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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6월
평점 :
🌟 이 책은 #아티초크 @artichokehouse 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억의 유령> - 기억이 말을 걸어올 때📌 책 소개한 작가의 생전 인터뷰와, 그를 둘러싼 평론가들의 기록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완성된다면, 그는 분명 쉬이 정의되지 않는 인물일 것이다.<기억의 유령> 은 제발트가 생전에 남긴 말들과 그를 지켜본 시선들을 한데 묶은 책이다.독일 현대사를 관통한 한 인간의 기억은,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오가며 독특한 서사를 만든다.그의 글쓰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다른 풍경이 나온다.그는 자신이 개처럼 글을 쓴다고 했다.냄새를 좇고, 방향 없이 돌아다니다가, 결국엔 정확히 찾아낸다고.작가의 일생과 창작의 윤리가 동시에 오가는 이 책은, 살아 있는 한 인간의 ‘말’ 이 어떻게 하나의 세계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준다.💬서평💡개처럼 쓰는 법제발트는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설명할 때, 좌표가 아닌 후각을 좇는 개를 떠올린다.그러니까 어디로 갈지 미리 정해두지 않고, 순간순간 코끝에 걸리는 냄새를 따라간다는 것이다.이 설명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어떤 인터뷰는 시작하자마자 옆길로 샌다.질문과 무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금세 다른 시점으로 이동한다.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그가 말한 ‘개’ 라는 존재는 사실 기억을 더듬는 자의 비유처럼 읽힌다.확실하지 않지만 잊히지도 않는 무엇, 코끝에서 어른거리는 그 불분명한 실체를 좇는 과정.제발트는 기억이라는 정거장 없는 여정을 그 특유의 방식으로 좇아간다.💡산 자의 언어, 죽은 자의 이야기기억을 다루는 작가들이 많지만, 이처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간격에 집중하는 작가는 드물다.그는 조국을 떠나게 된 이유부터, 죽은 교사의 이야기, 집단 망각에 대한 비판까지 끊임없이 ‘떠나간 것들’ 에 대해 말한다.하지만 그 말은 늘 조심스럽고, 말하자면 일상의 대화에 섞여 있는 듯하다.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그 일’ 이 있었음을 인정한다.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이 책의 이면에 흐르고 있고, 그는 어떤 확신도 갖지 않는다.다만, 기록한다. 그리고 말한다.그렇게나마 간격을 좁히고자 한다.이것은 문학의 언어로 다시 말해보는 애도이자, 동시에 저항이다.💡“모호한 것을 쓰되, 모호하게 쓰지 마라”이 문장은 제발트가 한 강연에서 남긴 말이다.모호한 것은 언제나 글이 되는 출발점이 되지만, 그 문장마저 모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이 책 곳곳에서 그는 ‘어떻게 쓸 것인가’ 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말한다.그에 따르면 글은 무엇보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 이다.미사여구로 덮는 글이 아니라, 선명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을 선명하게 끄집어내는 글.그런 글을 위해 그는 소설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물었고, ‘산문 픽션’ 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글쓰기를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일종의 ‘작법서’ 로 읽어도 좋다.다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충고한다.“아무도 믿지 마라. 특히 교수들은 치명적이다.”💡누구의 이야기인가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에피소드 중 하나는, 제발트가 타인의 이야기를 글로 쓸 때 반드시 허락을 구한다는 대목이다.그는 사실을 각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허락이 없으면 글을 빼버린다고 말한다.작가가 타인의 고통을 다룰 때 취해야 할 윤리가 무엇인지를 아주 담백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그건 ‘이야기 주인의 승인’ 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태도에 가깝다.이 책에는 그가 경험하고, 듣고, 잊지 못한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그것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어디까지가 자신의 목소리고, 어디서부터 남의 말인지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그 구조가 제발트식 글쓰기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