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외국에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번역가나 에이젼시와 함께 어떤 작업을 했는지,  최근작 <직업가로서의 소설가>의  한 챕터에서 쓴 바 있다. 하루키의 작품상 성격이 그다지 안달복달하지 않을 것 같은, 욕심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글 읽으면서 하루키도 야망이 그것도 세계 정복의 야망같은 것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뭐 자신의 작품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으니 저런 야망도 생기는 거 지, 싶다.  실제 그의 작품 영역 작업은 일본내한  미국유학생에 의해, 하루키의 일본작품을 읽고 좋아 자신이 영어로 번역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와 하루키의 첫 영역 작품이 만들어졌고, 후에 하버드 교수 제이 루빈와 함께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게 되면서 그의 작품이 미국내 혹은 영어권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었는데, 우리로서의 하루키 작품이 어느 정도의 인기를 끌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한 지인의 말에 의하면 외국에서 하루키 작품은 오프 서점의 중앙에 위치할 정도로 외국에서 그의 작품 인기는 여느 베스트셀러 작가 못지 않을 정도라 한다. 심지어 이런 저런 외국책 읽을 때마다 하루키의 작품이 언급될 때가 있는 거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다. 

 

하루키의 해외진출 과정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좀 놀라운 것은 일본문학의 번역서가 생각보다 많고, 감성이나 시스템면에서 서로 다를 것 같은데, 의외로 외국 리뷰어나 저자들에게 언급되는 작가가 하루키 말고 오가와 요코여서 두 번 놀랜다.

 

오가와 요코는 나도 좋아하는 작가라 한국에 발간된 그녀의 작품을 다 읽었는데, 그녀의 작품중 약지의 표본인가의 번역가 후기에 오가와 요코가 프랑스에서 인기가 많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미국내 독자나 작가 또는 유명한 응용수학자가 그녀의 작품을 언급할만큼 그녀의 작품이 해외에서 인정 받고 있는 모양이다.

 

특히나 x의 즐거움을 쓴 스트븐 스트로가츠는 미국에서 유명한 응용수학자(옥스포드 수학과  김민형교수가 머릿말 소개글에 의하면 스트로가츠 교수는 응용수학의 대가라고 할 정도로)인데, 자신의 뉴욕타임즈 칼럼을 모아 책으로 출판한 바로 저 x의 즐거움에서,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아예 한 챕터 수학의 예를 들어가며 할애한다. 뉴욕타임즈에 거기다 유명한 응용수학자가 그녀의 작품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라. 나도 저 책의 저 챕터 읽으면서 놀래고 또 놀랬다. 일본 문학의 위상이 이 정도였어!!!!! 이러면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우리 문학의 번역 문제가 아닐까 싶다. 박상익이 자신의 저서 번역은 반역인가에서 문제 제기했듯이 우리의 번역 시스템이 조악해서 학위에서조차 번역논문은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외국학생이 우리의 작품을 번역해서 학위 인정을 받을 경우 우리의 작품이 세계에 조금이나마 널리 알릴 수 있는데, 그걸 막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학생이 외국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영어같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조차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한다. 외국의 경우, 이 두가지 경우가 다 인정되서 생각보다 번역서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번역서가 다양하다는 건 그만큼 지식 콘텐츠 양이 많이 지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문학이 미국내 다양하게 소개되는 것이 재미도 재미지만, 이런 이유도 한 몫 하는 건 아닐까. 한 작품을 번역하는 건 그 나라의 전방위적 시스템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기에, 우리도 번역 문학도 학위로 인정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저 x의 즐거움을 읽고 오가와 요코의 작품을 아마존에서 검색한 적이 있는데, 언제가 아마존에서 이런 멜이 온 적이 있었다.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 이나 가와카미 히로미의 선생님의 가방이 영역으로 번역되어 있으니 나보고 사라고 말이다. 일본의 만화만 인기가 있는 줄 알았더니, 소설도 그 못지 않게 서구 독서인들에겐 인기가 있구나 싶다. 재미가 없다면 저렇게 번역서가 있을리가 없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번역을 장려한 것인지 아니면 하루키처럼 유학생이나 에이젼시에 의한 번역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우리도 한강의 채식주의자 번역서로 그칠 게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채널을 통한 번역 지원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정부에서는 번역지원금도 깍을려고 한다는데, 그 많은 세금 걷어다 어디에서 쓰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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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6-07-13 18:45   좋아요 0 | URL
제대로 된 번역을 하는 것에 가치를 주는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양적으로도 압도할만큼 많이. 교수들이 번역하는 것을 직접 책쓰는 것만큼 점수를 준다면 훨씬 좋아질 것도 같은데. 근데 번역지원금을 깎다니! 아 정말.... 돈을 어디다 쌓아두고 있나요...

기억의집 2016-07-13 18:55   좋아요 0 | URL
저도 번역서의 접근을 다양하게 바꿔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야 콘텐츠의 층이 두꺼워지니깐요. 저는 울 아들이 이제 고 이라 대학 준비하는데, 대학 가봐도 별 것 없는데 싶어 닥달하지 않아요. 교수한테 배울 게 없어 자퇴하겠다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더라구요. 교수마저 본인들이 지식의 콘텐츠를 못 갖추고 있는데,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죠, 교수가 능력이 안 되면 저런 학위라도 인정해주면 학교 다니는 의미라도 있을 것 같아요.

번역진흥원이 번역지원금 깍는다는 말을 지난 번 프랑스 도서페스티벌인가 거기 가신 분이 페북에 올리셨더라구요. 그 많은 세금이 강바닥에 조선소에 들어가나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9 09:52   좋아요 0 | URL
글쎄말입니다. 정확한 지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채식주의자 때 보인 지식인, 특히 문학판에서 노는 지식인의 태도를 보면 경악을..
외국인이 한국 소설을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완벽하다는 논리 앞에서
속으로 미친새끼들이란 생각을했습니다.
그게 어떻게 대안입니까.
한국인이 한국 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할 때 오는 오류와
외국인이 한국 소설을 자국어로 번역할 때 오는 오류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둘 다 장점이 있고 둘 다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걸 쌩으로 무시하더군요..

기억의집 2016-07-19 19:26   좋아요 0 | URL
일단 번역의 오류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간혹 우리 지식인들이 갇혀 사는 게 학벌주의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정치를 못해도 너무 못해요. 닭정권 들어서 뭔가 융성하는 걸 못 보겠어요. 삼성핸드폰 빼고. 밀어주고 지원해주고 해야 되는데 지원금들이 옆으로 새는 건지. 부정부패나 부리 너무 심합니다. 투명사회가 되어야 문화든 정치든 경제든 융성하는데. 물론 정치의 부패뿐만 아니라 문단의 시스템도 바꿔야하지만요. 차라리 미국처럼 출판사에게 자기 원고를 보내던가, 조중동 신춘문예나 국문학과 교수들의 카르텔이 작가들을 망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