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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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예고한 대로 박솔뫼의 초기 장편을 찾아볼까 했다. 그런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 읽지 못한 박솔뫼의 책이 한 권 더 있더라. 마침 그 책은 내가 직전에 읽은 단편이 발표된 직후 나온 장편이기도 해서 어떤 연결 고리랄 게 생겼달까. 여기까지가 내가 『도시의 시간』을 펼치게 된 사연이다. 이런 연결된 느낌은 독서를 즐기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데, 지금 내가 이런 얘기를 떠드는 이유도 박솔뫼의 소설을 즐기는 방식에 있어 이 '연결감'이 중요해 보여서다. 그러니까 박솔뫼 식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물과 공간, 공간과 사건, 사건과 인물을 연결 짓는 "아름다운 삼각형"을 그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는 뜻이다. 내 말이 소설의 각 요소들을 떼어다가 유형화하고 공식화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낼 의도는 아니다. 여기서 삼각형 구도는 수학적 도식이라기보다 작품 해설을 쓴 서평가 금정연 씨의 말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찍히는 점들을 이은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내가 추정상의 의미로 '(알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밝힌 것이다.

  요사스럽게 뒤로 빼는 문장들이 두루 보이는 바, 이번 글에서 내가 뭔가 제대로 된 얘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미리 말하건대 참 감상평을 남기기 뭣한 소설을 읽었다. 박솔뫼의 소설을 몇 차례 접한 경험이 있어서 망정이지 생판 모르고 이 책부터 펼쳐 들었다면 당최 작가가 무얼 말하려는 걸까 난감했을 거다 - 아, 또 뒤로 빼는 소리지만, 이제는 박솔뫼의 소설을 잘 알겠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단편집에서 내가 '가히 충격적'이라고 밝힌 「안 해」를 잠시 상기해 볼까? 이 단편은 도심의 노래방에 들린 여학생이 노래방 사장에게 무력으로 제압 및 감금당한다는 다소 충격적인 전개가 펼쳐진다. 여기서 노래방 사장은 여학생에게 다른 건 하나도 안 시키고 노래, 오로지 노래를 부르도록 시킨다.

  왜? 노래방 사장의 말에 따르면, 여학생이 노래를 열심히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열심히. 이어지는 내용에서 소설은 '열심히'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누구도, 심지어 노래방 사장도 규명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장편 소설에서도 비슷한 논제가 펼쳐지고 있다. 소설의 도입부터 나는 이런 문장을 만났다.​​


  - 넌 참 못한다, 못해. 그게 처음 들은 말이었다. 그때 우나는 마늘을 까고 있었고 나와 배정은 맞은편에 앉아서 시트콤을 보고 있었다. 우나는 화장실에 가려다 미끄러져 마늘 껍질을 담아 놓은 통을 엎질렀다. 정신 없이 마늘 껍질을 주워 담으려다가 이미 깐 마늘들을 엎었다. 우나는 양손에 마늘 껍질을 쥔 채로 멍하게 까진 마늘들이 상 위를 구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우나의 엄마가 그랬다. 넌 참 못한다, 못해. 우나의 엄나는 싱크대에서 불고기 간을 보고 있다가 뒤돌아서서 그 말을 내뱉었다.​​

p.7-8


  열심히, 에 이어 못한다구나그래. 이 둘의 관계는 어느 정도 상호적인 면이 있다.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고 열심히 안 하면 못하게 된다는 식으로. 물론 이 말은 우나의 엄마 생각이고 실제로 우나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두고 봐야 한다. 요컨대 우나의 집에 놀러 온, 우나의 친구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정말로 우나는 잘하는 게 없었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참 못한다 못해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나는 우나가 좋았다. 우나를 사랑했다. 지금도 우나를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나를 생각하다 보면 우나가 뭘 잘했는지 기억이 난다. 우나는 기다리는 것을 잘했다. 가만히 있는 것을 잘했다. 정말 잘했다. 그때 나는 혼자 오래 걷는 것을 잘했는데 혼자 오래 걷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잘하는 우나와 어울리는 특기였다. 모두 미련하고 목가적이고 종교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쓸모가 없네, 그런 생각이 든다.​​

p.8


  우나도 잘하는 게 있지만 태반은 못한다. 그나마 잘하는 것조차 미련하고 목가적이고, 뭐랄까 쓸모가 없다. 이런 현대인(특히 10대 청소년)의 우울한 자화상은 이미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단편 「안 해」의 주인공이 잘하거나 못하거나 상관없이 '열심히'를 부정하며 "저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고 왜냐면 열심히의 세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단정적이게 말하는 데 반해 여기 세 친구 - 나, 우나, 배정은 좀 다르다. 이들은 그보다 할 일을 하되 잘 하는 일에 더 집중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전 소설보다 한층 밝고 긍정적인 인간형이라 봐도 좋지 않을 성싶다.


  - 우나는 설거지도 서툴렀고 방 청소라고 나을 게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잘하니 나머지 시간에는 잘하는 걸 했다. 나는 한없이 산만했고 학원 수업에는 집중을 하지 못했지만 걷는 것을 잘하니 걷고 또 걸었다. 우리는 해야 하니까 못하는 걸 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잘하는 것을 했다.​​

p.9


  그렇다면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해도 될까.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게 됐다고 말이다. 이 삼각형은 양 끝으로 '나'-'잘하는 것'-'못하는 것(그러나 해야 하는)'을 배치시키며 완성된다. 다시 지난 소설집 얘기로 돌아가서, 단편 「차가운 혀」 속 주인공의 생활은 두 가지 축을 두며 이뤄짐을 확인했다. "나와 사과와 오렌지는 삼각형을 이룬다. 사람들에게는 기둥이 필요한데 내게는 그것이 사과와 오렌지인 것이다. (중략) 이것이 없다면 저것을 가져와야 했다. 하나의 세계가 흔들리면 그 흔들리는 세계와 상관없이 자신을 지켜줄 또 다른 세계가 있어야 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 같은 삼각형 대열은 박솔뫼 식 세계의 존재 방식에서 중요해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또 다른 삼각형을 알고 있지 않는가? 묘하게도 소설 속 등장인물도 알맞게 세 명이다.​​


/


  또 알아둘 필요가 있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미국의 포크 가수 제니 준 스미스. 그녀는 "1976년 '돌핀(dolphin)'이라는 제목의 음반을 발표, 몇 차례의 공연을 가졌다. 이후 아무런 음악을 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그의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소설의 처음부터 언급되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 가수는 우나에게 특별한 존재다. 그녀의 아버지가 우나에게 남긴 거의 유일한 추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송주영, 그러니까 우나의 아버지는 레코드 마니아로 각종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어릴 적 우나가 아빠와 함께 들었던 음반 중 하나가 예의 그 '돌핀'이었는데, 그 뒤로 송주영은 길거리에서 객사했고 제니 준 스미스는 음악사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우나가 계속해서, 여전히 그녀의 음악을 듣고 그 뒤를 캐내는 일은 기억 속 아버지를 새로 복원시키는 과정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또 다른 삼각형이 추가된다. 우나-송주영-제니 준 스미스.

  이 삼각형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게, 물론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 이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나 두 축인 '송주영-제니 준 스미스'가 상상 속 인물에 가까워서도 그렇다(이 말의 의미는 나중 가서 차차 살펴보도록 하자).

  물론 송주영과 제니 준 스미스가 허깨비 같은 존재라는 게 아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당장은 부재할지언정 한때 존재했거나 지금 잊힌 채로 존재하고 그 존재감이 우나(그리고 나)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다. "우나는 기다리는 것을 잘했다. (중략) 그때 나는 혼자 오래 걷는 것을 잘했는데 혼자 오래 걷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잘하는 우나와 어울리는 특기였다." 그렇게 우나와 내가 도시를 걸으면서 기다리는 동안, 둘이서 생각하고 대화를 나눈 주제는 제니 준 스미스였다. 언젠가 준을 만나러 미국에 가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해야 하니까 못하는 걸 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잘하는 것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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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치게 우나와 나의 관계만 부각한 것 같다. 그렇지만 배정도 분명 삼각형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는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로서, 대학 시험을 세 번 떨어지고 입시 학원에 다니고 있다(나와 우나와 배정은 같은 입시 학원을 다니며 서로 친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배정이 시무룩하거나 조급해 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열중하는 것도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배정은 밝다. 배정은 내게 매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사주기도 하고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한다. 말주변이 좋은 배정은 우나의 엄마하고도 곧잘 대화를 나눈다.


  - "야, 너는 이름이 뭐니?"

  "배정인데요."

  "배정이?"

  "아니요. 배정이요."

  "배정희?"

  "아니요. 성이 배고요 이름이 정인데요. 정이요. 정."

  "오, 정이야? 이름이 외자야?"

  "네."

  "그럼, 배 군이니 정 군이니?"

  "배 군으로 부르고 싶을 때는 배 군으로 불러 주시고요."

  "정 군으로 부르고 싶을 때는 정 군으로 불러도 되니?"​​

p.9-10



  그런 배정에게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다. 싫어하는 것은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온 환타("악, 환타! 나 환타 제일 싫은데! 배정은 자판기를 주먹 꽉 쥐고 쳤다. 발로 차면서 막 쳤다."), 말이 없는 우미, 갑자기 사라진 우미.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 그는 우나의 여동생 우미를 좋아했다. 나는 배정을 좋아하지만 그가 누굴 좋아해도 상관없는 양 굴었다. 이렇게 삼각형 구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우나는 실제하지만 상상 속 존재에 가까운 준을 쫓고, 배정은 실제하면서 당장 곁에 있는 우미를 쫓았다.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있고. 여기서부터 우리의 "아름다운 삼각형"이 조금씩 엇나간 게 아닐까.

  서로 쫓는 바가 다르니 우미와 배정은 점차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각형의 또 다른 한 축인 나도 점점 우나 쪽으로 쏠리게 된다. 나 또한 우미를 따라다니며 제니 준 스미스의 행방을 찾아다녔으니까 - 내가 앞서 상상 속 인물에 강조를 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우미의 삼각형 안에는 준 말고도 아버지 송주영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우미가 설정한 삼각형에서 배제된 제3자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제3자인 배정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배정은 간간이 등장할 뿐 우미와 나 사이에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


  기울어진 삼각형 구도는 종국에 해체되고 말 테다. 그런데 세 개의 축 중에서 먼저 이탈하는 존재는 우나였던 게 (독자인) 나로서는 의외였다. 외따로 떨어져 있던 배정이 아니라 나와 도시를 함께 걷던 친구 우나가 말이다. 우나는 말했다시피 송주영과 제니 준 스미스를 상상했는데, 이를 반복하자 우연찮게 우나의 엄마도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결정해 버렸다. 이걸 우연이라 해야 할지 운명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우나의 미국행 소식을 축하했지만 우나는 떨떠름해했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워했다. 상상 속 존재인 준이 현실로 튀어나오려 하자 우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 "그렇게 되는 거면, 이제 너는 만나게 되는 거잖아. 무서워도 그렇게 되면 결국엔 좋을 거야. 아냐?"

  "아닌 거 같아."

  "왜?"

  "만나길 바란 적은 없거든."​​

p.132


  - 그런 가정을 수십 번 했어. 그러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뉴욕에 가게 된 거 아닐까. 정말 가게 된다면 내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가게 된 거니까, 내가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는데 그렇게 되어 버린 거니까 나는 그게 무섭다. 내가 계속 뭔가를 해 버릴까 봐. 그래서 아주 기쁘지는 않다. 오히려 슬픈 거 같아.​​

p.131-132



  이 뒤로 소설은 더 미묘해진다. 어떻게? 그것까지 내가 이 글에서 밝히지는 않겠다. 살짝 귀띔하자면 나 또한 우나 못지않게 어떤 상상을 했고, 그 상상이 다시 한번 현실로 펼쳐지며 삼각형도 소설도 끝을 맞는다고만 말하겠다. 그런데 이대로 끝내도 괜찮은가? 지금까지 내가 강조해서 소개한 내용들은, 인용문들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소설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벌어진 일만 조명한 거다. 나는 『도시의 시간』에서 박솔뫼 씨가 쓴 일부분만 포착했을 뿐 그 밖의 이야기, 가령 소설 속 배경이 되는 대구라는 도시에 관해, 배정과 우미의 관계에 관해, 아이러니에 관해 말하지 못했다. 내가 해독할 수 있는 것을 해독했고 그것으로 충분할 리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 명쾌하지 못한 감상평을 어쩌면 좋나 싶지만 여기서 나는 말을 줄일까 한다. 대신......

  잘 알고 있는 것 말고는 잘 모르는 만큼, 앞으로 - 당장은 아니더라도 - 박솔뫼 씨의 글을 다시 읽고 곰곰이 생각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나와 박솔뫼와 소설. 이렇게 셋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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