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장면들 중 하나는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아무 모양도 없는 검은 옷으로 감싸고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내다 보는 여성의 모습이다. 부르카는 단지 여성을 억압하고 그들의 자유와 아름다움을 억압하는 도구가 아니다. 남성의 지독한 잔인성과 여성의 비극적인 굴종을 가리키는 것만도 아니다. 나는 그 작은 구멍으로 다른 무엇가의 상징으로 이용하고 싶다(556p).

한때 나는 열렬한 천주교 신자였다. 우리집 가족 그 누구도 신을 믿지 않았지만, 20대 초반,  난 내 발로 성당을 걸어들어가 예비교리를 신청하고 6개월간의 교육을 받은 다음, 아네스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 이후에도 혼.자.서 20분 거리의 성당에 성경책을 들고 예배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꽤 오랜동안 했었다. 이러한 신앙 생활은부모님의 불화에서 오는 고통을 달래주어야 할 무엇인가가 필요했었고, 신을 믿음으로서 마음의 위로와 경건함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 그래서 애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애아빠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후원을 했으며 애아빠가 세례 받는 날 우리는 성당에서 간략하게 혼인 서약도 했었다.  

하지만 난 나의 아이들한테 유아세례는 받게 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유아세례를 받게 해야한다며 종용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종교의 대물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고 한 엄마한테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종교인으로서 무책임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 때 그 비난을 받으면서도, 변명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때 유아세례를 종용하던 분들께 하고 싶었던 말은, 아이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선택을 주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후풍폭이 두려워 그 말은 꿀꺽 삼켰다.  

점차 성당에 다니면서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기보다 혹 종교도 일종의 이익집단이 아닐까, 라는 종교인으로서 신에 대한 그리고 종교 집단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고, 나의 부모가 나에게 종교의 선택권을 준 것처럼 나의 아이들에게도 그런 권리가 충분히 있다,라는 확신이 믿음보다 더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쩜 종교적 회의가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은 물론이거니와 윤회도 믿지 않는다. 현재 나의 종교관은 소수의 권력자가 많은 사람들의 통제권을 행사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한, 그리하여 통제권을 행사를 더 권고하기 위해 신분제도의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정도로 인식될 뿐이다. 그리고 종교야말로 세계분열의 기여도가 가장 크다는 인식정도.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중의 하나가 부의 대물림이 아닌 종교의 대물림이다. 그는 종교의 대물림이 아이들에게 종교선택권의 자유를 뺏을 뿐 아니라 테러의 한 가운데 설 수 있는 용맹(?)과 무분별한 희생정신을 주었다고 한탄한다. 그 어떤 대물림보다 종교의 대물림은 가족간의 결속력을 그리고 더 나아가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 세속한다. 종교의 대물림은 천년 전, 신의 언어가 현재에도 먹힌는 아주 이상야릇한 장기통제권이라 할 수 있다. 말도 안된다고?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은 예전과 다르다고. 아니 이슬람 여성의 온 몸을 휘감고 있는 부르카를 보면 나는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 온 종교의 대물림, 편협성,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성과 남성 우월주의의 대한 복종과 그녀들의 구속된 삶과 굴욕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프랑스에서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부르카 착용 금지 조치에 대해 나는 환영한다. 단지 페미니스트의 시각이 아닌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말이다. 혹자는 그러한 조치가 문화적 상대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편협한 종교적 강제성에 대해서는 왜 의문을 제기 하지 않는가. 왜 그녀들은 뜨거운 사막에서나 유용할 옷차림을 다른 나라에서도 고집하는가. 왜 그녀는 다른 여자들이 맘껏 누리는 청바지와 짦은 치마를 입을 수 없는가. 왜 그녀들은 작은 구멍으로 두 눈만을 내 놓은 채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왜 그녀는 평생을 굴욕적이고 복종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문화적 상대주의란 포괄적인 의미만을 내세운 체 종교적 통제하에 있는 그녀들의 자유에 침묵하는가? 그녀들이 그렇게 살아야할 이유는 없다. 이슬람을 믿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자유는 투쟁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지금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지난 20세기 우리가 자유를 얻기 위하여 투쟁은 인류의 커다란 진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종교의 강제성에 맞서 투쟁할 수 조차 없다. 남자 어른이 없이는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강간을 당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명예살인을 당해야하며 9살,10살의 여자아이가 돈 많은 남자들에게 팔려 시집을 가 애를 낳다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한다. 수 백년동안 남성하에 살아야한다는 종교적 세뇌는 그녀들이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도 무기력화한다.  이게 바로 종교의 악질적인 속성이다.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아이들 그림책을 보다가 우연히 내가 즐겨 입는 바지를 코코 샤넬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에만 해도 바지를 누가 만들었는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그녀가 치마를 벗어던질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바지를 입는다라는 착복의 자유는 여자들에게 인식의 전환과 지평을 넓혀나간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깟, 바지 하나가 뭘 여성의 삶을 변화시켰겠냐고 말하겠지만, 그깟 바지 하나로 여자는 그 이전 시대보다 활동의 영역은 넓어졌고 더 많은 자유를 얻었으며 남자를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부르카 착용금지가  이슬람 여성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문화적 상대주의를 부르짖으며 그녀들이 부여 받을 수 있는 자유를 원천봉쇄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온 몸을 휘감은 부르카를 찢어버리고 청바지와 짦은 치마 그리고 섹시한 나시티를 입을 수 있는 자유와 더불어 자유 의지를 줘라. 21세기에는 남성을 위한, 남성의, 남성에 의한 억압된 자유가 아닌 그녀들만이 지금까지 종교적 억압에 의해 누릴 수 없었던, 풍요로운 자유 말이다.  

덧: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중의 인용구는 부르카를 비판하는 글이 아니다. 그는 마지막 문장에서 말한 것처럼  부르카를 비유해 좀 더 넓은 과학적인 진보에 대해, 한계가 없을 수 있는 과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킨스가 부르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아니다를 빼고 이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으로 2010-01-29 21:56   좋아요 0 | URL
어떤 종교든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의 집에서도 애들에게 약간의 강요가 있었지만(남편때문에) 전 아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보거든요. 결국은 제 의견이 반영되어 영세만 받고나면 이후 종교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하기로 했는데, 모르죠 정말 그때가 되면.
제가 요즘 믿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잖아요. 아직 확 와 닿지도 않고 끌리는게 없지만 열심히 다니다보면 그네들이 말하는 영적인 체험 같은 것을 하게 될 수 있을까...하는 의심적인 마음이 더 많지만요, 이번주엔 매일 아침 성당에 가서 미사드리고 왔잖아요. 지난 토욜엔 첫고백이란 걸 떨리는 마음으로 하고 왔구요.

기억의집 2010-02-01 09:42   좋아요 0 | URL
종교란 자기정화 같아요.
전 종교를 이제 여러 면에서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군자란 2010-02-01 09:51   좋아요 0 | URL
종교는 자기정화란 말에 나도 모르게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는 계속된 자기 자신과의 대화인것은 맞는데, 거기서 벗어나 종교가 할수 없는 역할까지 간섭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복잡해지지요. 그 경계를 아는 것이 지혜인것 같은데...

기억의집 2010-02-01 10:00   좋아요 0 | URL
전 사실 도킨스의 책을 읽고 저의 종교성을 버렸지만
종교란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더라구요
생각보다 종교의 역활이
나약한 인간들을 통제하는 역활을 해 왔다는 생각이 들고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왜 그럴까?하는 의문이 자꾸 들어요^^

akardo 2010-02-01 17:36   좋아요 0 | URL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말이 가끔 보면 자기들 일에 간섭하지 말란 식, 특히 예전 한국형 민주주의 어쩌구 하면서 독재를 미화했던 것처럼 악용되는 일이 많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을 중심으로 문화적 상대주의 떠들었을 때 좀 떨떠름했달까요. 도킨스는 정말 근대의 수호자란 생각이 들어요.

기억의집 2010-02-02 10:08   좋아요 0 | URL
아카도님, 저는 상대주의란 것이 타인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혹은 어떤 정치적 집단은 이것을 악용하기도 하네요. 전 이슬람 여인들이 이 부르카를 다 찬성하지 않을 거 같아요. 생각해보니 만화 페르세폴리스1권에서 베일이라는 주제로 부르카에 대해 시작하잖아요. 부르카란 1980년 이란혁명이 가져온 것이었네요.혁명이 이렇게 교조적이고 보수화로 역행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정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래서 페르세폴리스가 떠올랐어요^^

akardo 2010-02-02 18:51   좋아요 0 | URL
일반적인 혁명의 정반대편에 `반(anti)`혁명도 있죠. 전에 읽었던 팩스턴의 <파시즘> 한국어판에서 부제목으로 파시즘을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이라 했으니 혁명도 각각의 성격 나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억의집 2010-02-02 20:55   좋아요 0 | URL
아카도님의 리뷰 읽었던 거 같아요. 파시즘에 대한 책리뷰 올리셨지요?!
혁명이란 의미가 상당히 넓네요. 전 그럼 지금까지 혁명이란 좀 더 진보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