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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평점 :
마쓰모토 세이초는 '세이초 월드'라고 불리울 만큼 40년 동안에 쓴 장편이 100편, 중단편 등을 포함한 편수로는 거의 1000편, 단행본으로는 7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써낸 작가이다. 많이 썼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양이며 끊임없는 자기공부와 불굴의 정신력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추리소설에서 논픽션까지 다양한 창작 세계를 무한히 확장해 왔다. 그는 오늘날 일본 미스터리 소설 작가들의 문학적 뿌리이자 영원한 스승으로 존경받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이다.
이 소설 역시 트릭이나 범죄 자체에 매달리기보다는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드러내서 인간성의 문제를 파고든다. 특히 이 소설이 1980년대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뛰어 넘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개인이 자기 표현을 위해서 하는 행동을 사회는 어느 선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는 개인이 자기 표현을 위해 공동체에 해를 끼지는 행동을 제지할 논리를 가질 수 없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야마가 교스케라는 인물을 통해 제기 된다. 아마추어 보도 카메라맨인 그는 도메이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6중 추돌사고를 찍어 A 신문사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보도 사진 공모전에 응모한다. 바로 이 사진이 연간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격돌' 이다. 사고 당시 맨 앞에서 달리던 대형 탑차 트럭이 커브를 도는 지점에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전복되고, 뒤이어 따라오던 3대의 차들이 충돌하여 화재를 일으켰으며, 다른 한 차는 이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맞은편 차선으로 뛰어들어 마주오는 차와 충돌하여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6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중상을 입게 되었다. 야마가 교스케는 멀리서 이 장면을 바라보고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무심결에 셔터를 누른다. 그 결과 야마가 교스케는 교통 사고의 끔직함을 박력있게 담아내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에 몸서리를 치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진 한 장은 예상 밖의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사고가 난 시점에서 구호 활동을 하지 않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는 비판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사진이 프로 카메라맨이 아닌 아마추어에 의해 찍혀진 사진이라는 점, 상금과 함께 주어지는 연간 최고상이라는 영예가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이기심과 방관주의적 태도를 조장한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된다. 물론 이에 반하여, 이 순간은 10만분의 1의 확률로 포착된 것으로 이 우연성 덕분에 박력 넘치는 사진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것이 운전자들의 경계심을 다잡게 해준다는 의견과 극찬 또한 제기된다. 이 과정 중 경찰이 전복된 탑차 전방에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고, 사고로 처리하면서 논쟁 또한 사그라든다.
하지만 이 사건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을 감지한 피해자 유족 중 한 명인 누마이 쇼헤이는 사건 현장을 둘러보다가 사진이 촬영된 지점에서 몇가지 단서를 발견한다. 쇼헤이는 단서들을 통하여 교통 사고가 계획적으로 발생되도록 누군가가 트릭을 썼음을 알게 되고, 사진을 찍은 야마가 교스케를 의심하게 된다. 그는 정체를 숨기고 범행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야마가에게 접근하고 야마가 역시 누마이가 유족임을 의심하게 되면서 추적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캐내려 한다. 두 사람 사이의 이 '격돌' 이 소설의 백미인 듯 싶다. 서로가 쫓고 쫓기며 진실 공방을 펼치기 위해 각자의 패를 준비하는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특히 야마가가 우연이라는 돌멩이가 난데없이 날아든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누마이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할 때가 참 아이러니하다. 10만 분의 일의 우연을 만난 그임에도 불구하고 누마이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접근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가 아닌가로 우연에 의혹을 품는 모습은 심리적 긴장감을 더한다. 어둠과 적막감에 휩쌓인 대략 15미터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답변은 차분하지만 긴박감을 느끼게 만든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는 스마트폰과 같은 최첨단 기기를 이용하여 언제, 어디서나 각종 사고와 재난의 현장을 찍어 실시간으로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저널리스트, 보도 카메라맨이 아닌 일반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기회만 되면 '보도'를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공명심과 영예욕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미야베 여사의 말을 밀리자면 쉽게 '자기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어 누구나 균등하게 선택을 강요당하게 된다.
'양자택일을 해야할 경우 보도와 인명 중에 당신은 어느 쪽을 우선하겠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란 쉽지 않다. 막상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인명을 구조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보다 방관하며 "어떡해~"를 외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현실 아닌가. 그 와중에 좀 더 자기 표현의 욕구가 강한 자가 동영상이나 사진 촬영을 통해 정보 전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뛰어난 자기 표현이 얼마나 위력적인 것인지 그 가치는 사회를 통해 시시각각 증명되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도 일어나기를 갈망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이전에 자신의 욕구 역시 그와 닿아있지 않은지 먼저 살펴봐야할 일이다. 오히려 다분히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이 사회에서 그러한 기회를 만들어 유명세를 얻으려는 사람이 없음에 감사해야할지도 모른다. 또한 나서지 않고 지켜보는 자들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자 어느 쪽도 양심을 잃어버린 비정한 인간, 이기적인 인간으로 몰아 극단적인 비난을 하긴 어렵다. 그저 양측 모두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리에 머물러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약한 인간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그러한 방관자적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제 이 명제는 저널리스트만의 난제가 아니다. 보도냐, 인명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