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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930년부터 1956년까이 여섯 편의 장편 소설을 '메리 웨스트매콧' 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독자들을 혼동시키지 않기 위한 배려로, 50년 가까이 애거서의 뜻을 따라 이 비밀이 지켜졌다고 한다. 이 장편들은 여성의 고독, 사랑의 오만함과 잔인함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고 있으며 첫 번째로 추간 된 '봄에 나는 없었다' 는 애거서의 숨은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소설은 중년의 여인 조앤 스쿠다모어가 자기기만적인 삶을 깨닫고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녀는 비때문에 사막에 고립되어 -물론 시중을 들어주는 인도인이 고용된 숙소에 붙잡힌 것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평소와 달리 느긋하게 쉴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은 오래 가지 못 하고 불현듯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의심들, 부정적인 기억들 때문에 이내 혼란스러워진다. 자상하고 변호인으로서 성공한 남편 로드니, 반듯하고 품위있게 자란 애이버릴, 토니, 바바라, 세 아이들과 함께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누려왔다고 자신만만하게 살아온 그녀였다. 심지어 마을에 존재하는 천박하고 가난하고 품위 없는 여자들의 삶에 대해 비웃으며 자신의 삶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최고의 것들을 자식에게 주기 위해 그녀 자신은 절약하며 살았고, 가정에의 헌신을 위해 그녀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삶을 희생해온 것뿐이었다. 그것마저도 그녀는 자랑스러운 아내이자 부모였고, 올바른 가치를 실현한 고고한 여인의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사막의 뜨거운 햇볕과 아무도 없는 적막감은 그녀의 신경을 불안하고 날카롭게 만들며 온간 의심과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기차 여행 중 만난 블란치, 고등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 가족들의 언행들에서 자신이 지워버렸던 진실들, 고통을 피하고자 쌓아올린 자신의 기억들이 전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조앤은 강박성,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삶의 선택권을 박탈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 가족들이 그에 대한 좌절감과 거부감을 아무리 표현해도 그.녀.만. 알아듣질 못한다. 다른 이의 생각에 전혀 관심이 없고 관심을 가진다 한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다른 이들의 행복한 삶을 질투하면서 자신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 삶은 불쌍하고 불행한 것으로 단정지어 버린다. 그러한 방식으로 남들의 비루한 삶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 덕분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정말 최악인 여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도 어느 정도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SNS를 통해 다른 이들의 삶을 밀착적으로 관찰할 수 있으며 이는 자신의 삶과의 비교로 이어진다. 나와 남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잣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며 가쉽거리 삼아 이야기 하기도 하고, 다른이들과의 감정적 유대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자신에게 어떠한 문제점이나 단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고는 하지만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가 조앤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가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추잡한 마음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조앤이기 때문이다.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기억, 그와 함께 드러나는 진실들. 그녀가 분명히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가감히 지워버리고 다른 것으로 채워버린 상황들이 사실적으로 재구성 된다. 정말 상대방의 진심은 무엇이었는지, 그녀에게 해주었던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어떠한 의미였는지, 그녀 자신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비로소 진실들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특정인의 기억에 대한 나열, 회상들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독선과 기만으로 쌓아올린 그녀의 거짓된 인생이 극심한 자기 혐오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그 과정이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적이서 독자로 하여금 한 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내가 문자로 쓰여진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에서 조앤이라는 인물이 살아 움직이며 이야기 해주는, 그녀의 감정적인 혼란과 내적 갈등에 대해 듣고 있게 된다. 특별한 기승전결 없이 전개되는 것 같은 그녀의 내면 이야기가 독자들을 사로잡는 힘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춰왔던 부분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에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위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해 보이는 페르소나를 내세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게 되고 혼란스러워진다. 물론 우리도 자기 보호 본능에 따라 덜 상처받는 방향으로 기억하고, 좀 더 관대하게 내 자신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고요하고 적막한 밤, 혹은 홀로 남겨진 시간에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다른 사람에 비친 내가 과연 같은 사람인가, 나는 진정 어떠한 사람인가.. 와 같은 질문을 맞딱드리곤 한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며 느끼는 혼란스러움과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며 느끼는 낯설고 아픈 경험은 우리의 경험과 닮아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될 때의 그 당혹스러움과 부정하고 싶은 마음. 두 가지 마음이 서로 공존하며 뒤엉켜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소설이 더욱 현실적이고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결말 때문이다. 조앤은 사막이라는 낯선 곳에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고 진실을 마주한다.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변화를 다짐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을 만나자 마자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간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가사는 정말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진실을 알면서도 안전하게 느껴지는 테두리 안에서 결국 자기 기만을 택하고 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를 들킨 것 같아 아찔하고 등꼴이 오싹해진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녀의 실체를 확인시키는 남편 로드니의 독백을 통해 그녀의 어떤 추리소설보다 섬뜩한 반전을 경험케 한다.
당신은 외톨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 -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