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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여러모로 제목이 맘에 든다. 입으로 소란한 보통날이라고 반복해서 읇조려보면 묘하게 마음이 일렁인다. 보통날임에도 무언가 소소하지만 특별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설레임! 다른 이에겐 별거 없이 똑같이 흘러가는 어제와 같은 하루지만 나에게만은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런 일상 말이다. 언젠가부터 여느 사람들의 일상을 잃어버린 나에겐 특히나 가슴 저미게 다가오는 말이다. 뭐 다른 사람들이라고 유별난 일상을 보내겠냐만은, 내가 부러운 것은 그냥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 일 자체가 그렇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퇴근해서 한 시간이라도 티비를 보거나 책을 읽고, 아침을 함께 먹을 가족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에겐 주말도, 여유도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정말 와닿았다. 소란한 보통날은 어떤 날인가, 이런 행복을 누리는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 책 속에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독특하다면 독특하다할 그런 가족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어쩐지 고즈넉한 곳에 위치한 것 같은 아담한 이층 주택 안에는 아빠, 엄마, (애정결핍과 폭식증 증세를 가진) 다소 걱정스러운 둘째 언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직 상태인 나, 여고생 혹은 미망인 프라모델을 만드는 중학생 남동생, (곧 집으로 돌아오게 될) 시집 간 첫째언니가 살고 있다.이 보통의 가족에게는 버스에 탔을 때는 서로 남인 것처럼 행동하기, 누군가의 입학식에는 다같이 가족사진 찍기, 12월 첫째 토요일엔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기 등 재미난 룰들이 정해져 있다.
가족들은 수시로 티타임이나 식사 시간을 통해 대화를 나눈다. 모두가 모이진 않더라도 하나 둘 이상씩은 꼭 모여 매일 이야기를 나눈다. 나름의 대가족이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행간에 느껴지는 대화 사이의 침묵 또한 그들에게는 자연스럽다.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함이 있달까?! 대부분이 신변잡기적이고 일상적인 대화로 이루어진 것 같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충만하다. 설령 가족 모두가 알고 있더라도 누군가의 고민이나 비밀은 본인이 먼저 말하기 전에는 모르는 척 해주고 말이다. 가족 간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사적 영역의 선을 정확하게 지키면서도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잘 소통해 나가는 것이 부럽다. 부모님의 권위를 이용하여 절대 다그치거나 캐묻는 법이 없다.
이런 부분들이 다소 한국의 현실적인 가족상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일단 자식의 사생활 보호라는 것 자체가 생소할 뿐만아니라 가족 간의 대화의 단절, 소통의 부재 자체가 큰 문제다. 요새 부모님들 치고 자식이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꼴을 차분히 지켜보실 분이 얼마나 계실까. 대학은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이고, 꿈과 상관없이 어떠한 일이든 -대기업이나 공무원이면 완전 좋고- 밥벌이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니 말이다. 딸의 갑작스런 이혼이라든가, 별스런 취미, 혹은 미혼모 문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아직 우리 나라에서 가족 간에 이 정도의 관용과 이해는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이 더 따스하게 다사오고,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미래의 롤모델로 삼고 싶다. 언제나 대화하고 싶은 열린 부모가 되고 싶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형제 자매를 많이 만들어 주고 싶다. 요새 같은 불황에 정말 꿈같은 이야기지만 ^_^;;
너무나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 치이고 정신없게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는 꿈꾸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고요한 밤 잠자기 직전 펼쳐들기 딱 좋은 책이다. 읽다가 중간에 잠이 들어 앞의 내용을 잊어도 괜찮다. 늘 새로운 마음으로 조용하게 흘러가는 일상에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소란한 날이 생긴 것처럼 기분 좋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어쩌면 읽던 책을 덥고 책 속의 '나' 처럼 밤산책을 나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밤의 적막과 아늑함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하여.
문득 정말 별 것도 아닌 걸로도 한 권의 소설이 쓰여질 수도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적이면서도 안락한 그 느낌. 그 만큼 에쿠니 가오리의 필력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밤의 전철은 참 아름답다. 환하고 따뜻해 보인다. 플랫폼을 올려다보다가, 나는 황홀감에 젖는다. 분수에서 울리는 낮은 물소리, 역내 방송과 발차를 알리는 부드러운 벨 소리, 바람 소리,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나는 안심하고서, 그대로 잠들어버릴 것처럼 노곤해진다.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자, 껌 종이가 손가락에 닿았다. 12시 45분에 떠나는 마지막 전철을 보내고, 사람들의 흐름이 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일어섰다. 폐 안에 듬뿍 밤을 들이쉰 나는 기운이 넘친다. 산책을 하면 늘 그렇다. -p. 53
때로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에 대해, 그동안에 생기는 일과 생기지 않는 일에 대해, 갈 장소와 가지 않을 장소에 대해 그리고 지금 있는 장소에 대해. 대개는 낮에 인생을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날씨가 좋은 낮. 싸늘한 부엌에서. 전철 안에서. 교실에서. 아빠를 따라간 탓에 혼자서만 심심한 책방에서. 그런 때, 내게 인생은 비스코에 그려진 오동통한 남자애의 발그레한 얼글처럼 미지의 세계이며 친근한 것이었다. 내 인생. 아빠 것도 엄마 것도 언니들 것도 아닌, 나만의 인생.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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