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이야기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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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소개하기에 앞서 지극히 내 취향에 관한 이야기로 운을 떼볼까 한다. 내가 매료되는 소설들에는 비슷비슷한 특징이랄 게 있다. 그중 하나가 어떤 장소를 제시한 다음, 그곳을 응시하거나 머무는 감각을 전달할 줄 아는 거다. 이유야 나도 깊이 생각해본 적 없고 막연히 좋은 채로 놔둬도 괜찮다는 생각. 이런 말도 있지 않는가. 좋아하는 것은 그냥 좋은 것이지 그걸 설명하려 들면 피곤해진다고. 최근에 임경선 작가가 신작을 냈다. 어김없이 사랑 이야기를 담은, 짧은 토막글 구성의 연작 소설 같더라. 서점에서 일부분만 훑어봤기에 자세하게 말할 순 없지만, 나름 그녀의 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래서 싫다는 소리는 아니다. 때때로 쏟아지는 새로움보다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익숙함이 주는 확신이 더 큰 행복을 준다. 익숙한 행복감을 주는 이의 작품 또한 내가 매료되는 특징 중 하나다.

  취향 얘기를 하다가 신간 얘기로 빠지면서 글이 좀 셌다. 어쨌든 임경선 작가가 신작을 냈지만 오늘 내가 소개할 책은 그게 아니라 출간된지 일년 조금 지난 단편집 『호텔 이야기』다. 영어로 쓰인 부제는 HOTEL GRAF - AND FIVE SHORT STORIES. 말하자면 호텔 그라프에 관한 다섯 가지 짧은 이야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신작도 좋지만 일단 집에 들인 책들부터 하나씩 읽는 게 상책일 거 같아서 이 책부터 펼쳐들게 됐다. 그나저나 시작부터 궁금했다. 내 관심은 일단 호텔이라는 공간에 꽂혀 있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런 서문이 등장한다.


  - 서울 남산 둘레길에 위치한 그라프 호텔은 1989년 고미술상 이유한 씨에 의해 세워진 호텔이다. 5성급 클래식 호텔로서 한때 눈부신 영광을 누리던 이 호텔은 2022년 12월 31일부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라프 호텔이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반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이다.


  아직 호텔에 체크-인하기 전, 그러니까 소설이 펼쳐지기 전에 쓰인 이 구절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창을 확인해 봤는데 얼핏 보아 누구 하나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내가 스포일러를 파하려고 대충 읽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라프 호텔이라는 이름은, 소설에서도 말하다시피 "지은 지 30년쯤 넘은 호텔들은 대개 이름에 '로얄', '그랜드', '센트럴', '임페리얼' 같은 영어 단어가 들어갔으니 독일어인 그라프(GRAF) 호텔의 이름은 당시로선 상당히 독특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여전히 국내에서 썩 흔한 이름 같지는 않다 - 독일어로 'Graf'의 뜻은 (남성형 명사) 백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검색을 해도 어느 예식장 정보가 뜨거나 이 소설의 독후감 정도가 뜨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생각만큼 길게 늘여잡지 않아도 됐다. 소설을 읽다 보니 역시 정면에 내세운 서문도 허구의 일부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편 「호텔에서 한 달 살기」는 동료 감독이 쓴 각본을 각색하고자 이곳 그라프 호텔에 머물게 된 영화 감독 두리의 이야기다. 여기서 감독이 홀로 작업을 하는 도중에 지금은 유명해진, 그러나 무명 시절에 두리의 영화로 제 얼굴을 세상에 알린 수호가 뜬금없이 연락해 왔다. 호텔 방을 찾아온 수호는 두리와 같이 작업했던 시간을 즐겁게 회상하며 귀여운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린다. 음, 그쪽 업계를 잘 알지는 못 하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순 있다더라도 이런 식은 아닐 거 같았다.

  그래서 이상의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허구로 받아들였다. 「프랑스 소설처럼」은 다소 관계가 식어가는 듯한 두 남녀가 오전마다 그라프 호텔에 머물며 사랑 혹은 이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이야기다. 「하우스키핑」은 호텔 메이드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정현이 다가올 그라프 호텔의 폐점을 안타까워하며 지난 날을 회고하는 이야기, 「야간 근무」는 어떤 작가가 우연히 그라프 호텔에서 도어맨 일을 하는 지인을 마주친 다음 그의 짧고도 긴 사랑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이야기다. 마지막에 실린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유명인을 상대하는 개그맨 일행 중 한 명이 그라프 호텔에서 만난 수상한 신사와 친해지는 이야기다.

  내가 기대한 호텔에서 보낸 한 철, 공간이 주는 유유자적한 삶, 곧 시간의 더께에 묻힐 낡은 호텔을 향한 연민의 정서는 특별히 도드라지지 않았다. 대신 같은 공간을 매개하여 각기 다른 직업군의, 나이의, 성별의 사람들을 조명하는 이야기들에 더 가깝달까. 한 공간에 모인 만큼 여러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 살짝씩 포개졌으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건 그거대로 아쉬운 채 남겨 두고. 또 저자가 직접 하루키스트임을 자처했듯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러 장면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느낌도 살짜쿵 든다. 요컨대 이른 시간에 요리하는 파스타라든지, 남녀 사이 정사 씬이라든지, 외래어 표현이 빈번히 사용된다든지 같은 것들.

  아무튼 이 모든 이야기가 소설임은 틀림없다. 아무리 "이것은 그라프 호텔이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반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이다"라고 서문에서 밝혔다 해도. 게다가 작가의 말에서도 진실은 밝혀지는 걸.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진위여부를 따지는 것을 하등 중요치 않지만, 내가 이 문제를 길게 늘여잡고 있는 이유는 저자 분이 소설가이기 이전에 에시이스트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에세이라는 게 뭘까? 순간의 감상들을 포착해서 글로 옮기는 것. 사실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글로 풀어 쓴 것. 그런데 이런 식이면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에세이에도 서사가 있고 고찰이 있고 기교가 있다. 작문의 경계가 바스라지는 오늘날에 에세이스트라는 정체성으로 소설 쓰는 작가의 색다른 개성을 느끼고 싶다면 이런 책도 나쁘지 않다. 아, 나는 그래도 임경선 작가를 소설로 처음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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