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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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설고도, 어쩌면 도발적이기까지 한 박솔뫼 작가의 단편 데뷔작이다. 나는 박솔뫼 작가를 장편 『미래 산책 연습』으로 처음 만났고, 제대로 완독하기론 단편집 『그럼 무얼 부르지』가 처음이었다. 이후 그녀의 또 다른 단편집 『우리의 사람들』을, 그리고 중간에 덮은 『미래 산책 연습』을 마저 다 읽으며 도합 세 권을 접해봤다. 찾아보니까 내가 후술한 두 소설은 비교적 근래작이었다. 이런 얘기를 내가 왜 하는 걸까. 그건 내가 초기작이라고 소개하기가 이질감이 들 정도로 『그럼 무얼 부르지』가 놀랍고도 실험적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이게 긍정적인 의미인지는 유보하겠다. 어쨌거나 놀랍고도 실험적인 소설. 이건 몸소 읽어봐야지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긴 말 하지 말고 한 번 읽어보자.


  - 해나를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인데 그사이 나는 일본의 교토로 여행을 갔다 온다.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그 사이 여행은 그것이 전부였고 또 다른 하나는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그곳에서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만난 것은 교토 시조 가와라마치 근처에 있던 바였다. 버클리 대학 근처 카페와 교토 시조역 근처 바, 둘 중 어느 곳이 더 의외이려나. 30여년 전에, 내가 태어난 도시에서 있던 일에 대해 불현듯 듣는 것으로 말이다. 역시나 바에서 만난 이 사람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커다란 덩치에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안경을 썼고 짙은 청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p.132-133


  주절주절 이어쓰는 이 말들은 이야기라기보다 차라리 푸념에 가깝게 들린다. 인용한 구절에서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지만, 글이 또한 상당히 말하듯이 읽힌다. 여러 문장이 구두점 없이 죽 늘어지거나 지금 내가 쓰는 문장처럼 종결어미를 '-다'로 끝맺지 않고. 그래서 나는 일전에 박솔뫼의 글을 일기 같다고 말했는데, 이 단어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가벼이 읽힌다는 뜻으로 와전되겠거니 싶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아마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테지만 여기 실린 글들은 일상적이지도, 썩 편안하게 읽히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둡고 비현실적인 일들이 펼쳐진다면 모를까. 그러니까 그녀의 글은 일과를 늘여놓는 일기의 성격과 거리가 멀다. 문체는 그래 보일지 몰라도 실제 내용은 딴판이다.


  여기 실린 단편 중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단연 『안 해』일 것이다. 처음에 이 단편을 읽어 보고 어찌나 깜짝 놀라고 당혹스러웠는지. 하지만 『안 해』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직전에 실린 단편 『차가운 혀』부터 먼저 봐야 할 것 같다. 이 단편도 썩 편하게 읽히진 않는다. 여기서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시작부터 관계의 삼각형 구도에 대해 설파한다. 나와 사과와 오렌지. 그렇게 세 가지 축이 생겨야지 관계는 유지되는데, 설령 내게서 사과가 떨어져 나가도 나와 오렌지가 남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게 요지다. 나는 어느 바에서 일하며 사과와 오렌지를 깎고 서빙을 하고 재떨이를 비우고 닭을 튀긴다. 그 무렵 나는 사귀는 누나와 동거하고 있는데, 그 누나는 직원도 아니면서 바에 놀러와 나와 같이 일했다. 사장은 그런 누나더러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장이 나와 누나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처음에 사장은 우리더러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묻다가, 나중 가서  오늘은 무얼 했느냐고 묻는 식으로 자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사장이 묻는 말에 대체로 답하질 못했고, 그런 껄끄러운 질문을 듣기 싫었다. 사장도 보기 싫었다. 나와 달리 누나는 사장의 질문에 곧잘 대답하며 대화다운 대화를 이어갈 줄 안다. 나는 사장과 말이 잘 통하는 누나를 보기가 힘들다. 시간이 지나 누나는 가게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술만 계속 마셨고 사장은 나를 잘랐다. 나는 우리의 아름다운 삼각형이 깨져버렸음을 깨닫고 방안에 홀로 지낸다. 그 뒤로 다시 시간이 지나, 누나는 내 집에 돌아오고 오랜만에 둘이서 사랑을 나눈다. 그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몇 가지 내용을 중간중간 생략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가 이러하다. 여기서 내가 느낀 소설의 인상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착 가라앉았구나 싶었다. 여기 단편 속 주인공은 특별한 욕구랄 게 없이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여러 차례 누나와 사랑을 나누기야 하지만, 그 같은 애정 행각은 욕구에 기반한다기보다 늘상 있는 일 정도로 처리된다. 결정적으로 바에서 잘려 누나와 멀어지게 된 뒤에도 나는 방안에 폐인처럼 틀어박혀 관계의 삼각형이나 운운하며 본드에 취한다. 혼자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관계를 회복시킬 의지나 노력 없이 체념하듯 구는 포즈. 이런 게 뭐 현대인의 우울한 자화상이란 건가. 이런 비슷한 정서가 다음 소설에서도 이어지겠거니 나는 넘겨 짚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단편이 『안 해』였다.


  이 소설도 한번 보자. 노래방에 찾아온 청소년 남녀가 노래를 부른다. 남자애는 물을 사러 나가고 여자애는 남아서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지나도 남자애가 돌아오지 않길래 여자애는 문쪽을 돌아본다. 그런데 문 밖에서 노래방 사장이 여자애를 쳐다보고 있다. 순간 오싹한 느낌에 사로잡힌 여자애는 다시 노래방 기계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노래방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방 안을 급습한다.

  노래방 사장에게 붙잡히자 겁에 질린 여자애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이 남자는 범죄자인가. 그런데 사장은 여자애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노래를 이어 부르라고 시킨다. 벌벌 떠는 여자애가 옴짝달싹 못하자 사장은 그애를 세게 친다. 그제서야 여자애는 정신을 차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장은 만족하지 못한 듯 노래를 더 시킨다.

  무슨 이런 엽기적인 사건이 있나. 솔직히 말해 이 단편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 두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도심의 노래방에서 벌어지는 납치극이라니. 아니, 남자애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므로 정황상 폭행 내지 살인극까지 추가해야 하나. 너무 섬뜩한 이 이야기는 그러나 의외의 순간 전환점을 맞이한다. 사장이 여자애, 그리고 이미 갇혀 있던 또 한 명의 여자애까지 불러다가 노래를 부르도록 시키니 말이다. 유혈이 낭자할 법한 극도로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대뜸 노래라니? 노래방 사장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이들을 가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노래를 열심히 안 불렀기 때문이란다.


  - 남자는 30분 후 노래를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 전까지는 내 이야기를 들어.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30분간 내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에 대해 생각해. 열심히.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열심히. 열심히에 도달하면 이제 너희의 소리와 너희의 노래가 완성되고 완성이 되면 너희는 이제. 이제 노래가 되어 세상으로 날아가는 거다, 그게 노래다.

p.46-47


  노래. 노래가 뭐라고. 그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며칠째 가둔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면 이제 두 여학생이 노래를 열심히 부르게 될지도 궁금해진다. 그래야지 이들이 노래방 사장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그가 말한 '열심히'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거다. 통상적으로 노래를 열심히 부른다는 게 뭔가? 음계를 기계처럼 딱딱 맞추는 건가 음정이 조금 틀려도 감정을 담아 부르는 건가.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간절히 붙잡아야 하나. 땀이 날 정도로 몸을 흔들면서 부르거나 발음을 또박또박 정직하게 부르는 건가. 남자가 추구하는 열심히란 정확히 무엇인가.

  이에 응하여 먼저 갇혀 있던 여자애는 '열심히'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 남자는 열심히에 대해 말하지? 하지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있다면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지? 하는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지? 하는 피곤한 자학 이 둘뿐이었다. 뭐 열심히 해서 뭔가 될 수도 있고 그런 게 필요하긴 하지. 나는 게임은 꽤 잘하는데 그건 열심해 해서 잘하게 된 것도 있으니까. 연습이라든가 능숙해지기 위한 시간 같은 게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건 내가 게임을 잘할 만한 필요조건을 충족했기 때문 아닌가. 그 필요조건이라는 건 냉정하게 생각하고 고집 피우지 않는 거 고집부려야 할 순간도 있겠지만 매일 주장할 수는 없는 거라는 거지 그 외에도 많지만 그 필요조건이 뭔지를 일일이 이야기하는 건 복잡하니까 놔두고 여하튼 그렇다.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데 필요한 건 열심히가 아니라고 그게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아니라니까 열심히가 아냐 무작정이 아니란 말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항목이 당사자와 함께 달려 나가는 거에 가깝다니까.

p.52-53


  이에 한술 더 떠서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하고 지적하는 구절은 정말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내가 오해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직전 단편에서 넘겨짚은 현대인의 무기력함과 우울함은, "(열심히의 세계) 그게 튼튼해?"라는 한 마디로 박살났다. 오히려 이것이 무기력함이고 우울함이라면 그 반대편이 무엇이 있는지 한 번 내놓아 보라는 식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후로 등장하는 단편들을 오해나 편견 없이 순순히 읽기로 했다. 이후에 읽은 단편들도 꽤 모호하다. 어딘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오르는 단편 「해만」은 해만이라는 외딴 섬에서 숙박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이어지는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은, 세상에, 「안 해」의 배경이었던 노래방이 재등장하는데 두 단편의 명확한 접점은 그뿐이다. 표제작 「그럼 무얼 부르지」는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해만의 지도」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앞에서 본 단편 속 해만의 지도를 그려보는 이야기다(이 또한 「해만」과 세계관을 공유할 뿐 이야기 상 명확한 접점은 없다). 「안나의 테이블」은 조카에게 들려줄 수수께끼의 내용으로 상당히 어지럽다. 여기서 줄거리를 소상히 밝히는 건 딱히 의미가 없다. 큰 틀에서 보면 두세 줄로 요약 가능할지 몰라도 자세히 보면 도무지 설명할 방도가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라.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박솔뫼 씨가 참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운 글들을 썼구나 싶다. 하나의 프리즘을 거친 빛이 여러 갈래로 굴절되듯이, 그녀가 쓴 이야기들도 독자를 거쳐 여러 차례 해석되고 감상될지 모르겠다. 소설이 끝난 다음에는 문학평론가 손정수 씨가 길고도 상세하게 작품 해설을 써뒀는데, 그 글은 적당한 만큼만 읽고 덜어냈다. 아무래도 박솔뫼 씨의 여러 글들을 종합하여 이런저런 해석을 시도한 내용인지라 내가 읽기엔 맞지 않더라. 이번 기회에 나는 『그럼 무얼 부르지』를 두 번째로 읽는데, 향후 재독할지는 두고 봐야겠다. 그보다는 『을』이나 『백행을 쓰고 싶다』 같은 장편 소설도 궁금하다. 그럼 무얼 먼저 읽지. 이제부터 그게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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