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란파슨즈 프로젝트의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때가 중학교 다닐 때였다. 인트로 부분의 피아노가 어찌나 인상적인지 그 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의 우리집 살림으론 피아노 학원은 당치도 않았을 때여서 피아노 배우고 싶다는 말을 입 벙긋하지 못했지만,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의 기폭제가 된 것은 이 노래였다. 친정엄마는 툭하면 하는 소리가 본인이 직접 나를 피아노 학원까지 데려가 피아노 배우게 하려고 했다는데...내가 완강히 거부했다는 것이다. 난 정말 그런 기억 없다. 억울하다. 도대체 누구의 기억이 맞는 건지.
수 십년이 지나 며칠 전에 다시 생각나 엠넷에서 다운 받아 다시 듣기 시작했다. 역시 이 노래의 압권은 인트로의 피아노 플레이 파트이다. 알란 파슨즈는 원맨밴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자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모든 악기 연주를 다 한다. 보컬 빼고.

6시반에 자명종이 울린다. 일어나 먼저 텔레비젼을 켜고 이를 닦고 아침밥을 만들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7시 반에 아파트를 나온다. 이것이 나의 일상이며 매일 도장 찍듯 반복된다. 지겹다고 생각 될 때도 있지만 도장 찍는 듯한 일상이 사실 나는 좋다.
커피를 내리는 것도 나의 '도장'같은 일이나, 오늘은 어째 어제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커피를 내린 뒤 머그잔에 따라 마셨다. 무척이나 흐렸다.
내일은 미사키상이 주선한 미팅날이다. 2개월이나 3개월에 한번씩 반드시 호출을 받는다. 미팅으로 애인을 사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도 즐겁지 않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대체로 참석한다. 2,3개월만에 한번인 미팅, 이것 또한 나의'도장'에 포함 되어 있다.
- 우리의 도망 중에서
집에서 쓸고 닦고 애들 키우고 삼시세끼 밥차리는, 특히나 5시 무렵에는 저녁밥은 뭘 해서 먹을까로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갓잖은 실존적 고민이 전부인 나 같은 아줌마에게도 몇년동안 열심히 찍은 도장이 있다. 풉. 알라딘과 예스.
지난 몇 년동안 그 두 곳만은 출근도장과 퇴근도장을 열심히 찍고 돌아다니며 수다 떨고 좋은 글과 리뷰어를을 찾아 지적 자극을 받아 부지런히 책을 사 들이고 읽었으며, 그래서 어느 샌가 내가 정신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큰 폭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곳들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질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나의 도장 사이트에 무한한 매력을 느꼈고 해마다 식지 않는 애정을 보탰다. 정말 영원히 애정의 도장을 찍을 것만 같았다. 인간 관계 폭이 좁아서 그런 것일지 모르겠지만,난 살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렇게 많이 만나지 못했다. 절로 흥이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온라인의 이런 공간에 더 매력을 느꼈던 것은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 분모이긴 하지만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는다는 것. 직접 만나 서로의 감정을 탐색하고 눈치보고 서로의 흉허물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마침내 좋지 않은 감정으로 끝을 내는 직접적인 인간 관계대신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간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도 알라딘과 예스에 열심히 도장을 찍었던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한한 애정을 보냈던 나의 도장 사이트들과 나 사이에 금이 간 것은 지난 해 하반기부터인가보다. 일단 건강에 이상이 와 기운이 딸리다보니 오래 컴을 들여다볼 수 없었고 감정적 기복이 심해 앉아서 책을 읽기 힘들었다. 읽은 책이 없으니 이야기 밑천이 떨어지고 저절로 책 이야기로 가득 찬 이 곳에 들어오고 싶지도 않더라는. 아주 많은 날들을 도장 없이 보냈다.
수년동안 두 사이틀에 열심히 도장 찍었을 때는 알라딘과 예스가 전부였고 알라딘과 예스 없으면 소소한 일상이 재미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장 사이트에 더 이상 관심과 집착이 가지 않으니 다른 것들도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젬병이었던 음식도 서서히 내 맛을 알아가고 재미없을 줄 알았던 가정 살림에 서서히 눈이 떠 가기 시작한다. 좀 더 일찍 책이 아닌 내 주변의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사람이 평생 한 곳에 집착하기 보다는 늦더라도 서서히 다른 것 무엇인가를 알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책만이 아닌 다른 무엇가의 다른 도장도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도장 없으니깐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