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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왕 정세권 - 집을 지어 나라를 지킨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
김경민 지음 / 와이즈맵 / 2025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책 표지에 적힌 '집을 지어 나라를 지킨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라는 문구는 호기심을 넘어 지성인의 부끄러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음에도 정세권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몰랐다는 사실에, 책을 읽는 내내 민망함과 동시에 깊은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경성의 대자본가들은 '유통왕', '광산왕' 같은 타이틀로 불렸는데, 정세권은 단기간에 한옥 집단 지구를 경성 전역에 건설하며 '건축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는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읽는 비즈니스 수완을 보여주었습니다. 호황기에는 고급 주택을 공급하고, 폭락기에는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중급 주택을 지어 매매하는 등 유연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특히 1939년에는 자본 수입과 임대 수입의 이해를 바탕으로 민간 주택 임대 사업에 진출하는 선구안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시각은 주택 설계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조선일보와 현상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조선인의 생활방식을 반영하면서도 현대 문화생활이 가능한 주택'을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주택을 짓는 것을 넘어, 우리 고유의 사는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개선된 환경 구축을 유도하는 문화적 시도였습니다.
정세권의 진정한 위대함은 자본가가 아닌 '민족 운동가'로서의 행보에 있습니다. 많은 자본가들이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 굴복하여 민족운동에 등한시했던 것과 달리, 그는 조선물산장려회, 양사원,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 주요 독립/민족운동 단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감수했습니다.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바로 "땅을 지켜낸 전쟁"입니다. 그는 일본 회사들과의 치열한 토지 매입 경쟁을 통해 북촌이나 왕십리 등지의 우리 땅을 지켜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현재 북촌 한옥마을이라는 고유의 문화유산을 보존할 수 있었고, 이곳은 국내외 여행객의 관심을 받는 명소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건축사의 기록을 넘어,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건축'이라는 가장 실질적인 수단으로 민족의 터전과 정체성을 지켜낸 한 기업가의 위대한 드라마입니다. 시장 상황을 읽는 냉철한 사업 수완과 민족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동시에 가졌던 정세권의 삶은, 오늘날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깊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그의 '집으로 나라를 지킨 정신'은 21세기 우리가 고민하는 도시 재생, 공동체 형성, 그리고 지속 가능한 건축 환경 구축의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건축을 넘어 시대를 이해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진정한 디벨로퍼의 책임감을 알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