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서점이 모두 사라진다면
화수분제작소 지음 / 화수분제작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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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수분제작소에서 펴낸 인천 소재의 동네서점 탐방기. 여기서 화수분제작소는 흔히 우리가 알 만한 출판사는 아니고, 마음 맞는 청년들끼리 뭉쳐 문화컨텐츠를 창작하는 크루 개념에 가깝다. 그래서 인천을 테마로 한 보드게임을 만들거나 문화 공간 사업을 벌이기도 한다더라. 이들의 작업실은 본래 서구의 오래된 주택가 골목에 위치해 있다는데, 해당 정보는 2년 정도가 지난지라 현재도 이들이 컨텐츠 창작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네이버 지도에 검색해도 화수분제작소 정보가 뜨질 않고 이들에 관한 최신 기사도 제작년 11월 이후로 끊겼다. 이 글에 소개된 서점들은 어떠할까? 갈수록 독서율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시대에, 과연 독립서점 사장님들은 안녕하실까?


  이런 걱정을 하는 이유는 서점업의 어려움 때문이다. 해마다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나마 독서를 즐기는 소수 인원들조차 대체로 전자책을 선호한단다. 여기서 종이책을 사는 독자가 일부 있더라도 이들 또한 대형 서점을 이용하지 독립서점을 굳이 찾지 않는다. 독립서점에 비해 대형 서점은 훨씬 많은 재고, 편리한 유통망, 보다 싸고 빠르고 간편한 배송 서비스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도서정가제라는 법이 제정됐지만, 이미 독서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데 무슨 수로 독립서점이 살아남는담?


  그럼에도 서점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 일에 돈을 보고 뛰어들지 않았다 - 하긴 돈 되는 일을 하려고 서점을 차리는 사람은 없을 테다. 이들은 물론 스스로를 책 파는 사람, 즉 장사꾼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한다. 그러니까 이들이 서점을 하는 이유는 '그 이상의 무언가'에 달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게 뭐길래. 이 책은 저자가 인천의 독립 서점을 운영하는 사장님들을 직접 만나가며 나눈 대담을 모은 인터뷰집이다. 여기서 사장님들은 개업 배경, 운영 방침과 더불어 주요 고객층, 추천 도서, 심지어 재정 상황까지 소상히 밝혀뒀다. 더하여 도서정가제 같은 요새도 민감한 사안에 관한 진솔한 의견도 엿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어떤 사람이 서점을 차릴까? 서점 사장님이라면 일단 책 읽기를 좋아할 거다. 마찬가지로 여기 인터뷰에 소개된 여덟 개의 서점, 여덟 명의 서점 사장님도 소싯적부터 소위 글밥을 먹고 자랐거나 도서 관련 업종을 가지셨던 분들이다. 그렇다고 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서점을 차리지 않는 법. 독서라는 취미가 동기가 되기야 했으나 서점 사장님들은 그보다 더 큰 꿈을 가지고 창업에 임했다.


  그건 독서라는 행위가 주는 가치에 있다. 내가 좋아서 읽고 끝내는 것도 독서라지만, 그걸로는 뭔가 아쉬운 마음도 든다. 그보다는 내가 좋아서 읽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좋았던 점을 공유하고픈 마음이 솟지 않는가. 서점 사장님의 마음은 그저 책을 팔겠다는 게 아니라 그처럼 독서 행위가 가진 부가 기능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큰 듯하다. 이 책의 머릿말에서 인터뷰어는 모든 서점 사장님을 만난 다음 이렇게 독립서점을 정의했다.


  - 그때 우리는 '동네책방' 또는 '독립서점'이라 불리는 곳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좋은 책을 소개할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를 열어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그러한 서점을 운영하는 책방지기를 일종의 '문화기획자'라고 정의했다. 동네 카페는 커피를 팔고, 동네 떡집은 떡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네 서점은 책을 판다. 카페, 떡집, 술집, 슈퍼와 다를 것 없이 서점도 무언가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자영업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점을 '그저 돈 벌려고 차린 가게'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밥과 술과 커피를 파는 다른 가게들도 서점처럼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맛있는 밥집이나 운치 있는 카페 한 곳만 있어도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그 동네에 애정을 갖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좋은 삶을 일궈주는 모든 가게가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그중에서도 서점은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소중한 가게다.

p.4-5


  그전까지 나는 독립서점에 관해 잘 몰랐다. 내가 독서를 취미로 붙인 시기는 이미 도서정가제라는 게 시행된 무렵이었으며, 그전까지 도서 판매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엄연히 말해 나는 대형 서점에 익숙한 세대고, 여기 인터뷰에서도 말하듯 독립서점의 존재 여부조차 몰랐을만큼 동네에 자그마한 책방 하나 못 만나봤(었)다. 아, 고등학교 옆에 서점이 있긴 했지만 온통 문제집 뿐이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면 소설 책을 읽는 행위란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처럼 인천 출신인데다 조금은 아랫세대로서, 그리고 독서를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나도 서점 사장님들의 고민들에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 지역이 가지는 특성, 좋게 말해 개성이고 나쁘게 말해 허점이라 할 만한 면을.


  - 여기서 책방을 하는 큰 동기 중의 하나가 좋은 건 다서울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책방부터 시작해서 공연장, 미술관 이런 공간은 다 서울에 있다. (중략)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전국 투어 공연을 하면, 서울에서도 하고 부산에서도 하는데, 인천에서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천과 가까운 서울에서 하기 때문이다. 이게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딜레마처럼 느껴졌다. 서울과 가까우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p.192


  - 인천에는 아직 확실하게 아티스트 로드 또는 아트로드 이미지를 가진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동인천 쪽도 사실 그런 이미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거기는 재미있는 옛 가게들이 모여 있는 좀 울퉁불퉁한 곳 정도일 뿐이지, 홍대나 문래예술창작촌처럼 아티스트들이 뭔가를 해나가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는 않다. 인천의 그 어느 곳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그렇다고 그걸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은 시도는 해보고 싶다.

p.174-175


  - 처음에는 주안역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걸어왔다. 오면서 본 것은 대체로 술집들이었다. 이른 오후에도 문을 열지 않는 가게들이 많다.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다. 전에 중국 여행을 갔을 때, 어느 동네에 갔는데 쉴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들어가서 다리도 풀면서 차 한 잔 마실 곳이 없는 것이다. 결국 무더운 날씨에도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주안동은 그런 동네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 사람들이 '이 동네 정말 재미있다. 또 오고 싶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p.75


  내가 사는 집 주변을 봐도 문화 시설이랄 게 손에 꼽는 것 같다. 어디에도 녹지는 보이질 않고 온통 건물만 빼곡히 자리잡은 데다 당장 창밖을 내다 봐도 타워 크레인만 하나 둘 셋...... 그렇다고 독립서점의 활성화가 문화 사업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말했다시피 계속해서 독서 인구는 줄어드는 추세니까.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서점이 그런 역할을 해줄 거라고 기대하고, (이들을 살리려는 명목 하에) 도서라는 재화가 가진 특수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 도서정가제는 그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도서정가제는 정말 독립서점을 살리는 역할을 해냈을까? 서점 사장님들은 이렇게 말한다.


  - 세 번째로 많이 들었던 질문이 바로 '왜 10퍼센트 할인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선 10퍼센트 할인을 할 수가 없다. 대형마트에 들어가는 과자 값은 동네 가게에 들어가는 과자 값과 다르다. 책값도 마찬가지다. 출판사에서 책정한 도매가가 있지만 유통 단계를 잘 살펴봐야 한다. 온라인 서점은 출판사에서 책을 바로 받지만, 동네책방은 도매처를 거쳐서 책을 받는다.

p.24-25


  - 도서정가제를 하더라도 인터넷 서점이나 대형 서점에서 할인도 해주고 배송도 무료고 심지어 굿즈도 주니까 크게 의미가 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어떻게 혜택을 줘도 어려운 건 똑같이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관공서나 학교, 도서관, 학습기관에서 동네책방을 통해 책을 구매하는 방안을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p.67



  결국 유통의 관점에서 대형 서점이 메리트를, 독립서점이 패널티를 갖고 출발하기 때문에 할인률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 이 말은 나도 참 동감하면서도 어쩔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똑같은 상품을 더 싼 값에 파는 대형 서점에 소비자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처사다. 솔직히 나도 값싸고 마일리지 혜택까지 얹어주는 대형 서점을 여전히 더 선호하니까. 이것이 도서정가제가 가진 빈틈이자 한계다. 그렇다고 내가 완전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이제나 저제나 대형 서점은 분명히 독립서점보다 유리한 세일즈 포인트를 차지할 테니까(하다 못해 당장의 무료 배송이나 굿즈 판매에 있어서도 대형 서점이 훨씬 소비자 친화적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내가 가장 동감한 서점 사장님의 말은 이러하다.

  

  - 독자들은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면 당장 15퍼센트는 할인을 받는다. 10퍼센트는 할인하고 5퍼센트는 적립금을 받는 형태다. 그런데 같은 책을 동네책방에서 정가를 내고 살 때는 본인이 얻을 수 있는 사회적 후생을 그만큼 포기하는 거다. 따라서 그만큼 반대급부를 동네책방에서 제공해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동네책방들이 그런 고민을 많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동네책방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사업은 이 지원이 단순히 서점 몫으로 고이는 게 아니라 지역 사회의 사회적 후생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그게 잘 이뤄져야 동네책방이 정말 지역 사회의 문화거점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니 서점의 가치와 그 존재 당위가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바로 서점의 철학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현실은 문화라는 말로 소비하는 데 그칠 뿐인 일회성 행사가 반복되고 있다.

p.116-117


  반대급부. 대형 서점에 비해 가질 수 있는 독립서점의 최대 강점은 무엇인지, 그 반대급부를 충분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사각공간 사장님의 말씀처럼. 이에 정부는 지역 서점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추진한다고야 하지만 사장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다지 효력은 없는 듯싶다. 보여주기 식 행정에 불과하거나 성과 책정에만 급급하다는 느낌이라서.

아무튼 여러모로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럼에도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나도 생각해 봤다. 여기 실린 인터뷰 일지도 어느덧 4년 가까이 지났고, 그 사이 몇 개의 서점은 위치를 옮겼거나 사라진 듯하다. 여덟 분의 사장님 모두 서점 일에 진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독립서점은 도태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이들의 가치를 지지하고 가꿔 나가는 게 맞는지 충분히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그 고민의 주체는 누구일까? 서점 사장님? 독자들 혹은 동네 주민? 정부? 단순히 독자와 서점 사장님들께 맡길 수 없는 문제임은 확실해 보인다. 나는 이런 가게들이 던지는 풍경이 알게 모르게 값지고 소중하다고 믿는 편이다, 서점으로부터 우리가 혜택을 받든 안 받든.


나는 이 책을 위해서 소개된 여덟 개의 독립 서점 중 한 곳에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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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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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설고도, 어쩌면 도발적이기까지 한 박솔뫼 작가의 단편 데뷔작이다. 나는 박솔뫼 작가를 장편 『미래 산책 연습』으로 처음 만났고, 제대로 완독하기론 단편집 『그럼 무얼 부르지』가 처음이었다. 이후 그녀의 또 다른 단편집 『우리의 사람들』을, 그리고 중간에 덮은 『미래 산책 연습』을 마저 다 읽으며 도합 세 권을 접해봤다. 찾아보니까 내가 후술한 두 소설은 비교적 근래작이었다. 이런 얘기를 내가 왜 하는 걸까. 그건 내가 초기작이라고 소개하기가 이질감이 들 정도로 『그럼 무얼 부르지』가 놀랍고도 실험적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이게 긍정적인 의미인지는 유보하겠다. 어쨌거나 놀랍고도 실험적인 소설. 이건 몸소 읽어봐야지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긴 말 하지 말고 한 번 읽어보자.


  - 해나를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인데 그사이 나는 일본의 교토로 여행을 갔다 온다.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그 사이 여행은 그것이 전부였고 또 다른 하나는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그곳에서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만난 것은 교토 시조 가와라마치 근처에 있던 바였다. 버클리 대학 근처 카페와 교토 시조역 근처 바, 둘 중 어느 곳이 더 의외이려나. 30여년 전에, 내가 태어난 도시에서 있던 일에 대해 불현듯 듣는 것으로 말이다. 역시나 바에서 만난 이 사람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커다란 덩치에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안경을 썼고 짙은 청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p.132-133


  주절주절 이어쓰는 이 말들은 이야기라기보다 차라리 푸념에 가깝게 들린다. 인용한 구절에서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지만, 글이 또한 상당히 말하듯이 읽힌다. 여러 문장이 구두점 없이 죽 늘어지거나 지금 내가 쓰는 문장처럼 종결어미를 '-다'로 끝맺지 않고. 그래서 나는 일전에 박솔뫼의 글을 일기 같다고 말했는데, 이 단어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가벼이 읽힌다는 뜻으로 와전되겠거니 싶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아마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테지만 여기 실린 글들은 일상적이지도, 썩 편안하게 읽히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둡고 비현실적인 일들이 펼쳐진다면 모를까. 그러니까 그녀의 글은 일과를 늘여놓는 일기의 성격과 거리가 멀다. 문체는 그래 보일지 몰라도 실제 내용은 딴판이다.


  여기 실린 단편 중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단연 『안 해』일 것이다. 처음에 이 단편을 읽어 보고 어찌나 깜짝 놀라고 당혹스러웠는지. 하지만 『안 해』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직전에 실린 단편 『차가운 혀』부터 먼저 봐야 할 것 같다. 이 단편도 썩 편하게 읽히진 않는다. 여기서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시작부터 관계의 삼각형 구도에 대해 설파한다. 나와 사과와 오렌지. 그렇게 세 가지 축이 생겨야지 관계는 유지되는데, 설령 내게서 사과가 떨어져 나가도 나와 오렌지가 남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게 요지다. 나는 어느 바에서 일하며 사과와 오렌지를 깎고 서빙을 하고 재떨이를 비우고 닭을 튀긴다. 그 무렵 나는 사귀는 누나와 동거하고 있는데, 그 누나는 직원도 아니면서 바에 놀러와 나와 같이 일했다. 사장은 그런 누나더러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장이 나와 누나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처음에 사장은 우리더러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묻다가, 나중 가서  오늘은 무얼 했느냐고 묻는 식으로 자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사장이 묻는 말에 대체로 답하질 못했고, 그런 껄끄러운 질문을 듣기 싫었다. 사장도 보기 싫었다. 나와 달리 누나는 사장의 질문에 곧잘 대답하며 대화다운 대화를 이어갈 줄 안다. 나는 사장과 말이 잘 통하는 누나를 보기가 힘들다. 시간이 지나 누나는 가게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술만 계속 마셨고 사장은 나를 잘랐다. 나는 우리의 아름다운 삼각형이 깨져버렸음을 깨닫고 방안에 홀로 지낸다. 그 뒤로 다시 시간이 지나, 누나는 내 집에 돌아오고 오랜만에 둘이서 사랑을 나눈다. 그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몇 가지 내용을 중간중간 생략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가 이러하다. 여기서 내가 느낀 소설의 인상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착 가라앉았구나 싶었다. 여기 단편 속 주인공은 특별한 욕구랄 게 없이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여러 차례 누나와 사랑을 나누기야 하지만, 그 같은 애정 행각은 욕구에 기반한다기보다 늘상 있는 일 정도로 처리된다. 결정적으로 바에서 잘려 누나와 멀어지게 된 뒤에도 나는 방안에 폐인처럼 틀어박혀 관계의 삼각형이나 운운하며 본드에 취한다. 혼자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관계를 회복시킬 의지나 노력 없이 체념하듯 구는 포즈. 이런 게 뭐 현대인의 우울한 자화상이란 건가. 이런 비슷한 정서가 다음 소설에서도 이어지겠거니 나는 넘겨 짚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단편이 『안 해』였다.


  이 소설도 한번 보자. 노래방에 찾아온 청소년 남녀가 노래를 부른다. 남자애는 물을 사러 나가고 여자애는 남아서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지나도 남자애가 돌아오지 않길래 여자애는 문쪽을 돌아본다. 그런데 문 밖에서 노래방 사장이 여자애를 쳐다보고 있다. 순간 오싹한 느낌에 사로잡힌 여자애는 다시 노래방 기계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노래방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방 안을 급습한다.

  노래방 사장에게 붙잡히자 겁에 질린 여자애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이 남자는 범죄자인가. 그런데 사장은 여자애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노래를 이어 부르라고 시킨다. 벌벌 떠는 여자애가 옴짝달싹 못하자 사장은 그애를 세게 친다. 그제서야 여자애는 정신을 차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장은 만족하지 못한 듯 노래를 더 시킨다.

  무슨 이런 엽기적인 사건이 있나. 솔직히 말해 이 단편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 두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도심의 노래방에서 벌어지는 납치극이라니. 아니, 남자애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므로 정황상 폭행 내지 살인극까지 추가해야 하나. 너무 섬뜩한 이 이야기는 그러나 의외의 순간 전환점을 맞이한다. 사장이 여자애, 그리고 이미 갇혀 있던 또 한 명의 여자애까지 불러다가 노래를 부르도록 시키니 말이다. 유혈이 낭자할 법한 극도로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대뜸 노래라니? 노래방 사장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이들을 가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노래를 열심히 안 불렀기 때문이란다.


  - 남자는 30분 후 노래를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 전까지는 내 이야기를 들어.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30분간 내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에 대해 생각해. 열심히.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열심히. 열심히에 도달하면 이제 너희의 소리와 너희의 노래가 완성되고 완성이 되면 너희는 이제. 이제 노래가 되어 세상으로 날아가는 거다, 그게 노래다.

p.46-47


  노래. 노래가 뭐라고. 그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며칠째 가둔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면 이제 두 여학생이 노래를 열심히 부르게 될지도 궁금해진다. 그래야지 이들이 노래방 사장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그가 말한 '열심히'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거다. 통상적으로 노래를 열심히 부른다는 게 뭔가? 음계를 기계처럼 딱딱 맞추는 건가 음정이 조금 틀려도 감정을 담아 부르는 건가.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간절히 붙잡아야 하나. 땀이 날 정도로 몸을 흔들면서 부르거나 발음을 또박또박 정직하게 부르는 건가. 남자가 추구하는 열심히란 정확히 무엇인가.

  이에 응하여 먼저 갇혀 있던 여자애는 '열심히'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 남자는 열심히에 대해 말하지? 하지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있다면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지? 하는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지? 하는 피곤한 자학 이 둘뿐이었다. 뭐 열심히 해서 뭔가 될 수도 있고 그런 게 필요하긴 하지. 나는 게임은 꽤 잘하는데 그건 열심해 해서 잘하게 된 것도 있으니까. 연습이라든가 능숙해지기 위한 시간 같은 게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건 내가 게임을 잘할 만한 필요조건을 충족했기 때문 아닌가. 그 필요조건이라는 건 냉정하게 생각하고 고집 피우지 않는 거 고집부려야 할 순간도 있겠지만 매일 주장할 수는 없는 거라는 거지 그 외에도 많지만 그 필요조건이 뭔지를 일일이 이야기하는 건 복잡하니까 놔두고 여하튼 그렇다.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데 필요한 건 열심히가 아니라고 그게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아니라니까 열심히가 아냐 무작정이 아니란 말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항목이 당사자와 함께 달려 나가는 거에 가깝다니까.

p.52-53


  이에 한술 더 떠서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하고 지적하는 구절은 정말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내가 오해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직전 단편에서 넘겨짚은 현대인의 무기력함과 우울함은, "(열심히의 세계) 그게 튼튼해?"라는 한 마디로 박살났다. 오히려 이것이 무기력함이고 우울함이라면 그 반대편이 무엇이 있는지 한 번 내놓아 보라는 식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후로 등장하는 단편들을 오해나 편견 없이 순순히 읽기로 했다. 이후에 읽은 단편들도 꽤 모호하다. 어딘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오르는 단편 「해만」은 해만이라는 외딴 섬에서 숙박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이어지는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은, 세상에, 「안 해」의 배경이었던 노래방이 재등장하는데 두 단편의 명확한 접점은 그뿐이다. 표제작 「그럼 무얼 부르지」는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해만의 지도」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앞에서 본 단편 속 해만의 지도를 그려보는 이야기다(이 또한 「해만」과 세계관을 공유할 뿐 이야기 상 명확한 접점은 없다). 「안나의 테이블」은 조카에게 들려줄 수수께끼의 내용으로 상당히 어지럽다. 여기서 줄거리를 소상히 밝히는 건 딱히 의미가 없다. 큰 틀에서 보면 두세 줄로 요약 가능할지 몰라도 자세히 보면 도무지 설명할 방도가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라.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박솔뫼 씨가 참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운 글들을 썼구나 싶다. 하나의 프리즘을 거친 빛이 여러 갈래로 굴절되듯이, 그녀가 쓴 이야기들도 독자를 거쳐 여러 차례 해석되고 감상될지 모르겠다. 소설이 끝난 다음에는 문학평론가 손정수 씨가 길고도 상세하게 작품 해설을 써뒀는데, 그 글은 적당한 만큼만 읽고 덜어냈다. 아무래도 박솔뫼 씨의 여러 글들을 종합하여 이런저런 해석을 시도한 내용인지라 내가 읽기엔 맞지 않더라. 이번 기회에 나는 『그럼 무얼 부르지』를 두 번째로 읽는데, 향후 재독할지는 두고 봐야겠다. 그보다는 『을』이나 『백행을 쓰고 싶다』 같은 장편 소설도 궁금하다. 그럼 무얼 먼저 읽지. 이제부터 그게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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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유혹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3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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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딱 한 번 우리끼리 멀리 가서 좀 쉬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요?" 

(p.59)



  이 책을 덮은 시점이 3월 중순 즈음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의 제목이 말하듯 4월의 유혹에 이끌렸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한창 봄꽃이 만개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산들거리는, 사람들의 입가에도 웃음꽃이 피어나는 그 시기를 나도 좋아한다. 봄이라는 계절이 또 추위로 웅크렸던 몸뚱어리를 일으키고 두툼했던 겨울 옷에서 해방되기도 하니까. 한편으로 4월은 그 같은 이유에서 사람을 살짝 서글퍼지게 만든다. 세상은 이리도 활짝 폈는데 나는 어떠한가. 나도 봄 같은 시절을 즐겨야 할 텐데, 하고 괜히 새해 다짐을 돌이켜보는 시점이기도 해서 말이다. 이럴 때면 괜히 매너리즘에 빠져서 어쩐지 새 자극을 찾고파진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피어난 저 꽃들처럼.

  마침 『4월의 유혹』은 그런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기로 최고봉인 소재를 채택했다. 그것은 바로 여행이다. 이 책의 주인공 로티, 그러니까 윌킨스 부인은 본래 여행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었다.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세우고 친구들을 모으는 역할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 누구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 광고를 보기 전까지는.


  그 일은 2월 어느 오후 런던의 한 여성 클럽에서 시작됐다. 불편한 모임이었고 끔찍한 오후였다. 윌킨스 부인은 햄프스테드에서 쇼핑하러 왔다가 클럽에서 점심을 먹은 뒤 우연히 흡연실 테이블 위에 놓인 <타임스>를 보았고, 아무 생각 없이 '고민 상담 코너'를 훑어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 등나무와 햇살을 사랑하는 그대에게. 모든 것이 완비된 지중해 연안의 중세 이탈리아식 작은 성에서 4월 한 달을 보낼 기회를 드립니다. 숙련된 하인들도 있습니다. 사서함 1000, Z, <타임스>로 문의 바랍니다.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경우처럼 당시에는 이걸 마음에 품는지조차 몰랐다.

7-8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뭐든지 갑작스럽게 되는 건 없었다, 하다 못해 확고부동해 보이는 결심이래도. 별생각 없이 대충 흘겨본 광고 문구로부터 윌킨스 부인이 생애 첫 여행 계획을, 그것도 스스로 짤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 스스로도 결심이 서질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4월의 휴양지를 간절히 바랐음을 로티는 확신했다. 기왕이면 혼자서 가야지, 하지만 무섭지 않을까? 그때 그녀는 아버스넛 부인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사교 모임에서 한 차례 얼굴 정도 비춘 적 있는 사이였다. 그러므로 누군가 선뜻 나서서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할만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버스넛 부인이 그 <타임스> 광고를 보고 있다는 걸 윌킨스 부인이 알아채기 전까지는. 자세히는 못 봤지만, 로티는 아버스넛 부인 또한 <타임스>를 짚어든 이상 중세 이탈리아식 성 광고를 봤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은 함께 여행길에 오를 친구가 될 거였다. 왜 안 되겠는가?

  실제로 아버스넛 부인은 그 광고를 봤다. 그러고서 시선을 빠르게 다음 광고로 옮겼다. 그녀 또한 그 광고를 여타의 수많은 홍보물처럼 별 생각없이 넘겨 짚었으니까. 그런데 기억조차 희미한 여인이 불쑥 달려들어 그 광고를 읽었느냐 묻는 게 아닌가. 상대 여자는 말했다. 나와 당신은 지금 우울하다고. 그래서 그 광고를 못 본 체하듯 흘겨봤을 거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광고 속 중세 이탈리아식 성이 선명히 그려지고 거기에 금세 매료될 거라고. 처음에 아버스넛 부인은 상대 여자의 무례함과 감상적 호소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곧 윌킨스 부인의 말대로 여행 광고를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게다가 윌킨스 부인의 말은 어딘가 주술 같은 분위기가 풍기기도 했다.


  - "참 이상한 얘기지만, 우리 둘은 돌아오는 4월에 중세식 성에서 만날 거예요." 윌킨스 부인은 상대방의 얘기를 전혀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스넛 부인은 다시 불안해졌다. "그래요?" 환상을 보듯 반짝이는 회색 눈빛에 넘어가지 않으려 애쓰며 부인이 말했다. "그렇게 될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눈앞에 뭔가가 번쩍 보인 적 없어요?"

  "네, 없어요." 아버스넛 부인은 말했다.

(p.25)


  그렇다고 이들이 소위 말하는 일탈을 꿈꾼 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두 여자의 여행 동기를 들어다보면, 꼭 성급하게 급조되고 어딘지 불순한 기운마저 드나 싶겠지만 그건 오해다. 다시 말하지만 윌킨스 부인에게 이런 여행 결심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버스넛 부인 또한 자기 삶의 기준을 "나침반의 방위만큼 확고한 것은 네 가지였다. 신, 남편, 가정, 의무감.(23)"이라 밝힐 정도로 평소 원칙과 규율 하에 살아왔다. 그러다가 이들은 이번 여행 일을 심사숙고했고, 휴가가 진실로 필요하다고 결론지었을 뿐이다. 그녀들은 결혼 이후에 남편 곁을 한시라도 떠나본 적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여행지에서 남자들과 어울릴 요량도 아니었다 - 여자들끼리 놀러가니까. 게다가 그녀들을 재충전한 다음 가정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딱 한 달간, 그게 그렇게 잘못됐을까? 이번 여행은 갑작스럽다기보다 오랫동안 묵혀온 열망이 터져나왔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막상 실질적인 여행 준비를 하려 드니 경비 문제에 맞닥뜨리게 됐다. 이번 여행을 남편에게 비밀로 부친 참이기에, 그들은 가진 비상금만으로 그 중세 이탈리아식 성 월세를 충당할 수 없었다. 대신 두 여인은 이번 여행에 동참할 또 다른 여자들을 모집했다. 그렇게 모인 나머지 여자들은 레이디 캐럴라인과 노부인 피셔 씨다. 이들에게도 역시 사연이랄 게 있다. 레이디 캐럴라인은 유수 높은 집안의 아가씨로 남녀 구분 없이 감탄을 부르는 외모와 목소리를 갖췄다. 하지만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과도한 호의와 친절을 배풀었고, 캐럴라인은 그 모든 게 귀찮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방되기, 그것이 케럴라인의 여행 목적이다.


  피셔 부인도 그와 비슷한 목적을 가졌지만 동기는 다르다. 오랜 세월을 거쳐 덕망 높은 지인들을 두루 사귄 피셔 부인. 그러나 그녀의 친구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녀 눈에 요즘 젊은 애들은 대게 버릇없고 어리석게만 보였다. 시끄럽게 살아 있기만 한 치들로부터 벗어나서, 이제 한적한 휴양지에 가만히 앉아 추억 속 친구들을 회상하는 게 피셔 부인의 유일한 낙이었다. 이렇게 저마다 다른 이유로 - 아니, 이유뿐만 아니라 저마다 다른 나이, 성격, 성향, 인생관을 가진 이들이 과연 각자가 꿈꾼 휴식을 이룰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할 것같다. 실제로 그들은 여행 직전부터 서로를 오해하고, 속으로 멸시하고 질책도 하고, 참견도 하고 모욕도 하고 말 그대로 아웅다웅한다. 


  한편으로 이들이 분명 좋아질 거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들이 머무는 중세 이탈리아식 성이, 등나무와 햇살이 자리잡은 풍경이, 지중해를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곧 모든 문제를 눈녹듯 풀어줄 테니 말이다. 심지어 그들은 휴양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의 목표를 거진 이뤄버릴지도 모른다. 해묵은 남편과의 어색한 관계도 풀 수 있고, 누구의 부인이라 불리는 대신 제 이름을 상기할 수도 있고. 세대 간의 갈등이라든지 인간 관계의 복잡함이라든지 그게 뭐든 간에 말이다. 혹자는 소설 속 얽힌 모든 문제가 한순간 해결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지적할지 모르지만, 글쎄. 일단 해 봐야 안다. 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다. 아르님이 펼친 이 중세 이탈리아식 성에서의 하루가 복잡한 인간 관계를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보면 생각이 또 달라질 수도 있고. 나 또한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만난 것 같아 즐거웠다. 뭐랄까, 참 얼렁뚱땅하면서도 상쾌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였다. 그런 분위기가 곧 책에서 말한 4월의 유혹이지 않나 싶다. 나도 그런 4월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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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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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은 『마음』이다. 이런 말로 시작하는 게 별 뜻 없이 띄우는 모양새로 비칠지 모르지만, 저자의 명성을 함께 고려하면 그렇고 그런 말이 아니게 된다. 이 소설가로 말하자면 일본의 대문호이자 자국에서 최고로 사랑받는 문인이다. 비단 역사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일본에서도 수차례 읽히고 인정받는 작가라는 뜻이다. 걸출한 작가들이 여럿 있는 일본 문학계에서도 그의 위상이 드높다는 것은 어쨌거나 대단한 일이다. 근대 한국 소설에도 소세키의 영향이 닿았다고 평가받으니 말 다 했다.

무엇보다 그의 인기 비결은 쉽고 반듯한 문장과 더불어 그에 걸맞은 주제 의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세키의 글은 읽기 쉽다. 고전 소설을 처음 읽는 분들께 추천하는 작품 목록에 이 책이 자주 소개될 정도로 말이다. 그의 글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도 아마 문장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 일본 고유의 어휘 및 문화가 낯설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경우, 대게 쉽게 풀어쓴 번역서를 찾아 읽으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

또 그런 문장으로 쓴 소설은 여러모로 정직하다. 사람으로서 도리가 무엇인지, 윤리를 져버린 인간은 어찌 되는지를 묻는 소설이 많다고 하니까(나도 소세키의 소설을 두 권밖에 못 읽어봐서 잘 모른다. 이런 내용들은 나도 다른 책이나 웹서핑을 통해 찾아본 것이다). 말하자면 잘 정돈된 문장으로 그릇됨 없이 윤리적으로 살려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쓴다. 문장과 이야기가 그렇게 서로 호응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게 아닐까?

/

오랜만에 읽은 『마음』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생각보다 나는 소세키의 소설에 크게 감탄한 적이 없다. 그의 책을 이후로 한 권만 찾아 읽은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다. 소설 전면에 일본인으로서 의식을 대놓고 표명해서 그럴지도 모르고 유명 작가의 인기에 괜한 반발심이 생겨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마음』을 재독하면서 왜 내가 이 소설에 그리 썩 동감하고 싶지 않았는지 알 듯했다. 이 책은 회개와 참회를 주제로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혼자 속앓이하는 소극적인 지식인의 자화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과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보면 참말이다 - 그런 면에서 선생님이 나에게 항상 꺼내는 말, 자기는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못 된다는 말은 정말 진솔했다.

소설은 총 세 파트로 나뉜다. 하나는 선생님과 내가 만나게 된 사연과 교류, 둘은 내가 잠시 선생님 곁을 떠나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 마지막 셋은 내가 떠난 다음 선생님께서 부치신 편지글.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선생님의 편지글이 『마음』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겠다(심지어 분량도 가장 길다). 그 중요한 세 번째 파트에서 그전까지 비친 선생님의 기이한 행적, 알 수 없는 말들의 근본적인 이유를 모조리 밝혀진다. 따라서 처음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해당 파트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더욱 커지게 된다.

이 말은 돌려 말해 두 번째로 읽었을 때는 그만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마치 추리 소설의 범인을 안 채로 다시 읽을 때 재미가 반감되듯이. 그러나 내가 하고픈 말은 이런 게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선생님의 과거를 몰색하는 추리 소설도 아닐뿐더러, 재독할 시 그 카타르시스가 덜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던 1부, 2부의 숨은 뜻이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서사가 풍부해진 감도 없잖아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풍부해진 서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지에 달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우리가 확 감명받아도 두 번 들었을 때 똑같이 그러란 법은 없지 않는가.

세 파트로 나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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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들어가서, 선생님은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다. 그가 사람을 경멸하고 피한 이유도 스스로가 경말당하고 피해야 할 인간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사연인즉슨 어린 시절 선생님은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면서 삼촌께 의탁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선생님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삼촌께서 자신의 장래를 책임질 줄로만 알았다 - 평소 삼촌을 훌륭한 사람이라 칭한 아버지의 말씀, 그리고 사업과 정계 일을 동시에 해내는 삼촌의 수완을 마냥 믿은 것이다. 나중에 선생님은 삼촌이 아버지의 유산으로 사업 자금을 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의 배신감으로 선생님은 삼촌네 식구와 절연했다. 돈이 사람을 타락시킨다는 걸 여실히 깨달으면서. 그렇지만 출가를 할 때 삼촌에게 어느 정도 지원을 받아 - 아버지의 유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 학생 신분으로 부족하지 않은 돈이 선생님 수중에 떨어졌다. 선생님은 다니는 대학과 가까우면서도 괜찮은 형편의 하숙집을 찾다가 어느 미망인 모녀가 사는 집에 정착했다. 선생님은 그 집안 식구들과 차츰 친해지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특히 미망인의 딸에게.

미망인의 딸을 선생님이 남몰래 흠모했다는 걸 누구든 쉽게 눈치챌 수 있을 테다. 그렇지만 연애 쪽에 거의 무지했던, 지극히 소심했던 선생님이 상대방 여자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 그 무렵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K가 장래 문제로 부모님과 다투면서 생활고를 겪게 됐다(부모님이 K에게 보냈던 금전적 지원을 끊은 것이다). 그보다 훨씬 여유로웠던 선생님은 K를 자기 하숙집에 끌어들이려 했다.

이 일을 K도 미망인도 한사코 거절했지만, 선생님 딴에는 궁핍한 친구를 돕는 일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믿으며 강제로 추진하려 했다.

소설은 짤막한 장(章)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말하자면 선생님은 K의 수호천사 역을 자초한 거다. 그에 더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꺼림직한 반응을 보인 미망인을 두고 도덕적 잣대를 들먹이며 속으로 지탄했다 - 그 집 주인이 정작 하숙생 신세인 선생님이 아니라 미망인이었음에도.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처음에 입을 꾹 닫고만 지냈던 K도 미망인 식구와 친해졌고 그들도 K를 어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생님은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않으려 한 K의 폐쇄적인 성격이 그를 좀먹는다고 생각하곤 했다.

문제는 이제 선생님 쪽에서 발생했다. 어느 날 대학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미망인의 딸과 K가 한 방에서 나란히 떠드는 소리를 선생님이 들은 것이다. 선생님이 나타나자 여인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고 K는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때 선생님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K가 미망인의 딸을, 혹은 미망인의 딸이 K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게다가 K의 성격이 밝아진 이유가 자신 덕분이 아니라 미망인의 딸 덕분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선생님을 옭아맸다. 왜인지 모르지만, 선생님의 마음속에 K는 자기에게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생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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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 줄거리를 늘여 쓰면 이야기도 길어지고 정작 내가 하고픈 말도 못 할까 봐 이만 줄인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여기까지만 듣고도 뒷내용이 어찌 될지 짐작할 수 있을 테다. 더군다나 1부의 선생님이 보인 행적까지 종합하면 그들의 삼각관계가 비극으로 치달았다는 것도.

나 또한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은근히 강조했는데, 선생님은 남에게 호의를 자처하면서 진짜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생각지 못한 치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무조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고 본 도덕적 강박도 있었다(이는 어린 시절 작은 아버지께 배신당한 트라우마로 생긴 의식일지도 모른다).

이런 도덕적 강박이 생각대로 먹히지 않자 되려 선생님은 K에게 반발심을 가지고 말았다. 분명한 악의를 갖고서 해코지할 속셈까지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언제든 K를 져버릴 준비가 돼 있던 셈이다. 그 결정타가 향후 있을 K의 고백 사건이다. K가 미망인의 딸을 좋아한다고 밝혔을 때, 물론 선생님은 그를 축해해줄 입장이 못 됐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정당당히 그의 연적을 자처했어야 했는데. 선생님은 몰래 미망인을 찾아가 딸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버렸다. 여인을 K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온 행동이었지만, 그 일은 여러 모로 인간이 둘 수 있는 최악의 수였다.

내가 이번에 읽은 『마음』의 판본은 문학동네북클럽 한정 특별 보급판이다

그 사실을 알고도 K는 평소와 똑같이 선생님과 모녀를 대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선생님은 죄책감, 부끄러움, 죄를 들킬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불안에 시달렸다. 더 이상 선생님은 여인과 K를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K가 죽어버리다니. 그의 죽음이 고백 사건 이후로 벌어진 이상, 선생님 딴에는 - 다른 걸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 자신의 도덕성에 커다란 결점이 생긴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선생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토록 혐오했던 삼촌과 다름 없었다.

/

우정을 여러 이유에서 배반하는 일이 드물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비슷한 일이 내게도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한 번쯤은 있었기에 『마음』이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마음』 속 선생님의 죄책감에 자유롭지 못함을 느낀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의 반성에 전적으로 동의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라 하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편지글 속 의문스러운 두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내 가슴은 그 슬픔으로 인해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모릅니다. 고통과 공포로 옭매어 있던 내 마음에 물 한 방울의 윤기를 떨어뜨려준 건 그때의 슬픔이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마음』,

문학동네, p.267-268

이 고백은 K의 장례를 치르며 선생님이 느낀 심정을 풀어쓴 것이다. K의 자살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의 유족들에게 사실대로 고하지 못한 채 다시 죄책감에 시달린 선생님은 눈물을 흘림으로써 비로소 후련해질 수 있었다. 내가 이 눈물을 두고 싸구려라느니 가식적이라느니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감당 못할 큰 죄를 저질렀을 때 한낱 가치도 없을 법한 눈물이 커다란 위로로 다가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위로가 순간의 위로로만 그친다면?

그 뒤로 선생님은 피폐해져만 갔다. 아내와 장모님이 된 여인과 미망인은 당최 선생님이 무기력하게 지내기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럴수록 선생님은 그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그들을 이해시킬 수도 없다는 이 처지를 혼자서, 더 비참하게 여겼다. 세월이 흘러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나'가 등장하는 동안 내내.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한 참회인가? 내가 묻고 싶은 지점이 여기 있다.

/

나로 인한 한 사람의 죽음은 인생에 있어 씻을 수 없는 과오로 남는다. 따라서 반성과 참회의 과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나 노력은 그 누구도 정해 놓은 바 없다. 이것은 ① 온전히 참회하는 입장의 '나'와 ② 피해를 입은 '유족'의 심정에 달려 있다고 봐야 옳겠다.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 반성한다는 식으로 참회의 종결을 고하거나 반성할 기회를 어영부영 떠밀다가 죽음으로 도피하는 사람의 경우, 진정한 의미에서 참회했다고 볼 수 없다.

나는 죄지은 사람이 평생 참회만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참회가 꼭 피해자나 유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죄지은 당사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보는 편이다. 결국 소설의 말마따나 마음의 '까만 점'을 직시한 채 살아갈 줄 아는 마음이 참회 비슷하지 않겠는가.

사건을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래서 선생님은 참회를 했다고 볼 수 없겠다. 선생님은 죄를 인정하기가 두려워 세상과 둑을 쌓았고, 감히 아내에게 까만 점을 찍을 수 없어 진실을 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은 실상 K와 선생님 사이의 문제였지 아내와 큰 관련성은 없었다 - 그와 동시에 아내는 고백 사건에 휩쓸린 최대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선생님이 그 사건으로 아내가 비통해 할 것임을 가장한 자기 기만에 가깝다. 마치 선생님이 K의 유서에 별말이 없었음에도 그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넘겨짚은 것처럼.

소설에 실린 해설 글도 참고하기 좋다

마지막 선생님의 자살은 그래서 찝찝하다. 그 명분은 메이지 정신에 따른 순사였지만,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선생님이 다른 이유로 그 선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메이지 정신에 따른 것임을 강조한다. 어쩌면 아내에게 자신의 과거를 덮어 둘 요량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은 K를 잃은 죄책감으로 죽는다는 게 여전히 인정하기도 직시하기도 두려워서 메이지 정신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 자신을 비겁하다고, 부끄럽다고 여긴 선생님은 이후로도 세상을 외면한 채 비겁하게 살았고, 그것이 최선인 줄로만 알아 제대로 뉘우친 적도 없으며, 결국 그런 식으로 죄를 죽음과 함께 묻었다. 아내는 진실을 영영 알지 못해야 할까? 그것도 선생님이 스스로 생각한 도덕적 잣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순사의 근거를 메이지 정신에 두었다고 밝혔다. 이 말을 비틀어 보면 이처럼 소극적이고 우울한, 자해에 가까운 자기 반성형 인간은 메이지 이후로 종식됐다는 소리일 수도 있다. 선생님 이후의 다음 세대는 그릇된 과거를 바로잡고 반성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담겨 있는 그런 결말로 말이다. 그 반성하는 인간형을 나는 오에의 소설에서 확인했기도 했다. 세대는 그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고치고 발전해 나가는 듯하다.

진정한 반성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나 험난한 것 같다.

나를 만든 내 과거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의 일부이자 나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얘기라서, 과거를 거짓 없이 글로 남겨두려는 내 노력은, 인간을 아는 데 있어서 자네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헛수고는 아닐 것입니다.

나쓰메 소세키, 『마음』,

문학동네, p.282

#소설 #나쓰메소세키 #마음 #유은경_옮김

#문학동네 #일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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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5
D.H. 로렌스 지음, 김정매 옮김 / 민음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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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긴 소설이 주는 충만감이랄 게 있다. 이야기가 길면 길수록 그 안에 담긴 등장인물과 사건사고와 생각할 거리의 수가 늘어날 테고 시공간적으로 폭넓은 배경을 종횡무진하는 체험이 가능해지는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오는 보람도 무시할 수 없겠다. 로렌스의 『무지개』는 도합 900페이지 분량의 두툼한 2권짜리 소설이다. 소설은 브랑원 가의 톰과 이방인 렌스키의 만남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딸, 손녀로까지 발을 넓힌다. 그리하여 방대한 분량의 소설은 또 방대한 가문의 서사로 뻗친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도 보람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을 테다.

1.

브랑윈 가문은 본래 농장의 대지주다. 그들보다 훨씬 앞선 세대부터 농사일을 시작했기에 브랑원 가는 넓은 밭과 하늘, 그리고 교회 첨탑이 우뚝 솟은 시골 풍경에 아주 익숙하게 자랐다. 그런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노동, 활기, 번창, 상속이었다. 남자들은 몸통을 낮추고 땅이나 말의 등판에 딱 붙여 일했다. 여자들은 몸통을 들춰서 시골 바깥의 상류사회를 바라보고 동경했다. 때마침 영국 사회는 한창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 교육, 공장, 도시, 새로운 직업과 자아실현 문제가 새로 꿈틀대는 중이었다.

작가의 얼굴

그래도 브랑윈 식구들은 농사일에 전념했다. 오래된 습관이 바로 깨지는 법은 없고, 변화는 서서히 찾아들기 마련이다. 이때 어릴 적부터 시와 자연을 사랑했던 브랑윈의 막내아들 톰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여인은 폴란드 출신으로, 남편과 사별한 뒤 어린 딸을 데리고 이곳 시골에 찾아왔다고 한다. 톰은 갈수록 그녀를 향한 마음이 커져간다고 느꼈다. 두 사람은 결혼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 사이가 원활하지는 못했다. 톰의 아내가 된 리디아 렌스키에게는 과거가 있었다. 그녀의 전남편은 폴란드의 독립운동가였는데, 애국주의라는 강력한 신념 하에 항상 무언가를 하느라 바빴다. 그녀에게 전남편은 사실 없는 사람과 같았다. 전남편은 항상 정의를 운운하며 사회로 나가 싸웠지만 가정 일은 매번 뒷전에 뒀으니 말이다. 그래도 렌스키 남편의 비위에 맞춰 알아서 행동해야만 했다. 남편이 곧 정의였으므로. 그 일이 결국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더래도.

그러니 렌스키가 조용하고 수동적인 여인이라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가뜩이나 폴란드에서 꽤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이었던 그녀로서는 브랑윈 가문을 높게 칠 수 없었을 테다. 반면 톰은 그녀가 여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딴에는 아내란 남편에게 말도 건넬 줄 알고 살갑게 대해줘야 한다고 여긴 것 같다. 그 둘은 서로를 사랑하긴 하는데 어느 하나 내색하고 표현하는 일에 서툴렀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지레짐작하며, 상대방을 두려워하고, 속으로 울분을 터뜨렸다. 그들은 싸우고 사랑하기를 반복한다.

렌스키와 브랑원의 첨예한 대립

2.

이들을 지켜본 어린 딸 애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 애나는 어머니를 닮아 고고한 혈통을 알게 모르게 중시했고 새아버지를 닮아 풍요로운 재산을 누릴 줄 알았다. 이 같은 성장 배경으로 그녀는 완만하고 밝은 성격을 갖추되 종종 남에게 불만을 품으면 모멸차게 공격할 줄도 알았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신앙을 배울 때도 그녀의 마음에 피어난 생각은 다소 반항적이다. 그녀 딴에는 신앙심이란 마음속에 있는 동안은 격렬하게 감동적이지만 목사의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천박해진다고 봤다.

이 같은 생각은 나중에 남편 될 사람, 윌리엄을 만나면서 더 날 서게 된다. 두 사람은 사촌 관계로 교회에서 처음 만나게 됐다. 당시 애나는 윌을 어딘가 서툴고 모자란 녀석이라 보고 무시할 생각이었지만 찬송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역시 그는 어딘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그 일로 애나는 윌을 자꾸 떠올렸고, 그와 친해졌으며, 마침내 결혼했다.

이 첫 만남에 주목하자면, 윌리엄과 애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찬송가를 부를 때 그는 한껏 진지했을 것이다. 그런 진지한 태도, 어찌 보면 지나치게 과장된 경건함이 애나를 웃기게 하지 않았을까? 애나는 종교의 의미를 고찰하지도 않고 무작정 믿는 사람들을 깔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바로 그 중 하나였고. 결혼 후 윌리엄이 한창 아담과 하와 조각상을 만드는 일에만 열중하자 애나는 성경 속 내용을 두고 그와 언쟁하기도 한다.

"왜 목각을 계속하지 않아요? 아담과 하와 상을 왜 끝내지 않아요?"

이렇게 묻긴 했어도 아내는 아담과 하와 상에 관심이 없었고, 남편은 그 조각에도 또다시 손을 대지 않았다. 아내는 하와의 모습을 보고는 "꼭 작은 꼭두각시 같네요."라고 빈정댔다.

"왜 저렇게 몸집이 작지요? 아담은 하느님만큼이나 몸집이 큰데 하와는 꼭 인형같이 만들었군요.

아내는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가 남자 몸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모든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남자들이란 얼마나 무례하고 건방진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318-319

애나가 종교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애나는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없었고 상처 난 예수의 몸을 전시하는 피에타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것의 의미를 물어봐도 누군가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바로 옆의 남편 윌리엄 또한 그렇지 않은가.

"그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야."

남편은 격렬한 어투로 냉혹하게 맞섰다.

"당신은 알고 있는 것만 조롱하고 모르는 것은 못하지."

"제가 무얼 몰라요?"

"사물의 의미지."

"그럼, 그 의미가 뭐예요?"

그는 대답하기를 꺼렸다. 대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도대체 그 뜻이 뭐란 말이에요?"

아내가 다그쳤다.

"부활의 승리지."

아내는 주저하며 낭패감을 느꼈다. 공포가 엄습했다. 도대체 이런 것들이 다 무언가? 어떤 강력하고 어두운 존재가 그녀 앞에서 뻗어나가는 것 같았다. 결국 그건 놀라운 것인가?

그렇지만 그건 아니야, 그녀는 이를 부인했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295

"물이 포도주로 변했든 안 변했든 그건 나에게 별 상관없어. 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니까."

그가 말했다.

"그래, 있는 그대로가 뭐지요?"

아내는 기대에 차서 다그쳐 물었다.

"그건 성경 말씀 그대로지."

그런 식의 대답에 아내는 격분해서 남편을 멸시했다. 성경에 대해서는 나서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로 하여금 그를 멸시하게끔 만들었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315

성경을 존중하면서 그것을 무작정 수용하려 들지 않는 애나는 상당히 현대적인 인물이다. 이 말은 그녀가 세상의 이치,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살피고 탐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나의 자아실현 욕구는 아쉽지만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출산을 하면서 어머니로서 역할에 보다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남편에게 종속되려 하지 않은 애나였지만, 그녀 생활에서 어린 자식의 비중이 그녀 자신보다 훨씬 커져버린 셈이다.

비교적 구체적 내용을 담은 책의 차례들.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제6장 '승리자 애나'에서 따왔다

3.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다음 세대인 어슐라가 곱게 받아들일 리 없다. 어슐라는 애나와 윌리엄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이다. 그녀를 낳을 적에 부부는 당연히 기뻐하고 감사했으나 둘째와 셋째가 연달아 태어나면서 아무래도 어슐라를 소홀히 대하게 됐는데, 그 때문인지 천성적으로 모계로부터 이어받은 자아실현 욕구 때문인지, 그녀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관심을 쏟았다. 어떻게 하면 진정 어슐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세상은 무엇으로 이뤄지고 돌아가는지 등을.

어슐라도 어머니 애나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의미를 먼저 고찰했다. 그녀는 성경에 쓰인 모든 이야기가 우리 삶에 모두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나중 가서 사제 관계로 만난 잉거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 더 단단해졌다.

어슐라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종교가 결국은 인간의 열망에다가 특별한 옷을 입힌 것이란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열망은 진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입힌 옷은 거의 국가적인 취향이나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발가벗은 아폴론 신을 섬겼고 기독교인들은 흰옷 입은 그리스도를, 불교도들은 싯다르타 왕자를, 이집트 사람들은 오시리스 신을 섬겼다. 갖가지 종교는 지역적인 것이나 종교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는 지엽적인 분파였다. 아직은 지엽적인 여러 종교들이 하나의 종교로 동화되지는 않았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무지개 1』,

민음사, p.167

지적이고 자주적인 스승에게 한껏 경도된 어슐라는 몰래 잉거를 흠모했다. 단순히 그녀를 선생님으로서 동경하는 게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 로맨틱한 기류가 흐르는 순간도 찾아오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슐라는 그 뒤로도 수많은 사람과 만나 어울리게 됐다. 장차 사람과 사랑을 알아가며 어슐라는 자기도 남성의 세계, 소위 말해 직업 여성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됐다.

어슐라의 동성애 성향이 드러나는 구절

이 점이 이전 세대의 여성들과 달리 어슐라가 한 발짝 앞선 특징이기도 하다. 1대 렌스키와 2대 애나는 자아에 대한 고민을 끌어당기긴 하나 어디까지나 가정에서의 역할로 한정됐다. 아무래도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굳이 직업을 갖지 않고도 생계가 어렵지 않던 시절이라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슐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브랑윈 가에 머물며 편히 살 수 있음에도 어슐라는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경제력을 갖춰야지 독립적인 주체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직업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어슐라가 남성의 세계라 일컬은 직장은 예상대로 남성의 논리로 돌아갔기에 그녀로서는 오히려 제 자아를 직업의 틀 속에 욱여넣어야 했다. 어슐라가 첫 직장으로 삼은 초등학교에서 얼마나 부푼 꿈을 꿨던가. 그러나 교사 노릇이란 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고, 교장은 실적 없는 교사들을 내쫓는 궁리나 했으며, 동료 교사들은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그녀도 가르침을 받는 학생보다 그 학생이 제출한 숙제에 더 눈길을 돌렸다. 자아실현을 꿈꾸며 시작한 일이 그녀를 점차 잠식해 가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여러 동료 교사들은 그런 현실을 하등 문제 삼지 않았다. 대체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교육 체제와 관료제를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어슐라도 차마 이 현실을 고치려 들지 못하지만, 무언가 잘못됐음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는 어슐라와 다른 동료의 차이점이자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직업의 세계는 남성의 무대, 즉 이미 남자들에게 익숙한 세계였다. 그래서 기존의 불합리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일에 남자들은 길들여져 있었다. 처음 직장에 발을 디딘 어슐라에게 보이는 것들이 외려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관료제를 그대로 따르는 교사의 초상

그런 면에서 소설의 도입부는 남녀의 관점 차이를 더없이 적절하게 요약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내가 처음 『무지개』의 첫 장을 펼친 당시만 해도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소의 젖을 짜고, 말을 타고, 자연과 하나 됨을 느끼는 데 반해 여자들은 고개를 돌려 먼 세상을 바라봤다는 것이. 로렌스는 어쩌면 사회 진출을 막 시작한 여성들만이 바라볼 수 있는, 관성적이고 딱딱한 남성 세계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하는 일에 익숙해져 땅바닥에 고개를 박은 남성들과 달리 허리를 바로 세워 현실을 볼 줄 아는 여성상을 제시하려 한 것 아닐까?

5.

아무튼 이 야심차고 장대한 서사는 내가 쓴 글처럼 두부 자르듯 선명히 나뉘지 않는다. 어슐라 또한 여러 면에서 자기모순적인 인물이고 좌절과 실패를 반복하며 무너질 때도 있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을 것처럼 말하면서 사실 꽤 많은 영향을 받고, 자신의 실수에 관대하게 굴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침울해지는 대신 밝은 면을 바라보며 더 나은 장래를 꿈꿀 준비를 한다. 그녀가 어머니와 할머니보다 더 현대적인 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 있다.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찬 긍정. 그런 그녀에게 하늘은 무지개를 띄어준다.

무지개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뿐 아니라 너와 함께 지내며 숨 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계약의 표는 이것이다.

내가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가 될 것이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구약 성경 창세기 9장 12~15절

(『무지개 2』, p.127 참고)

종교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 듯한 이 작품은 또 한편으로 더없이 종교적이다. 그래서인지 어슐라를 비롯한 브랑원 가의 서사는 쾌활하고 복작하면서도 경건한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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