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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독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사는 한, 거기에는 반드시 독이 스며든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바로 독이기 때문에. -p. 526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주제는 '독' 에 관한 이야기이다. 살인에 쓰이는 독, 인간이 마음에 품은 독, 자연이- 특히 땅- 품은 독, 이렇게 세 가지의 독이 주요한 골자를 이룬다. 언뜻 보면 한 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 미미여사답게 이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볍게 증명한다. 추리소설이 특유의 긴장감이나 범인과의 숨막히는 두뇌싸움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스기무라' 라는 사람의 일생 중 어느 한 부분을 잘라 그 안을 편안하게 들여다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만큼 이 주인공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독에 관련된 일들이 자연스럽게 연계되어 있다. 산만하다는 느낌없이 조직적이고 개연성 있게 전개된다.
다만 쫀득쫀득한 느낌의 스릴 넘치는 소설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실망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이 사람의 일상은 너무나 평범하고 평화롭다. 심지어 가끔 장인어른과의 대화나 집에 관한 묘사를 제외하면 재벌가의 막내딸과 결혼했다는 -일명 땡잡았다!!- 느낌마저 들지 않는다. 그냥 지나치게 행복에 겨운 평범한 샐러리맨의 삶 그 자체랄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고, 느릿하게 흘러가는 직장 생활, 매사에 사려깊고 배려넘치는 성격까지.. 오히려 특징이 너무 없다보니 되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이다. 회사와 가정에 찌들지 않은데다가 욕심이나 야망도 없고, 온화하고 선하기까지한 성품을 지녔으니. 스기무라에 대한 외양 묘사는 전혀 나오질 않는데 어쩐지 반듯한 훈남 느낌으로 생겼을 것 같다. 지나칠 정도로 이 사람의 인생에 흠잡을 점이 없다. 오히려 너무 평온한 그의 삶이 이질감을 불러 일으키고 질투가 나기도 한다. 이런 사람 옆에 있다 보면 아둥바둥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나같은 사람은 얼마나 초라해 보일지.. 성격이라도 안 좋으면 위안이라도 삼겠는데 그도 아니니 성질도 못 부리고 여러모로 답답한 지인이 될 것 같다. 한이 많고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이 옆에 있다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이 사람을 향한 독이 스며들어 언제 어떻게 발산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본인은 자각을 못 하지만 이 사람 주변에 '독' 과 관련된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인 '스기무라' 는 탐정도 아니거니와 하물며 저널리스트도 아니기 때문에 사건 해결에 접근해 가는 방식이 흥미진진하진 않다. 우연과 인연들 덕분에 정보를 모으고 그의 감이나 상상력(?) 덕분에 조금씩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범인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박진감 같은 것은 없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그만큼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심리나 삶을 대하는 자세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학교에서, 혹은 회사에서, 동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그대로 책 속의 인물로 변모해 있다. 그래서 책을 손에서 놓기가 쉽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범인의 정체가 궁금해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것보단 독을 품었던 사람들의 결말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독은 어떠한 모습으로 해소되었을까, 만약 그 독이 해소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떠한 마음으로 다시 제 삶으로 돌아갔을까? 더불어 좋.은.사.람.으로만 보이는 스기무라 역시 독을 품고 있을진대, 과연 그것이 무엇일지 더 분명하게 알고 싶어진다. 이 또한 세상에 찌든 나와 그 사이의 기시감때문에 솟아난 질투이자 또 다른 독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으며 나는 어떠한 사람의 모습인지, 나는 어떠한 독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추해보게 된다. 내가 품고 있는 독의 이름이 궁금하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막연한 공포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다루어야 그 독이 나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더 이상 뿜어나오지 않게 고민해볼 수 있을테니까.
어차피 남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니까. 그렇다: 우리는 그런 인간을 가리켜 `권력자` 라고 부른다. -p. 306
이렇게 복잡하고 번거로운 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도 없이, 때로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거나 함께 사는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적어도 새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제대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훌룡하죠. (......) 그렇게 살 수 있다면 훌륭한 사람이죠. `보통` 이란 요즘 세상에선 `살기 힘들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와 동의어입니다. -p. 396
불행이란 대개의 경우 그런 거죠. 이쪽을 바로 세우려 들면 저쪽이 기울어지는 식으로 서로 엇갈려 있죠. 마치 헝클어져 풀리지 않는 실처럼. -p.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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