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가 나오는

사이토우 마리코의 시, <눈보라>

 

눈보라

 

2.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같이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하나씩 눈송이를 뽑는다. 건너편 敎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 땅에 着地해 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하고 그 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 해도 절대로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 야단 맞을 때까지 열중했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닿았다. 

 

 

 

헥헥, 제목도 길다!

외우지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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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다른 것도 아니고 필생의 깨달음과 회한의 순간을 사투리로 기록한다는 것, 아버지의 언어가 아니라 조부와 신석공과 옹점이의 언어로 기록한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이문구적인 것이다. 소설을 쓰다보면 좀 잘된 것도 있고 안된 것도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대단하고 정교하고 감동적인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허구는 허구일 뿐이다. 예술의 세계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새겨져 있는,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의 정신, 한 사람이 소설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혹은 문학하기라는 실천의 영역을 통해 보여주는 정신의 폭이자 높이다. 우리가 이문구를 고유명사로서의 문학이라고 부른다면 바로 그런 점 때문이다._서영채(문학평론가)

 

_이문구의 소설에서 어휘와 문장, 또는 문체를 아우르는 그의 소설 속의 ‘말’들은 방법이나 묘사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나의 주제이자 이념의 위치에 놓여 있다. 그는 어떤 작가보다도 ‘저잣거리’의 ‘말’이 지닌 생명력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 ‘말’들을 각고의 노력으로 포착하기 위해 애써온 작가이다. 그에게 ‘말’들은 곧 세계 그 자체였다._한수영(문학평론가)

 

 

충청도의 힘, 맛깔나는 사투리와 해학 넘치는 문장들.

이문구 선생의 책을 읽는 것은 당대 서민들의 세계를 엿보는 일.

은유와 굉장한 스토리가 없어도 서사의 힘을 느끼게 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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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나는 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데 익숙하여, 인생의 대부분을 그 의심의 심연에서 보낼 것이다. 스스로를 의아해하는 인간. 믿음이나 사랑이 도착할 수 없는 영혼의 플랫폼.

 

_빗방울에는 뒷면이 없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그렇다. 이 세계 역시.

 

_말하자면 인생은 이런 자세로 흘러가는 것이다. 너는 그걸 알고 있느냐, 그런 느낌이었다. 나이가 든다는 게 뭔지.

 

 

알고 보니 그동안 이장욱의 소설을 꽤 읽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다.

내가 읽었던, 그 소설의 작가가 그인 줄은.

이 책을 안 읽었으면 좋아할 작가, 한 사람 놓칠 뻔했다.

좋다. 이 작품, 표지도 문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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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逆光)

서울에 함박눈이 내린다는 소식

우주 밖의 일인 듯 아득해집니다  

저는 지금 고대 왕조의 수도에 와 있습니다  

 

무덤과 사원들이 가까이 살아 있습니다  

 

내리는 곳이 아닌 역驛에서 마주친 우연으로  

운명으로부터 먼 운명으로  

이국의 꽃집 앞을 지나갈 때  

 

격자 창문 안쪽에서 숨은 눈들이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풍경을 보기 위해 창문을 보는 건 아닙니다  

생각을 지우기 위해 풍경을 봅니다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만

그 뒤에 가려진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부처는 지워지고 부처 손톱이 자라듯  

나무가 성장통을 겪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 뒤에, 뒤에, 우리는 아프게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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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후 

          _천서봉

 

그리움이 지나쳐, 아이야, 봄에, 폭설. 꽃들이 해안을 걷다 쓰러졌다. 사장(沙場) 때문이었겠지만, 당신을 붙잡지 못한 건 당신이 미끄러워서냐. 수상한 아이들이 몰려다니는 골목.

 

그러니까 일기도란 내가 앉은 이 어둑신한 골목과 심장이라는 당신의 언덕 사이에 놓인 등고선의 간격이었구나. 그립냐, 그립냐. 물어보면 하늘은 금세 미량의 구름과 미량의 어둠과 미량의 눈물을 섞어놓는다. 마땅한 처방이냐, 발이 시러워, 앉을 곳 찾지 못하는 나비, 그게 나 아니냐. 저체온증을 앓는 당신 아니냐.

 

아이야, 밤에, 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머리맡까지 밀려와 있었다. 떠내려가지 못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혹은 어디로 가지 말아야 할까. 목단꽃 이불을 모아 바다처럼 펼치면, 리아스식 해안엔 다시 폭설. 여긴 촛불이 태양보다 따뜻하다.

 

갈비뼈 같은 도면을 쥐고 내가 신촌의 날카로운 지하방으로 내려갈 때, 라니냐, 라니냐, 바람 분다. 에스파냐 이비자 섬에서 불어오는 슬픈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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