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난 영화관이든 케이블이든 간에 2시간 넘게 죽치고 꼼짝없이 앉아서 영화보는 거 무서워한다. 아니 고달퍼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거 같다. 이게 다 애 키우면서 생긴 후유증이라면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확실히 애 키우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짧아진다. 그래서 내가 선호하는 영화는 짧은 상영 시간의 복잡하지 않는 내용의 영화다. 한마디로 만화영화! 올 한해도 큰애와 함께 제법 영화관을 들락였는데, 큰 애와 본 영화가 ....그게 그게... 다 만화영화였다. 가장 재밌게 본 영화가 나루토였다면 내 수준이 어떠한지 알 만 하지 않을까나(근데 나루토의 마지막, 전투씬은 정말 멋졌다. 아무리 만화영화였다지만, 어른인 나도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짜릿한 전투씬이었다. 이러니 유럽애들이 나루토 보고 환장할 수 밖에)!  

카메론의 12년만의 신작이라는 이 영화가 2시간 40분이란다. 그 말에 보고 싶은 맘 싸악 달아놨었다. 1시간 30분이면 바닥을 보이는 내 집중력도 못 믿겠고 장시간 엉덩이 깔고 붙어있을 자신이 없었다. 허나 남편이 함께 보러가자는 말에 가기 싫다는 말은 못하겠고, 할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멍멍이마냥 따라 나섰다. 힘들면 둘째 핑계대고 나오지 뭐, 했는데, 오호라~ 그런데 이게 왠걸! 2시간 40분이 상대성원리를 적용하자면 1시간 같았다. 영화의 스케일과 비쥬얼이 웅장하고 장대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내용은 다른 리뷰어들 말마따나 여기저기 짜집기(특히나 하야오의 애니를 많이 차용한 거 같은) 했고 2시간 40분의 SF 영화안에 20세기 제국주의 약탈사가 다 들어있는 듯 했다.  영화 보는 내내 난 베트남 전쟁을 떠올렸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속>의 쿠르츠가 연상되었다. 커다란 틀에서 보면 거대한 자연과 그 보다 더 거대한 테크놀로지의 대결과 약탈로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웃기는 말이지만, 난 전투씬에서 엉뚱하게도 전투가 끝나면 저 깨끗하고 순수한 자연밀림에 탄알과 폭격의 잔해(쇳덩어리)로 뒤덮여 더럽힐 것을 염려했고(CG임에도 불구하고), 처녀림의 잔인한 성폭행 흔적 같아 불쾌했다(아침에 다음 기사 보니깐 한나라당이 새해예산 기습 상정했던데 걔네들이야 말로 아바타의 지구침략자의 모습이리라. 아침부터 기분 더럽더라! 좆같은 한나라당 같으니라구).

워낙 아바타에 관한 잘 쓴 리뷰가 많아 나는 이 영화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 카메론의 영화<터미네이터>를 처음 접했던 것이 중3때였고, 그의 <에이리언2>를 본 게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물론 카메론의 영화는 발표되는 족족히 장안의 화제여서 안 볼 수가 없었다. 아마 동시대에 살었던 분들, 그 때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 그 시절에는 블럭버스터라는 영화가 흔치 않았기에 카메론의 영화들은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그 때의 흥분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 짓지 않으려나.  여하튼 카메론의 영화는 사람들의 입에서 야, 영화 진짜 재밌는데, 라고 꼬리를 물면서 영화는 대박을 쳤고, 그의 영화는 SF 영화사에 길히 남을 고전 영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에이리언 2>가 영화사에 가지는 의미는 흥행이나 Sf 그래픽 효과면에서 개척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여성전투사의 모습을 최초로 보여주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카메론이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여성이미지는  나약한 여성의 이미지가 아니다.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악과 싸울 수 있는 터프한 여성, 그게 그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이다. 난 TV시리즈 원더우먼과 소머즈를 열광적으로 본 세대이기도 한데, 소머즈와 원더우먼이 어느 정도 여성도 악과 싸울 수 있다는 좀 더 진보적인 여성이미지를 가져다 주었긴 했지만, 결코 여전사가 되지는 못했다. 그들이 악당과 싸운 후에도 땀과 먼지 하나 없는 우아한 여전사였다면,  카메론의 시고니 위버는 진정한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채 강력하게 악과 싸우는 최초의 여전사였다. 전통적인 여성관을 완전히 부수며 새롭게 창조해낸 카메론의 여성비쥬얼의 파급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그의 에이리언2 이후로 여성은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는 여성이미지로 변했다. 이제 영화와 소설에서 묘사하는 여성은 강인한 존재로, 악착스러운 존재로 거듭 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 사이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카메론이 이번 <아바타>에서 미셀 로드리게스에게 다른 SF 혹은 전쟁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남자역활이 주어졌다.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역활이 제이크도 네이티리도 아닌 화끈하면서도 털털한, 그러면서 양심을 지켜낸 미셀 로드리게스가 아니였는지. 카메론은 이 영화에서 리플리을 능가하는 여성 비쥬얼을 창조해냈다고 한다면 내가 좀 오버인가.  

그의 이러한 여성 이미지가 어디서 나왔을까? 그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SF 소설들? 특히나 그의 여성관이 하인라인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측하면 어떨까? 가능한 추측 아닐까!

  

 

 

 

한때 난 Sf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는 적이 있었다. 그 때 3대 SF 소설가중 한명이라는 하인라인에 흥미를 가졌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의 소설들을 재밌게 읽었다,라고 할 수 없지만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지금까지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가 40~50년대에 묘사한 여성들이다. <여름으로 가는 문>에서 벨은 오늘 날로 치자면 사악한 여성 CEO이고 <달은 무자비한 여성>에 나왔던 여주인공은 글래머스러움과 함께 당당한 발언을 했으며, <프라이데이>의 프라이데이는 그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여성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은 프리섹스주의자였으며 <스타쉽 트루퍼스>의 우주군대는 여성 또한 남성과 함께 입대할 수 있다.  

이게 뭐 별거냐고 반문하겠지만, 미국에서 여성참정권을 획득했던 것이 1920년대였다. 시고니 위버가 총대 들고 싸우는 비쥬얼이 86년에나 가능했던 것을 생각하면 진짜 놀라울 정도의 급진적인 여성관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 그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그의 여성은 이해심 많은, 인자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여성이 아니다. 사실 이거 다 기독교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천년동안 기독교 사고에 너무 물들어 있었고 왜 단 한번도 여자가 남자에 종속되어야 하는지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오늘 날로 한국 사회 용어로 치면 된장녀. 결코 남성들이 위에서 나열한, 로망하는 여성이 아니고 당차고 당돌한 신경질적인 프리섹스주의자들이다. 심지어 <프리이데이>의 프라이데이는 오늘 날의 나도 받아들이긴 힘든 미래의 여성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인라인은 동시대의 여성sf작가 어슐러 르귄조차 만들어내지 못한 미래의 여성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못 믿겠다고? 그럼 지금 당장 <프라이데이>를 읽어보시라. 로빈스 크로소우가 프라이데이가 아닌 하인라인의 프라이데이가 십자가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한사람의 작가가, 혹은 한 사람의 감독이 그려내는 급진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시대와 맞물려 파급효과가 크다. 사회가 그런 진보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무르익은 사회든  아니면 모른 척 하든지 간에 이제 우리는 어떡해서든지 카메론의 여전사를, 하인라인의 여주인공들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고 될 것이다. 그 물결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말이야.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덧: 내가 가장 손꼽는 작가 콘래드가 위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창조해낸 쿠르츠라는 인물유형이 오늘 날에도 유용하다는데 있다. 뛰어난 작가의 인물 창조는 과거,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유용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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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9-12-31 13:25   좋아요 0 | URL
여전사의 부드러운서도 당찬 “투지”가 넘치는 글이군요.^^
“기억의집” 님, 정말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저도 시고니 위버(Sigourney Weaver) 좋아하는데요. 그리고 에일리언(Alien) 1, 2, 3 편은 제가 본 SF 영화 중 가장 좋았다고 보는 영화들이랍니다. 아바타(AVATAR)는 아직 못 봤는데요. 저도 SF 영화 광팬이라 꼭 봐야겠네요. 여전사 얘기 정말 공감 가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기억의집 2009-12-31 22:02   좋아요 0 | URL
전 에이리언2를 보고 언젠가 이런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시고니 위버 이후 조금씩 조금씩 변했거든요. 데미 무어의 GJ 제인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카메론 덕이 아닐까 싶었어요. 애들만 아니면 좀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아침부터 애들이 만화영화 보고 싶다고 해서.... 여기에서 끝냈어요.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네파벨 2010-01-01 14:50   좋아요 0 | URL
우와........환상적인 리뷰입니다. 제 서재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이렇게 멋진 곳을 알게 되었네요.

저도 "트루디"(배우 이름이 미셸 로드리게스였군요.)라는 캐릭터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어찌보면 다른 이기적 동기(제이크의 경우 사랑, 네이티리의 경우 종족애, 그레이스 박사의 경우 과학적 사명감 내지는 자신의 프로젝트-나비족과의 외교적 해결책-에 대한 소신) 없이 오직 본능적 수준의 양심으로 움직인........영웅이죠!


기억의집님이 좋아하시는 조셉 콘래드와 하인라인...꼭 읽어보고 싶네요.

기억의집 2010-01-04 09:54   좋아요 0 | URL
앗, 고맙습니다. 답글이 너무 늦었죠. 저의 집이 노트북 한대로 넷이 써야하는 상황이라서....연휴 기간 내내 제 차지란 있을 수 없더라구요^^

터미네이터2의 린다해밀턴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는데..애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아바타의 트루디, 정말 몇 장면 안 나오는데 멋지더라구요. 카메론의 여성관이 진보적인 거 같아요^^

콘래드는 영문학사에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람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정말 인기가 없어요. 인지도도 없더라구요. 사실 영문학사에서 제인 오스틴급인데... 하인라인의 작품은 재밌지는 않지만 그가 창조해내는 세계는 읽어볼 만 해요. 너무나 급진적인 작가라 따라잡기가 힘들더라구요^^

다락방 2010-01-04 16:12   좋아요 0 | URL
와- 진짜 쑝-가는 글이에요. 마구 추천했어요. 왜 어제 왔을때는 이 글을 못봤지? ㅠㅠ

일전에 미드 [성범죄 전담반]보고 쓰신 글도 넋을 놓고 읽었는데, 이 [아바타]를 보고 쓰신 글도 그렇네요.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짚어주셨어요. 음,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걸까요? 정말 멋진 글이에요, 기억의집님!!

기억의집 2010-01-05 10:1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부끄럽게시리~~~~~~
칭찬 고마워요^^ 갑자기 어깨가 으~쓱 해졌어요^^
오늘 출근은 제시간에 했어요? 고생 많았을 거 같은데....^^
그럼 오늘도 하루에 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