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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저에게는 정말 흥미진진한 단편집이었어요. 사실 단편소설에 대한 고정관념때문인지 선뜻 읽지 않게 됩니다. 이야기에 몰입되어 정신없이 읽다보면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 듯한 아쉬움이 싫었거든요. 하지만 이 책은 다음 단편이 기다린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완성도 있는 결말때문인지 전혀 그런 아쉬움이 남지 않았어요. 그 짧은 단편 속에 반전을 담은 이야기도 있고, 가슴이 먹먹하게 만드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최근의 추리 소설과는 확실히 다릅니다.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사건 자체보다 그 일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범인의 인생담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 자체가 1950년대, 2차 세계 대전 이후여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고달펐던 당시의 삶이 등장 인물들을 통해 여과없이 보여집니다. 전쟁때문에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호스티스로 살아가면서 겪는 수모와 고통, 부와 명예에 대한 집착과 일그러진 욕망, 경제 불황으로 정리 해고되어 가정 내에서 설 자리를 잃은 남자들의 무기력함과 그 이면의 분노, 절망감 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범인도 악인으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서글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연민의 감정 또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은 그들의 죄는 매우 나쁘지만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현실과 그들의 처지가 일면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 죄의 발단에는 부조리한 사회와 욕망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궁핍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죠. 자연스레 작금의 현실과 비교해 보게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사건 사고가 잦은 요즘이죠. 당대보다 오히려 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가속화 되었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 이들도 더 많고요. 그로부터 파생될 불가피한 반사회성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앞으로 이 간극을 어찌 좁혀 나가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됩니다.

이 책은 등장 인물들의 심리 묘사나 사건을 일으킨 동기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룹니다. 따라서 등장 인물들이 정말 현실성 있는 입체적 인물로 잘 묘사됩니다. 인간의 선한 이면에 존재하는 비정함, 질투와 시기, 교활함 등 더러운 감정과 욕망들이 면밀하게 드러납니다. 그에 따른 인과응보 역시 매 단편마다 소름끼치게, 혹은 후련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저는 얼굴과 귀축, 카르네아데스의 널이 인상적이었어요.

얼굴은 개성 강한 어느 무명 배우 이노 료키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극단 입단 후 8년 만에 영화 출연을 통해 유명해질 기회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에겐 내연관계의 여자를 죽인 과거가 있었죠. 그리고 그녀를 죽이기 위해 함께 떠난 기차 여행에서 어떤 남성을 만나게 됩니다. 이노 료치키의 입장에선 그 남성이 자신의 얼굴을 기억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 배우로서의 성공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기회인가, 자신을 파멸시킬 기회인가. 얼굴로 인해 성공을 할 수 있게 된 어느 배우가 바로 그 얼굴 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그 딜레마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나름 반전의 묘미도 있고요.

귀축은 인간 이하의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비정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키치와 오우메라는 인쇄소 부부가 등장하는데 소키치라는 이 남자는 바람을 피우게 됩니다. 어려운 시절이 지나고 나니 부인과 정반대인 여성에게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긴거죠. 바람의 대상인 기쿠요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들을 얻게 되며 '두 집 살림'을 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 잘 숨겨왔지만 인쇄소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돈때문에 찾아온 기쿠요와 오우메가 마주치게 된거죠.어느 순간 기쿠요는 세 아이들을 버리고 멀리 도망가버립니다. 이 때 오우메가 이 아이들은 하나도 소키치를 닮지 않았다는 말을 해 버립니다. 그 이후로 소키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죠. 이 아이들이 자기 아이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오우메는 그런 남편의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극악무도한 행동을 지시합니다. 아이들을 없애버리라는 지시였지요. 계획대로 두 아이는 처리하지만 마지막까지 첫 째 아이가 살아 남습니다.그런데 참 묘한 것이 이 아이가 어떤 면에서 무척 섬뜩합니다. 죽음의 순간을 기똥차게 눈치채고 모면해 가거든요. 정말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였어요.

카르네아데스의 널은 사제지간인 두 대학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저명한 역사학과의 교수인 구무라는 강연 여행 중에, 이전의 은사인 오쓰루를 찾아갑니다. 오쓰루는 전쟁 중 국가적 역사관을 강의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추방되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죠. 구무라를 만난 오쓰루는 그에게 자신의 대학 복귀를 위해 힘을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전 은사의 비굴한 모습에 묘한 자부심이 동한 구무라는 오쓰루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신의 대학에 복귀되도록 돕습니다. 결국 대학에 복귀한 오쓰루는 진보적 학자로 급속히 변모하고 부유한 생활을 위해 애를 씁니다. 구무라는 풍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상관하지 않는 옛 인사를 차갑게 방관하며 비웃고 있었죠. 하지만 오쓰루가 몇몇 저서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구무라는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설상가상 시대가 변해서 문부성이 좌익 편향 교과서를 불합격시키자, 구무라는 진보학자라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우익으로 전향하려고 했으나, 마침 그때 오쓰루가 가장 먼저 전향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앞길을 막을까 두려워집니다. 은근슬쩍 다른 노선으로 옮겨가고자 했으나 오쓰루때문에 눈에 띄어 기회주의자로 낙인 찍힐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죠. 결국 구무라는 내연녀를 이용하여 오쓰루를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만들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의 명성과 경제적 곤궁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학문적 입장마저 번복하는 교수들을 보며 환멸감을 느끼게 됩니다. 뻔뻔하고 착취적인 성격의 오쓰루나 매사 계산적이고 가식적인 구무라나 역겹기는 매한가지인 인물들입니다만, 내연녀까지 이용하고 더럽다 버리는 구무라는 정말 최악의 인간상입니다. 마지막까지 현대는 부조리로 얽혀있다며 자신의 잘못을 늬우치지 못 하는 그를 보면 치가 떨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과연 살아남은 것은 구무라이지만 바다속으로 떨어진 것은 내연녀인가, 오쓰루인가.

'카르네아데스의 널' 이라는 것이 있다. 카르네아데스는 기원전 2세기 경의 그리스 철학자이다. 그는 '망망대해에서 배가 난파했을 경우, 널 하나에 매달려 있는 사람을 빠뜨려 죽이고 자신만 사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도 옳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목숨을 내버리고 타인의 목숨에 구애되는 것 또한 어리석다" 라고 했다. - p. 374

마치 폭풍우 속 조난자가 널판지를 함께 잡은 이를 바닷속으로 떠밀어 내고 저 혼자만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듯한 느낌을 아주 적확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씁쓸한 모습을 반영한 듯하여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시대를 거슬러 보편적 인간의 어두운 측면과 사회의 부조리함을 세심하게 다룬 그의 이러한 작품들 때문에 "사회파"의 거장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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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답다 라는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정말 다작을 하는 작가님인데요, 새로운 책이 출간될 때마다 '벌써?'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잘 쓰여진 책인가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막상 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기다 보면 굉장한 가독성때문에 열을 내며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이 책 또한 그렇습니다.

일단은 몽환화라는 독특한 소재가 눈길을 끕니다. 아무래도 꽃이다 보니까 인류의 평화나 생존에 위협을 주는 위험성은 없습니다만, 별거 아니게 느껴지는 꽃 하나 때문에 왜 사람이 죽었는지, 어떠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킵니다. 뭔가 테러리즘에 필적할 만한 굉장한 음모론을 기대하신 분들은 결말 부분에서 실망이 크시겠지만요. 책을 읽다보면 나팔꽃에 대한 해박한 지식 느껴집니다. 나팔꽃에 관련하여 그가 가장 자신없는 역사, 반대로 가장 자신있는 과학 분야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잘 섞었습니다. 일본의 고 문헌 속 나팔꽃에 대한 기록들과 더불어 변형 나팔꽃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나 재배 방법 등이 꽤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요. 밤에 피는 꽃이다 정도의 지식 밖에 없던 저에게는 꽤 재미난 과학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답니다.

또한 이 책에는 많은 등장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어떠한 사연으로 개연성있게 연결될 것인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흥미롭습니다. 몽환화에 대한 진실을 숨기려는 자들과 밝혀내려는 자들 사이의 지능적인 추격전이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게 하죠. 특히나 밝혀내려는 자들이 평범한 대학원생과 대학생이라는 점이 소설의 캐릭터들에게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형사나 탐정이 아니기때문에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상황을 유추해 나가는 면이 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니까요. 일반인들이다보니 어느 정도 우연에 기인하여 단서들을 얻을 수 밖에 없는데, 역시 배테랑 작가답게 그 과정을 필연적이고 탄탄하게 서술하고 있답니다. 억지스러운 부분이 느껴지지 않고 각 단서들의 등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마지막 장까지 흥미진진하게 읽게 됩니다.

그가 추리 소설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독자층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들이 살인 사건의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발표 된 방황하는 칼날,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에서도 각각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죠. 이번 책에서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원자력공학 박사과정에 있는 주인공 소타를 통해서 말입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의 상황에서 쓸모없는 연구가 되어버린 자신의 전공 때문에 느끼는 상실감과 패배감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누군가 자신의 연구 분야를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곤란해 얼버무릴 말을 찾아야 하는 연구자가 되어버린 그. 인류의 편의를 위해 개발된 기술이 하루 아침에 인류에게 대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악의 축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그 책임을 고스란히 후대의 과학자들이 떠안게 된거죠. 대부분은 전공을 숨기고 혹은 버리고 다른 일을 찾는 상황에서 소타는 꽤 용감하고 소신있는 결정을 내립니다. 원자력 발전이 철수할 경우 요구되는 더 수준 높은 기술 개발을 위해 평생 원자력을 연구할 것을 결심합니다. 그것이 비록 배가 고프고 세상으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될지라도 말이죠. 그는 꽤 의젓한 말을 남깁니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 p. 420

원자력에 대한 비난만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꼭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원자력 발전소 운영을 중단한다 그것이 다가 아니니까요. 폐로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과 장치들의 개발이 선행되어야 후처리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또 원자력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해온 과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한 편으로는 그것이 과학에 몸담은 자들이 짊어져야할 십자가라는 생각도 합니다.

여러모로 생각할 게 많아지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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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이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2003년 나오키상 후보로 올랐지만 현실성 결여라는 이유로 낙선하자 작가는 나오키상과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걸작 미스터리 베스트 10' 에서 1위에 올랐고 영화화되어 2004년 일본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작가와 평론가 사이의 대립에서 대중이 작가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어떠한 면에선 젠체하는 문단에 한 방 먹인 것 같은 느낌에 통쾌하기도 합니다. 읽기 전부터 궁금증이 커지더군요.

책은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고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온화한 성품, 후진 양성에 힘써오던, 존경받는 경감 카지 소이치로가 자신의 아내를 목졸라 죽였노라 자수를 하게 됩니다. 이미 오래 전 백혈병으로 아들을 잃은 그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의 부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아이의 기일에 함께 무덤에 다녀왔지만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 하고 자책하던 그녀는 어머니로서 죽고 싶다며 그에게 죽여달라고 간청하게 되지요.

그의 자백이나 사건 정황으로 보건대 이 사건은 범인과 동기가 모두 명백합니다. 하지만 그를 신문한 시키 지도관과 담당 검사 사세는 다른 사실에 집중 합니다. 아내를 죽이고 자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이틀. 왜 이틀 뒤에 자수를 했으며, 그 이틀 사이에 무엇을 했는가에 초점을 두지요. 그의 성정과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가 아내를 죽인 뒤 자살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틀 뒤에 자수를 한 이유, 어떤 이유에서인지 바로 그 이틀에 대해 함구하는 것 자체가 미완의 자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 아내를 죽인 다음 날 그가 도쿄 방면의 기차를 타려던 모습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행방이 묘연한 이틀에 대한 기자들의 집요한 추궁이 이어집니다.

경찰은 그가 도쿄로 향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가 간 곳이 도쿄 최대의 환락가 가부키쵸 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무작정 덮으려 했던 것이지요. 존경받는 경감이 아내를 죽였다는 것만으로도 경찰의 위신이 서질 않는데 아내를 죽인 뒤 환락가에 갔다는 것은 도무지 공표할 수 없는 사실이었겠죠. 이 사라진 이틀을 눈치 챈 검사 사세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서지만 검찰과 경찰이 서로가 각자의 약점을 잡고 뒷거래를 하는 바람에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시키를 통해 카지가 50~51세에 자살을 감행할 것이다, 그의 사라진 이틀의 비밀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역시 진실을 파헤치는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소설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조직 간의 이권 다툼과 조직의 명예를 위해 진실을 덮으려고 애쓰는 기득권자들의 행태가 매우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조직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 조직에 반하는 자, 진실을 알면서도 조직에 순응하는 자.. 조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군상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나의 모습, 나아가 내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조직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고뇌와 자괴감에 공감하며 함께 분해하기도 하지요.

살인 사건에 관련된 경찰과 검찰, 교도관, 변호사, 판사 외에도 신문기자가 등장합니다. 나카오인데요, 그는 대졸 신입사원들과 달리 현장에서의 실무 경력를 인정받아 동양신문에 입사한 경력직 기자입니다. 용병이라며 자신을 무시한 상상의 뒷담화를 직접 들은 뒤 그는 더더욱 특종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의 기사가 카지에게 줄 영향력때문에 경찰과 다른 거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압박에 못 이겨 진실과 관련 된 기사를 쓰게 됩니다. 특종을 잡기위해 일각을 다투는 기자들의 생활이 박진감 넘치게 그려집니다. 아마도 작가가 신문기자로 일했던 경험이 고스란히 발휘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여러 조직이 그 진실을 밝히느냐, 은폐하느냐로 두뇌 싸움을 벌인 결과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 숨겨진 이틀 속에 굉장한 반전이나 거대한 음모가 있지도 않지요. 정말 이 치밀한 구성이 무색할 정도로, 결말은 우연한 인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럼 이렇게 숨가쁘게 달려왔는가, 처음부터 카지가 입만 열었어도 모두가 밥그릇 전쟁을 하진 않았을텐데 하는 허망함이 몰려오긴 하더군요. 단 몇 장만에 끝나버린 결말도 조금은 불만족스럽고요.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훈훈한 결말은 좋지만, 어째 이 소설과 어울리진 않는 결말 같은 씁쓸함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파헤치는 흥미진진한 과정과 사건에 관련된 많은 이들의 입장과 생각을 잘 표현한 수작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반전 추리 소설보다는 사회파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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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가사 크리스티가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6권의 소설 중 두 번째로 출간된 책입니다.
첫 번째 책 '봄에 나는 없었다'를 정말 재밌게, 충격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예약 주문했었네요.
역시나 아가사 크리스티 정말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책이었어요.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머니 앤과 그녀의 딸 세라입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홀로 세라를 키워 온 앤은 리처드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둘은 짧은 시간 내에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가 되죠.
하지만 3주간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던 세라가 돌아오고, 그녀에게 이 사실을 전하면서 세 사람 사이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세라와 앤 모두 당시에는 몰랐지만 세라는 엄마를 리처드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리처드가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그에게 싸움을 겁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은 날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가운데에서 힘들어 하던 앤은 사랑하는 리처드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 세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쪽을 택한거죠.

여기까지는 흔하디 흔한 드라마 내용입니다만, 바로 이 시점부터 아가사의 진가가 발휘됩니다.
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엄마의 심리 상태를 아주 절묘하게, 사실적으로 포작해 냈습니다.
여자로서의 삶을 박탈당한 앤의 상실감과 무력감, 그러한 선택을 강요하게 만든 딸에 대한 분노와 증오, 질투심 등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앤의 스타일이나 행동 변화, 거실 인테리어의 변화, 세라와 주고 받는 대화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긴장감과 무심함 등에서 여실히 드러나지요.
비록 앤과 세라는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망가뜨릴 때까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만약 리처드와 앤이 헤어지지 않았다면, 혹은 헤어진 뒤 세라와 앤 두 사람이 속 시원하게 싸우기라도 했다면 감정이 골이 그렇게까지 깊어지진 않았을텐데..
앤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 하고 묻어두려고 한 결과, 은연 중에 딸의 불행한 선택을 방관하고 조장했으며, 미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거죠.
미움으로 얼룩져 서로에 대한 애정 자체를 의심하고 위태로워진 모녀의 모습을 통해 가족 간의 갈등이 어떻게 심화될 수 있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해답까지도요.
깊은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그 시점에 서로가 솔직하게 마음을 끄집어 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해답입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가 서로를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과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또한 이 모녀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 간의 희생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내가 부모님 때문에 이러이러한 길을 갔는데, 내가 너 때문에 이러이러한 것을 포기 했는데..
이 말 속에는 너를 위한 희생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고 종국에는 가족 간의 불화와 불신을 불러오게 되지요.
책 속의 심리학자 데임 로라는 이를 굉장히 명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답니다.

희생의 의미가 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봐. 그건 따뜻하고 관대하고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겠다는 기분을 느끼는 영웅적인 한순간이 아니야. 가슴을 칼 앞에 내미는 희생은 쉬워. 왜냐하면 그런 건 거기서, 자기의 본모습보다 훌륭해지는 그 순간에 끝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희생은 나중까지 -온종일 그리고 매일매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 희생을 하려면 품이 아주 넉넉해야 하지. - p.252

정말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는지 아닌지 알고 싶다면 본인에게 분명하게 불어봐야 할 것 같아요.
회피하고픈 마음 혹은 불안감 때문에 포기한 것을 희생이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비참함이나 가족에 대한 원망 같은 마음은 아예 생겨나지 않을테니까요.

우리들이 곧 잘 잊어버리고 마는 사실이 있지요.
엄마도 여자라는 것..
굉장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여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엄마의 행동에 불편한 시선을 보내곤 하잖아요.
엄마라는 멍에를 씌우고 너무나 당연히 그녀들의 희생을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누군가의 엄마 또는 아내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한 여성일 뿐이었는데 말이죠.
저 역시 엄마와 보냈던 전쟁같았던 시기를 떠올려보게 되네요.
엄마가 여자라는 사실을 간단하게 제쳐놓고 저를 위한 희생을 요구하면서 상처만 준건 아닌지 부끄럽고 후회가 됩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엄마와 어떻게 보낼지 생각도 해보게 되고요.

같은 여성이기에 엄마와 딸이 경험할 밖에 없는 공감과 연대, 시기와 질투 등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적확하게 그려낸 이 작품을 많은 엄마와 딸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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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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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자 공감 만화 3종 세트의 작가 마스다 미리가 신작 '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책은 만화 에세이로서 그녀가 카도가와 학예 WEB 매거진에 연재한 글들과 그와 관련된 카툰을 엮은 것입니다. 그녀가 글들을 연재할 당시가 39세였던 만큼 40대를 받아들여야 하는 미혼 여성의 불안감, 씁쓸함, 두려움 등이 잘 담겨 있습니다.

어쩌면 여자들은 20세를 지나는 그 시점부터 나이라는 것에 대해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린 것이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인식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 하기도 하고요. 어린 여자들이 남성들의 배려와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모임의 주인공이 되는 바로 그 상황!! 안 겪어본 사람 없잖아요. 어느 연령대의 여성이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남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점점 감퇴한다고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꽤 우울해 하기도 하고 자신감을 잃기도 하고요. 그래서 40대를 바라보는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가 30대를 바라보는 20대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40대 아줌마의 고민이 아닌, 아직도 인기를 얻고 싶은 마음때문에 서글픔을 느끼는 40대 여자의 고민이니까요.


"한동안 못 본 사이 예뻐지셨네요?"
서른아홉 살이다. 이제 그런 말을 들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흔합 립 서비스. 그런데 나 자신도 깜짝 놀랄만큼 가슴이 떨렸다. - p. 34


그녀는 여자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멋진 말이나 드라마틱한 상황들로 포장된 이야기가 아닌 슈퍼마켓에서, 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공원에서 벌어지는 일상 생활의 작은 일들로부터 빚어지는 감정들을 포착해 내서 이야기 합니다. 어쩌면 '오늘 따라 왠지 모르게 꿀꿀하다' 라는 생각으로 영문도 모른 채 지나쳐 버린 그런 일들 말입니다. 소박하고 세심한 그녀의 관찰력과 표현력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소박한 소재로 부터 출발하여 여성들의 복잡 미묘한 심리를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로 써 내려간 진정성이 많은 여성 독자들로 하여금 나의 이야기와 같다라는 반가움과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몸에 걸칠 것을 고를 때, "좋다, 싫다",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다" 로 충분했던 청춘 시절.
"젊다, 젊지 않다" 라는 판단에 큰 비중을 두게 된 지금은 머리에 다는 작은 악세서리 조차,
'이 디자인 나이 제한 넘는거 아냐?'
자문하게 되는 쇼핑이다.
조금씩 몸에 걸치는 것들의 선택 범위가 좁아져 간다. - p. 44


그녀는 고교 시절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고교 시절 언제나 연애를 하고 싶었지만 수줍은(?) 성격 탓, 혹은 또래 친구들 보다 커서 남학생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 못했던 탓, 시끌벅적한 소녀 친구들 틈에 끼어 있었던 탓.. 등 여러가지 이유로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는 군요. 그래서 40대가 되어 버린 현재에도 고교 시절 청춘들의 연애에 대한 동경과 질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전히 관람차 안에서의 귀여운 첫키스를 동경하는 소녀같은 그녀. 그녀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반감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투덜대고 있지만 누구보다 어리고 풋풋한 감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온 인생의 무게만큼 그녀에게 더해진 연륜과 성숙한 느낌이 어우려져 유치한 동심이 아닌 정말 순수하고 매력적인 동심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요. 여전히 사랑스럽고 싱그러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게 되네요.

젊은 시절에는 집에 있을 때의 나, 친구와 있을 때의 나 두 개의 세께만 존재했지만 어른이 되면서 작은 세계를 여러개 갖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물론 진짜 나이에 마음이 쫓아갈 날은 아직도 요원해 보이지만 말입니다. 10년 후의 나 자신을 좀 더 자연스럽게,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보며, 문득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지 궁금해지네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나이를 믿을 수 없다.
마흔 살인 주제에 서른다섯 살 정도의 감각으로 지내니, 서른다섯 살인 사람과 얘기를 하다 보면, 멋대로 동급생 같이 느껴진다. 정말 뻔뻔스러운 이야기다.
다들 그런걸까?
언젠가 진짜 나이에 마음이 쫓아갈 날이 오긴 할까? 왠지 모르게, 평생 따라가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p.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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