하는 첫날부터 그 낌새를 눈치챘지만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건 단지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어쩌면 지독한 옹고집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노동의 가치, 땀으로 번 돈, 직무를 통한 성취감을 믿었다. 오랫동안 몸담은 회사를 믿었고, 그토록 회사가 매몰차게 자기를 내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새 업무를 받을 때에도 그가 희망을 잃지 않은 이유가 거기 있다. 사실상 그에게 부여된 영업 일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비닐하우스만 즐비하고, 인터넷에 관심 없는 어르신들을 상대로 통신 기기를 팔라니. 그래도 그가 최선을 다 한 이유는, 그 일 또한 회사에서 다 이유가 있으니까 시킨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문과 첫문장. 돌이켜 보면 참 씁쓸한 문장 같기도 하다

그런 면이 그와 주변 동료들의 가장 큰 차이었다. 발령 받은 뒤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그 말고 다른 동료들은 통성명하기를 거부했다. 어차피 다들 한철 벌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신세라고 한탄하면서. 그가 보기에 동료들은 매사 부정적이고 무엇이든 제대로 할 의욕조차 비추질 않았다. 그들이 왜 저성과자로 찍혔는지 내심 알 것도 같았다 - 하지만 그 또한 그들과 같은 처지로 이곳에 온 게 아닌가? 그렇게 그는 주변 동료들과 서서히 멀어졌다.

회사는 그의 기대를 꺾었다. 분명 일을 시킨 것은 회사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하려고 했다. 비닐하우스에 무선 인터넷을 설치하기로 한 계약을 따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 그의 계약을 검토하더니 설치 불가 통보를 때렸다. 그곳이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땅주인과 연락을 해가며 어찌저찌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가 비닐하우스 건을 해내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먼 곳으로 전출당할 예정이다. 이런 부당한 사실을 그는 영업 팀장에게 고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끄럽게, 물 흐르듯 상황은 잘도 처리된다.

그는 비닐하우스 주변을 돌며 꼼꼼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차를 몰고 곧장 대리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팀장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산간 오지나 열 가구 남짓한 작은 섬에까지 케이블을 연결하면서 그곳은 왜 안 되느냐고 질문했고, 불가피할 땐 전신주를 빌려 쓸 수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은 왜 고려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팀장은 마우스를 딸깍이며 느릿느릿 대꾸했다.

모르지요. 제가 뭘 압니까. 위에서 그러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런 다음 뭔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는지 모니터를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김혜진, 『9번의 일』,

한겨레출판, p.107

그렇게 새로운 근무지로 전전하던 그는 결국 어딘가로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숫자, 그러니까 9번으로 불리며 일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제목에서 품었던 의문은 보통명사 '구 번'을 뜻하는 거였다. 이제 이름마저 소속으로 대체된 그는 점차 회사와 동질화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대신 회사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 대신 회사 입장에서 행동한다. 살아 보자고 시작한 일이 점차 자기 자신을 대체한다. 처음 일을 통한 희열과 자부심을 느꼈던 그는 아예 딴 사람으로 변한다 - "일이라는 건 결국엔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좋은 거, 나쁜 거. 그런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해요?"

희한하지. 일이라는 게. 한번 손에 익고 나면 바꾸기가 쉽지가 않아. 어디, 일이라는 게, 일만 하는 법인가. 사람도 만나고 세상도 배우고 하는 거지.

김혜진, 『9번의 일』,

한계레출판, p.180

우리는 왜 일하는가? 누군가는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일이 살기 위한 수단만으로 그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일이 그토록 우리 몸과 마음을 상하게 놔둬서는 안 될 테니까. 우리는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때도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한다. 일에는 그런 면이 분명 존재하고, 저자 김혜진 씨도 이 점을 지적한다. 늘 하고 익숙한 것. 잘 하게 되는 것. 때론 습관처럼 떼어내기 힘들어 그냥 규칙적으로 찾게 되는 것.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 곧 나의 성질이 되는 것.

이 말고도 『9번의 일』에서는 노동과 이를 둘러 싼 여러 문제들을 다루지만 나는 딱 두 가지에 집중해서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일하며, 그 일은 무슨 의미인가. 사실 이 중 한 가지 주제만 잘 담어내도, 그래서 독자들에게 의미를 되새겨 보도록 돋울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얇은 책이지만 쉬이 읽기에는 찝찝한 책이었다.





#소설 #김혜진 #9번의일

#한겨레출판사 #한국문학 #장편소설


: 이 사실은 소설 첫 문장에서 바로 밝혀진다. 자세히 보면 소설의 매 챕터가 시작될 때마다 그의 소속이 밝혀지곤 한다.

: 본책,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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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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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 큰 화두를 던진 게 아닌가 싶다. 제목에서 시사하듯, 그래, 우리의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그런데 이 짤막한 인생의 이치를 나란히 두고 보자니 팔짱을 낀 자세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오히려 나는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이 문구에 호감을 느껴서(이건 내 병이다) 이 책을 읽게 됐다. 예상한 대로 내용은 빤했다. 내가 아는 한 프랑스 소설은 - 편견이라 해도 좋겠다 - 불륜 소설이 많았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저 사람을 사랑하고 쟁취하고 싶다는 열망. 내 곁에 애인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끌리는 현상. 과거에도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유효할 문제 아닌가. 그런 것이 욕망이라면,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걸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됐다. 그러니까 이번이 네 번째인가. 이 책을 다시 펼쳐든 횟수 말이다. 이런 빤하디 빤한 이야기를 네 차례씩이나 읽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용은 빤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빤하지 않고 미묘해서. 예전에는 그 느낌이 어떤 충만한 만족감을 준다고 스스로 여겼지만 그게 무어냐 물어보면 잘 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좋아하는 음악을 남들에게 추천할 때 최선의 방법이 그냥 들어보라 하는 것처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 이번에 나는 그 어려움을 파헤치고자 이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그 결과 썩 시원치 않은 결론이 나올까 봐 걱정됐지만 그래도 뭔 말이라도 지껄일 순 있을 것 같다.

/

한 남자가 벨 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한다. 화면에 찍힌 이름은 노라. 노라는 자신이 파리에 찾아온 경위를 짤막하게 밝히고는 남자가 몇 마디 꺼내보기도 전에 통화를 끊는다. 남자는 허탈해 한다. 그는 이 전화를 이 년 동안 기다려 왔다.

또 다른 남자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짐을 푼다. 불현듯 나쁜 직감에 휩쓸린다. 아니나 다를까, 그와 동거하고 있던 여인이 급히 짐을 싸서 떠난 흔적만이 역력하다. 이 일이 한두 번도 아니긴 하나, 남자의 허망한 심정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는다.


소설의 일부

맨 처음 소개한 남자는 블레리오, 그다음으로 소개한 남자가 머피다. 두 남자는 사는 곳도 다르고 각기 다른 성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볼품없는 남자이기도 하다.

블레리오는 부모님께서 큰 뜻을 이루라는 의미로 프랑스의 전설적인 비행사 루이 블레리오와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셨(더랬)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의약품이나 전자 기기 따위에 붙은 설명서, 과학 기사에 쓰인 자잘한 영 문장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번역가다. 그의 아내 사빈은 예술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말하자면 인텔리다. 모든 면에서 그녀가 블레리오를 앞섰다. 그녀는 그보다 나이도 많았고, 이혼 전적도 있었고, 지적인 데다 성적 매력도 있(었?)고, 사교적인 성격 덕에 사람들과 두루 친했다. 언제나 아내를 볼 때마다 그는 알게 모르게 부채감을 느꼈다. 그 부채감은,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금전적인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머피는? 미국인 머피는 하버드 출신의 인텔리이자 런던의 증권중개인으로 일하는, 다소 고지식한 남자다. 사교적인 편도 못 돼서 직장 동료들과 원활히 지내지도 않고 금융인답게(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만) 낭만보다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갖췄다. 따라서 노라가 간혹 그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 다름 아닌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금전적으로 그녀를 돕는다. 하지만 자꾸만 그녀는 떠나는데. 정말 머피는 돈이 궁해서 그녀가 이곳저곳 손 벌려야 했다고 생각한 걸까?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에서도 얄팍한 운명의 장난기가 느껴진다. <머피의 법칙>: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갈수록 꼬이기만 하는 경우에 쓰이는 용어.


작가의 얼굴

욕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소설 속 인물을 무어라 상징하는 짓을 내가 제일 싫어하긴 하지만,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구도다. 블레리오는 욕망의 주체고 머피는 책임의 주체다. 가정에서 누가 봐도 가장 자격을 상실한 블레리오는 아내를 어려워하고, 그렇다고 아내에게서 벗어날 자신도 없다. 암울한 부부 관계는 온통 그의 책임 같아서 괴롭다(하지만 해결은 어떻게?). 그런데 한때 그와 정반대로 건장했던 아버지조차 다 늙어서 어머니한테 맞고 사는 처지 아닌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긴 하루를 잊게 해주는 찰나의 쾌락이다. 그 쾌락은 아내가 아닌 노라가 충족해 준다.

하지만 욕망을 절제하는 삶 또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머피는 블레리오와 정확히 대척점에 선 이다. 여전히 블레리오가 부모님과 배우자(이 경우에는 거의 이들을 묶어 '보호자'라고 해야 낫겠다)에게 손 벌리는 것과 다르게 머피는 꽤 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근면 성실한 일상을 유지하고자 힘쓴다. 그라고 욕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노라가 떠났다고 해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까지 훌쩍 떠날 만큼 낭만적이지는 못하다. 그게 낭만이라 한다면 말이지만.

두 남자 사이에서 노라는 자유롭게 사랑을 갈구한다. 노라는 그렇다면 자유의 상징이다. 그녀는 제 마음이 가는 대로 블레리오를, 머피를 - 그리고 소설에서 잠깐 등장하거나 그러지도 못하는 숱한 남자들을 - 선택하고 취한다. 어쩌면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블레리오와 머피가 그녀, 노라라는 한 사람에게 단단히 매인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노라와 같은 자유가 없었으니까. 아내에게, 깨뜨릴 수 없는 일상에, 탈출구 없는 제 자신의 욕망에, 안정적인 삶의 추구에 얽매어 있었으니까. 연극에 비유하자면, 되고 싶은 배역을 받지 못할 때 블레리오는 질투하고, 머피는 다른 대역에 안주하고, 노라는 어떻게든 그 배역을 따낸다. 그러니 두 사람 다 노라를 멍청히 바라볼 수밖에.


내가 만든 등장인물 관계도

왜 노라는 그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했을까? 소설 속에서 머피 곁으로 돌아간 노라는 그와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노라, 왜 떠났던 거야? 그녀가 식사를 마쳤을 때, 그는 나지막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돌아와 자기를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나는 그런 여자야.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걸 느껴야만 하지. 그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갈색 눈을 아주 크게 뜨면서 그녀가 속삭인다.

파트리크 라페르,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p.165

자유로운 노라답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대답은 그저 형식적인 말뿐일지도 모른다. 노라에게 머피는 블레리오만큼 열정적인 사랑을 주지 못한다. 동시에 블레리오는 머피만큼 안정적인 헌신을 보이지 못한다. 노라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아무하고나 사랑했다고? 천만에. 사실 두 남자 모두 노라에게 어느 하나 확신할 만한 답을 해주지 못했다. 노라가 정식적인 교재를 제안했을 때 블레리오는 아내 핑계를 대며 둘러댔고 머피는 평소 그녀의 행실을 떠올리며 못 들은 척했다 - 내가 앞서 두 남자 모두 볼품없는 남자라고 폄하한 이유가 이것이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갈팡질팡한다. 자유로웠던 노라는 사실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외로운 사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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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실컷 떠들었지만 나는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여전히 설명하지 못했다(적어도 이 같은 줄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심지어 글쓰기에 돌입할 당시 목표했던 욕망의 의미조차 못 밝힌 것 아닌가. 원체 개인적인 선호는 그런 건가 보다. 설명해보라 하면 그냥 느껴보라 답하고 싶은. 그래도 설명하려 하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다. 이 책은 플롯으로 보면 누구나 알 만한 얘기지만, 이를 문장으로 구체화하는 작가의 시선과 통찰력은 놀랍다. 아니, 놀랍지 않을지도 몰라도 그런 시도들이 내 취향에 부합한다. 허투루 읽히는 문장이 없고, 장면 장면이 생생하다. 이것도 사실 내 눈에만 그래 보일지도 모른다.

대신 이렇게 말해 보자. 모든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단 한 문장이 내게로 꽂혔다고. 나는 욕망을 설명하는, 이보다 정확한 문장은 별로 만나지 못했다. 하나는 시어도어 드라이저 소설에서 봤고 다른 하나는 이거다.

그건 아주 강렬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게다가 놀라운 건 그게 그토록 강렬하다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파트리크 라페르,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p.27

원래 좋아하는 이유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내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게 나다.

#소설 #파트리크라페르

#인생은짧고욕망은끝이없다 #이현희_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모던클래식 #민음사모던클래식 #페미나상 #프랑스문학 #장편소설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여명』,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외 다수. 이에 관해 프랑스 문학의 시초가 배우자 몰래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고해성사한 고백록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듣긴 했으나 정확한 출처가 기억나질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 소설가 정지돈 씨는 한 에세이(『영화와 시』)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 남들에게 설명하려 들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외려 좋았단 것조차 싫어지게 되므로 짜증이 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 실존 인물이다. "프랑스의 항공기술자. 1970년 처음으로 단엽기를 제작하였고, 1909년 11호기(25마력)을 조종하여 37분의 비행 끝에 최초의 영국 해협 횡단이 성공하였다"(두산백과 인용)

: 두산백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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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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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를 읽었다. 나는 이 책을 무책임한 성인 남자의 뒤늦은 방황기라고 요약했다. 그리고 이런 문장만으로 주인공 레빗의 성격과 행적을 묘사하려는 나도 참 요령부득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글을 쓸 때도 사소한 감상이나 줄거리, 더 나아가 작품 전체를 한 단위로 종합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레빗이라는 이 친구를 보면서 떠올린 인상들을 나는 글로 풀어쓰고자 시도했지만 참 쉽지 않다고 느꼈다. 애초에 그는 이해하기는커녕 호의적으로 보기 힘든 면모가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한때 잘나가는 농구 선수 출신에 임신 중인 아내를 둔, 그러니까 이제 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될 해리 레빗 앵스트롬¹. 어느 날 그는 어머니께 아들 넬슨을 맡겼다는 아내의 말에 부모님 댁으로 간다. 그리고 불현듯 자신이 덫에 걸렸다고 느낀다. 그는 차를 끌고 고속도로를 횡단한다. 어디로 갈지 본인도 모르는 채로 - 그렇게 정처 없이 미국 대륙을 횡단하다가 레빗은 옛 농구 감독인 마티 토세로를 만난다. 그들은 여자 둘을 만나고 거기서 레빗은 루스라는 여자와 사귀면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존 업다이크는 소위 말하는 '레빗 시리즈'를 10년 주기로 발표했다². 레빗은 말하자면 업다이크의 생애를 - 그게 한 사람으로서의 생애든 전업작가로서의 생애든 - 함께 한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다. 레빗이 업다이크, 업다이크가 레빗이라고 표하기란 아무래도 비약이 심할 테지만 미국 전체를 조망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레빗에게 투영된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래서 레빗의 눈에 비친 미국은 업다이크가 생각한 미국 그 자체였을 것이다 - 존 업다이크는 말한다. "래빗의 눈으로 본 것이 내 눈으로 본 것보다 이야기할 가치가 더 크지만, 사실 둘 사이의 차이는 미미하다.(본책, p.444 작품 해설 참고)" 내가 생각한 미국의 이미지가 있고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가 있고 그 둘은 당연히 다를 것이다. 물론 내가 한국인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인이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 또한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미국은 『위대한 개츠비』였다. 샴페인과 축제 분위기 속에서 흐트러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홀로 와인 한잔 기울이는 이. 내가 생각한 개츠비와 미국은 그런 이미지였다.

물론 『위대한 개츠비』가 그런 내용도 아닐뿐더러 미국의 이미지와 동떨어졌음을 안다. 이건 내가 순전히 미국을 떠올리면서 연상하는 이미지이자 환상이 그렇다는 소리다. 업다이크가 바라본 미국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미국이다. 그것은 당장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한 사람과 장면 속에 담겨 있다.³ 사람들은 일상 속에 걸어들어가 알아서 괴로워한다. 이유 모를 괴로움에 잠식당하고 불안감에 짜증을 부린다. 마찬가지로 처음 레빗의 일탈 행위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아내 재니스가 아이에게 무심하고 남편이 오기 전에 현관문을 걸어 잠가두며 임신 중에도 술과 담배에 찌든 모습에서 뭔가 그의 가정이 삐거덕거리고 있음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불쾌함이 레빗을 나가게 한 걸까. 말 그대로 덫에 걸린 느낌이 그를 도망가게 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레빗을 옹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가깝게 다가올 등장인물은 목사 잭 에클스다. 그는 작중에서 레빗을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맡는다. 레빗이 잠깐 차를 두고 옷가지를 챙기려 집에 들른 틈을 타 에클스는 그에게 도망간 이유를 묻고 함께 골프 약속도 잡는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에클스가 레빗의 마음을 다잡고 한 가정에 평화를 깃들게 해야 하는데. 그런데 나중 가서 에클스도 레빗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해리는 분명히 돌아올 겁니다(본책, p.222)" 레빗의 장모를 만난 에클스는 말하지만 그 말을 본인도 확신할 수 없다. 아무래도 그의 도망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복잡한 문제들이 꼬여 있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리의 문제가 감정의 부족이라기보다는 통제되지 않는 감정 과잉이기 때문에 섣불리 재결합을 하도록 밀어붙이면 안 돼요(본책, p.244 변형해서 인용)"

그렇다면 이 소설은 아주 웃기는 소설이다. 설명할 수 없는 걸 작가가 던져 놓고 독자들은 그걸 가지고 씨름하는 꼴이니 말이다. 차라리 레빗의 삶을 하나의 담론 거리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레빗은 그 가출 행위를 제외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잡하고 무책임하며 충동적이다. 어쩔 때는 오만하고 금방 풀이 죽으며, 지나치게 소심하고 응석받이다. 그의 다른 점은 가정을 벗어났을 뿐이고 사람들은 그를 가정을 파탄 낸 무뢰한이자 파렴치한이라 부른다. 우리가 레빗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이유가 거기 있다. 다 큰 평범한 성인이 가족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으면 그것은 책임의 문제지 일탈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에도 여전히 찝찝한 앙금이 남는 건 왜일까. 그 해답은 어렵지 않다. 살면서 방황하지 않는 존재란 없으며 사실 인생에서 방황하기 좋은 시기란 따로 없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레빗을 옹호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이 소설에서 레빗은 네 번 도망친다. 네 번의 도망은 곧 네 번의 덫이다. 그리고 그 덫은 갈수록 실체를 가지고 절망스럽게 그의 목을 옥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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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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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겠다. 마음이 숙연해지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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