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유혹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3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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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딱 한 번 우리끼리 멀리 가서 좀 쉬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요?" 

(p.59)



  이 책을 덮은 시점이 3월 중순 즈음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의 제목이 말하듯 4월의 유혹에 이끌렸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한창 봄꽃이 만개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산들거리는, 사람들의 입가에도 웃음꽃이 피어나는 그 시기를 나도 좋아한다. 봄이라는 계절이 또 추위로 웅크렸던 몸뚱어리를 일으키고 두툼했던 겨울 옷에서 해방되기도 하니까. 한편으로 4월은 그 같은 이유에서 사람을 살짝 서글퍼지게 만든다. 세상은 이리도 활짝 폈는데 나는 어떠한가. 나도 봄 같은 시절을 즐겨야 할 텐데, 하고 괜히 새해 다짐을 돌이켜보는 시점이기도 해서 말이다. 이럴 때면 괜히 매너리즘에 빠져서 어쩐지 새 자극을 찾고파진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피어난 저 꽃들처럼.

  마침 『4월의 유혹』은 그런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기로 최고봉인 소재를 채택했다. 그것은 바로 여행이다. 이 책의 주인공 로티, 그러니까 윌킨스 부인은 본래 여행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었다.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세우고 친구들을 모으는 역할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 누구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 광고를 보기 전까지는.


  그 일은 2월 어느 오후 런던의 한 여성 클럽에서 시작됐다. 불편한 모임이었고 끔찍한 오후였다. 윌킨스 부인은 햄프스테드에서 쇼핑하러 왔다가 클럽에서 점심을 먹은 뒤 우연히 흡연실 테이블 위에 놓인 <타임스>를 보았고, 아무 생각 없이 '고민 상담 코너'를 훑어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 등나무와 햇살을 사랑하는 그대에게. 모든 것이 완비된 지중해 연안의 중세 이탈리아식 작은 성에서 4월 한 달을 보낼 기회를 드립니다. 숙련된 하인들도 있습니다. 사서함 1000, Z, <타임스>로 문의 바랍니다.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경우처럼 당시에는 이걸 마음에 품는지조차 몰랐다.

7-8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뭐든지 갑작스럽게 되는 건 없었다, 하다 못해 확고부동해 보이는 결심이래도. 별생각 없이 대충 흘겨본 광고 문구로부터 윌킨스 부인이 생애 첫 여행 계획을, 그것도 스스로 짤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 스스로도 결심이 서질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4월의 휴양지를 간절히 바랐음을 로티는 확신했다. 기왕이면 혼자서 가야지, 하지만 무섭지 않을까? 그때 그녀는 아버스넛 부인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사교 모임에서 한 차례 얼굴 정도 비춘 적 있는 사이였다. 그러므로 누군가 선뜻 나서서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할만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버스넛 부인이 그 <타임스> 광고를 보고 있다는 걸 윌킨스 부인이 알아채기 전까지는. 자세히는 못 봤지만, 로티는 아버스넛 부인 또한 <타임스>를 짚어든 이상 중세 이탈리아식 성 광고를 봤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은 함께 여행길에 오를 친구가 될 거였다. 왜 안 되겠는가?

  실제로 아버스넛 부인은 그 광고를 봤다. 그러고서 시선을 빠르게 다음 광고로 옮겼다. 그녀 또한 그 광고를 여타의 수많은 홍보물처럼 별 생각없이 넘겨 짚었으니까. 그런데 기억조차 희미한 여인이 불쑥 달려들어 그 광고를 읽었느냐 묻는 게 아닌가. 상대 여자는 말했다. 나와 당신은 지금 우울하다고. 그래서 그 광고를 못 본 체하듯 흘겨봤을 거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광고 속 중세 이탈리아식 성이 선명히 그려지고 거기에 금세 매료될 거라고. 처음에 아버스넛 부인은 상대 여자의 무례함과 감상적 호소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곧 윌킨스 부인의 말대로 여행 광고를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게다가 윌킨스 부인의 말은 어딘가 주술 같은 분위기가 풍기기도 했다.


  - "참 이상한 얘기지만, 우리 둘은 돌아오는 4월에 중세식 성에서 만날 거예요." 윌킨스 부인은 상대방의 얘기를 전혀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스넛 부인은 다시 불안해졌다. "그래요?" 환상을 보듯 반짝이는 회색 눈빛에 넘어가지 않으려 애쓰며 부인이 말했다. "그렇게 될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눈앞에 뭔가가 번쩍 보인 적 없어요?"

  "네, 없어요." 아버스넛 부인은 말했다.

(p.25)


  그렇다고 이들이 소위 말하는 일탈을 꿈꾼 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두 여자의 여행 동기를 들어다보면, 꼭 성급하게 급조되고 어딘지 불순한 기운마저 드나 싶겠지만 그건 오해다. 다시 말하지만 윌킨스 부인에게 이런 여행 결심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버스넛 부인 또한 자기 삶의 기준을 "나침반의 방위만큼 확고한 것은 네 가지였다. 신, 남편, 가정, 의무감.(23)"이라 밝힐 정도로 평소 원칙과 규율 하에 살아왔다. 그러다가 이들은 이번 여행 일을 심사숙고했고, 휴가가 진실로 필요하다고 결론지었을 뿐이다. 그녀들은 결혼 이후에 남편 곁을 한시라도 떠나본 적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여행지에서 남자들과 어울릴 요량도 아니었다 - 여자들끼리 놀러가니까. 게다가 그녀들을 재충전한 다음 가정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딱 한 달간, 그게 그렇게 잘못됐을까? 이번 여행은 갑작스럽다기보다 오랫동안 묵혀온 열망이 터져나왔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막상 실질적인 여행 준비를 하려 드니 경비 문제에 맞닥뜨리게 됐다. 이번 여행을 남편에게 비밀로 부친 참이기에, 그들은 가진 비상금만으로 그 중세 이탈리아식 성 월세를 충당할 수 없었다. 대신 두 여인은 이번 여행에 동참할 또 다른 여자들을 모집했다. 그렇게 모인 나머지 여자들은 레이디 캐럴라인과 노부인 피셔 씨다. 이들에게도 역시 사연이랄 게 있다. 레이디 캐럴라인은 유수 높은 집안의 아가씨로 남녀 구분 없이 감탄을 부르는 외모와 목소리를 갖췄다. 하지만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과도한 호의와 친절을 배풀었고, 캐럴라인은 그 모든 게 귀찮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방되기, 그것이 케럴라인의 여행 목적이다.


  피셔 부인도 그와 비슷한 목적을 가졌지만 동기는 다르다. 오랜 세월을 거쳐 덕망 높은 지인들을 두루 사귄 피셔 부인. 그러나 그녀의 친구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녀 눈에 요즘 젊은 애들은 대게 버릇없고 어리석게만 보였다. 시끄럽게 살아 있기만 한 치들로부터 벗어나서, 이제 한적한 휴양지에 가만히 앉아 추억 속 친구들을 회상하는 게 피셔 부인의 유일한 낙이었다. 이렇게 저마다 다른 이유로 - 아니, 이유뿐만 아니라 저마다 다른 나이, 성격, 성향, 인생관을 가진 이들이 과연 각자가 꿈꾼 휴식을 이룰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할 것같다. 실제로 그들은 여행 직전부터 서로를 오해하고, 속으로 멸시하고 질책도 하고, 참견도 하고 모욕도 하고 말 그대로 아웅다웅한다. 


  한편으로 이들이 분명 좋아질 거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들이 머무는 중세 이탈리아식 성이, 등나무와 햇살이 자리잡은 풍경이, 지중해를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곧 모든 문제를 눈녹듯 풀어줄 테니 말이다. 심지어 그들은 휴양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의 목표를 거진 이뤄버릴지도 모른다. 해묵은 남편과의 어색한 관계도 풀 수 있고, 누구의 부인이라 불리는 대신 제 이름을 상기할 수도 있고. 세대 간의 갈등이라든지 인간 관계의 복잡함이라든지 그게 뭐든 간에 말이다. 혹자는 소설 속 얽힌 모든 문제가 한순간 해결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지적할지 모르지만, 글쎄. 일단 해 봐야 안다. 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다. 아르님이 펼친 이 중세 이탈리아식 성에서의 하루가 복잡한 인간 관계를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보면 생각이 또 달라질 수도 있고. 나 또한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만난 것 같아 즐거웠다. 뭐랄까, 참 얼렁뚱땅하면서도 상쾌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였다. 그런 분위기가 곧 책에서 말한 4월의 유혹이지 않나 싶다. 나도 그런 4월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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