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뇌
마수드 후사인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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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까치 @kachibooks 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웃사이더> -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 책 소개


우리는 종종 몸이 아픈 사람보다 마음이나 인지에 이상이 생긴 사람을 더 두려워한다.

익숙했던 사람이 낯설게 변하는 것, 즉 자아의 변화는 단순한 병의 문제가 아니다.

뇌질환은 사람을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바꿔놓을 수 있다.

이 책은 자아와 정체성이 뇌 기능에 얼마나 의존적인지, 그 뇌가 변했을 때 삶과 관계, 소속감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환자들의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7명의 환자가 겪은 뇌 손상과 그로 인해 일어난 인지·행동의 변화는 의학적 정보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억을 잃고 타인을 의심하게 되거나, 손발의 위치를 인지하지 못해 일상을 망가뜨리는 사람들, 혹은 환시 때문에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사례 등은 인간의 ‘나다움’ 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아란 견고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사회와 감각과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곱씹게 한다.


💬서평


💡나를 ‘나’ 라고 여기는 기준


기억은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기억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도, 자아가 유지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등장하는 한 환자는 자신이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은 기억 장애 때문에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 뿐이다.

자아의 인식은 단순한 정보 보관이 아니라, 그 정보를 현재의 맥락에 맞게 재해석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또 다른 환자는 자신의 손과 발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평범한 일상 동작이 무너진다.

뇌가 우리 몸의 상태를 추적하고 조율하지 못하면, 나라는 사람은 행동 하나조차 책임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나는 나의 몸, 기억, 감각, 주변과의 관계 등으로 구성된 복잡한 종합체이고, 그중 어느 하나만 어긋나도 자아의 감각은 쉽게 흔들린다.

뇌는 단지 장기가 아니라, ‘나’ 를 가능하게 하는 무대다.


💡사회적 자아와 배제의 두려움


많은 환자들이 고통받은 건 단지 인지 장애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질환이 그들을 사회에서 밀어낸 순간부터 더 큰 고통이 시작된다.

어떤 환자는 환시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기고, 자신이 ‘기피 대상’ 이 되었다는 자각에 괴로워한다.

그는 더 이상 이전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데 뇌가 오작동하면서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되면, 집단은 그 사람을 아웃사이더로 밀어낸다.

고립은 질환의 결과이자 동시에 원인이기도 하다.

정체성이란 것은 사회 속 역할, 기대, 소통으로 이루어진다.

뇌가 무너지면, 정체성도 무너지고, 정체성이 무너지면 사회적 자리도 위태로워진다.

이 악순환은 결국 정체성의 상당 부분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자아를 견고하고 고유한 것으로 상정한다.

하지만 환자들의 사례는 그 자아가 뇌 기능에 따라 얼마나 유동적인지를 보여준다.

뇌의 특정 부위에 손상이 생기자, 같은 사람이 완전히 다른 행동을 보인다.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부적절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뇌가 그렇게 반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문제는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저 사람은 이상해졌어” 라고 단순화해 버리면, 우리는 자아의 복잡성을 놓치게 된다.

오히려 자아란 뇌의 다양한 기능들이 일정하게 작동할 때만 유지되는 섬세한 균형 위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조차도 상황이 달라지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아는 흐르는 개념이다.


💡경계선에 선 이들, 그리고 우리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이 ‘남’ 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사고, 병, 노화로 인해 그 경계선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뇌 기능 저하를 겪는다.

자아는 나만의 것이지만, 동시에 환경과 사회적 피드백을 통해 강화된다.

그런 점에서 경계선에 선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뇌의 구조와 기능은 과학의 영역이지만, 그로 인해 바뀌는 삶과 관계는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자아는 뇌의 작동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 자아를 우리가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는 결국 타인과의 관계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경계선에 선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 모두가 어떤 존재로 살고 싶은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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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준에 물리다 - 양자역학에서 스파이더맨까지 물리가 쉬워지는 마법 같은 과학책!
김범준 지음 / 알파미디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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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채성모의손에잡히는독서 @chae_seongmo 를 통해 알파미디어 @alpha_media_books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범준에 물리다> - 물리학은 사소한 질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 책 소개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 커뮤니케이터 김범준은 일상의 궁금증을 물리학으로 풀어낸다.
상상에 가까운 질문, 농담처럼 시작한 호기심을 물리학의 언어로 차분히 설명한다.
전자레인지에 사람이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앤트맨처럼 작아지는 건 가능한지, 영구기관은 왜 실현될 수 없는지 같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따져본다.
학문적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일상의 언어로 과학의 원리를 연결한다.
과학이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서평

💡농담에서 출발한 질문이 과학을 만든다

“전자레인지에 사람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봤지만 대놓고 말하긴 민망한 질문이다.
과학자는 이 농담 같은 질문을 웃어넘기지 않는다.
전자기파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수분이 많은 근육 조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바깥쪽 1cm 피부가 먼저 익는 이유는 전자기파의 침투 깊이 때문이다.
피부 속 수분이 스스로 운동하며 발생시키는 열 때문에 ‘안에서부터’ 화상이 생긴다.
누구나 던질 수 있는 가벼운 상상을, 과학은 논리로 붙잡는다.
물리학의 출발점이 되는 질문은 언제나 실생활 가까이에 있다.
무해해 보이는 호기심이 과학에 닿으면, 진지한 탐구로 바뀌는 것이다.
과학의 문턱은 높지 않다.
다만 그것을 넘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는 마음

세상엔 물리 법칙을 모른다기보다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운동화만 신고 하늘을 날 수 있다거나, 에너지를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은 논리보다 신념을 따른다.
과학은 감정을 설득하진 않는 대신 원리로 설명한다.
유체역학, 고전역학, 열역학 법칙이 왜 그런 꿈을 불가능하게 만드는지를 천천히 짚는다.
제1종 영구기관은 들어간 에너지보다 더 많은 출력을 내야 하는데, 그것은 자연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원리를 설명해도 사람들은 “아니야, 내가 잘 만들면 돼” 라고 말한다.
과학이 답을 내놓아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 고집을 두고, 저자는 웃기보다 말린다.
말리는 방식이 딱딱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의 매력이 드러난다.
과학은 고지식한 학문이 아니라, 냉정하면서도 유연한 사고방식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상상은 자유지만 현실은 원리를 따른다

앤트맨은 과학적 상상에서 출발한다.
원자가 대부분 빈 공간이니, 전자를 원자핵 쪽으로 가까이 당기면 원자의 부피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물음은 얼핏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전자기력이 수천만 배 이상 강해져야 그 변화가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우주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별도, 행성도, 인간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영화의 상상력은 흥미롭지만, 물리학자에게는 그것이 왜 현실에서 성립하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상상은 언제나 자유지만, 현실은 원리를 따라야 한다.
물리학은 상상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설정을 과학적 언어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현실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시선을 얻게 된다.
과학이 엉뚱한 상상을 무력화시키는 게 아니라, 진짜로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게 해주는 이유다.

💡시간은 흐른다, 엔트로피처럼

커피는 식고, 방은 어지러워지고, 질서는 흐트러진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세상은 항상 더 어수선한 방향으로 향한다.
엔트로피는 바로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집중에서 분산으로 향하는 방향.
아인슈타인조차 ‘절대 흔들리지 않는 법칙’ 이라 했던 이 개념은, 과학에서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는 가장 명료한 틀이다.
잉크 방울이 물속에 퍼지는 현상처럼, 엔트로피는 거스를 수 없는 방향이다.
고립된 시스템에서 시간은 곧 엔트로피의 증가와 같다.
과학은 이를 통해 변화의 방향을 설명한다.
단순한 정리 정돈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시스템이 에너지를 소비하며 무질서로 나아가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그걸 거꾸로 되돌리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그 흐름 속에서 질서는 자연스럽게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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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외 입양인입니다
미샤 블록 지음, 유동익 옮김, 차용 감수 / 이더레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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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채성모의손에잡히는독서 @chae_seongmo 를 통해 이더레인 @iedereen20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해외 입양인입니다> - 사라진 이름을 찾아서

📌 책 소개

한국에서 태어나 네덜란드로 입양된 저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 없이 다른 이름과 다른 언어로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어릴 적 고아원 앞에서 찍힌 흑백사진 한 장 외에는 자신의 과거를 설명해줄 수 있는 단서가 없다.
성인이 된 후 그는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을 오가며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입양기관의 조작된 서류와 연락을 거부하는 생부, 그리고 자신에게조차 감춰졌던 과거였다.
그는 점차 입양의 구조적 문제와 마주하고, 개인의 삶이 어떻게 기록되고 지워지는지를 추적해간다.

💬서평

💡출발선 없는 삶

인생의 시작을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기억은 완전히 달라진다.
세 살 이전의 사진 한 장, 그것이 누군가의 유년을 대신하는 유일한 자료라면, 출발선조차 애매한 인생이 시작되는 셈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름, 출생지, 보호자 정보를 모두 타인의 손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로 구성된, 왜곡된 기록들이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지만, 출발점이 명확하지 않기에 자꾸만 길을 잃는다.
누군가는 입양을 새로운 시작이라 포장하지만, 그 ‘새로움’ 은 너무 많은 것을 생략한 결과다.
시작점을 모르는 삶은 결국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든다.

💡버려졌다는 감각

누군가에게 버려졌다는 감정은 막연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일상에 스며든다.
저자는 항상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했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잘하려고 애쓰고, 관계에서 손해 보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려 한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버려질 수도 있다’ 는 전제를 품은 삶에서 비롯된다.
아이가 한 번 외면당하면, 이후의 관계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진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를 먼저 배려하고, 불편함을 참고, 이탈보다는 잔류를 선택하게 된다.
버려졌다는 경험은 관계의 기준을 변화시킨다.
타인에게 맞춰 살아가는 것이 습관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존재의 조작

입양기관은 저자를 ‘부모 미상의 유기아동’ 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모 중 한 명이 직접 아이를 입양기관에 데려갔고, 서류에는 거짓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 조작은 한 인간의 정체성과 과거를 근거 없이 왜곡하고 지워버린, 구조적 침묵이다.
저자는 친어머니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채로 수십 년을 살아야 했고, 그 정보 하나를 얻기 위해 여러 번 한국을 방문하고 라디오 방송까지 나서야 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틀 안에서 살아온 시간은, 정체성을 구성할 기본적인 정보조차 없는 불완전한 기록에 불과했다.
한 인간의 삶이 행정 편의를 위해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이라는 게 문제다.

💡재회는 끝이 아니다

기적처럼 친모를 찾는다.
TV 속 재회 장면처럼 뜨겁게 껴안고 눈물을 흘리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서로를 찾기까지의 과정은 극적이지만, 이후엔 낯섦과 시간이 쌓인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살아왔고, 저자 역시 새로운 문화권에서 자라왔다.
재회는 단절된 과거를 되돌려주는 게 아니라, 그 사이의 공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재회를 통해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그 감정은 단숨에 정리되지 않는다.
회복은 만남으로 완성되지 않고, 이후의 관계에서 천천히 조율된다.
애초에 재회가 해답이라고 믿었던 생각 자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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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동물 열전 - 최애, 극혐, 짠내를 오가는 한국 야생의 생존 고수들
곽재식 지음 / 다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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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다른 @darunpublishers 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팔도 동물 열전> - 도심에 나타난 야생,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

📌 책 소개

야생은 텔레비전 속 다큐멘터리나 멀리 떨어진 국립공원에만 있는 게 아니다.
도심을 걷다 마주치는 고라니, 동네 뒷산의 너구리, 전설처럼 남은 여우까지!
실은 우리가 사는 곳이 곧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과학자이자 소설가인 저자는 한국의 산과 들을 직접 발로 누비며 야생동물들의 생태, 역사적 기록, 민속 속 상징성을 엮는다.
고구려 설화부터 박쥐의 드라큘라 이미지까지, 동물들의 생존 전략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기록이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심히 지나쳤던 존재들을 재조명하며, 인간과 함께한 수천 년의 공존과 충돌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이야기는 과학적 사실 위에 상상력과 문화적 맥락을 덧붙이며, 도시의 일상과 야생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서평

💡야생동물은 지금 여기 있다

어느새 도심은 고라니와 멧돼지의 무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놀라지만, 그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
변화한 건 그들의 서식지가 아니라 인간의 공간 침범이다.
익숙해진 환경 속에서 우리는 야생을 잊는다.
하지만 숲과 산은 여전히 살아 있다.
고라니는 논두렁을 건너고, 너구리는 담장을 넘는다.
문제는 그들의 출현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낯설게 여긴다는 데 있다.
생존 전략을 바꿔가며 적응해온 그들에게 위협이 된 건 인간이다.
인간 중심의 도시 구조는 동물들의 삶을 방해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다시 도시로 향한다.
환경을 선택하지 못하는 존재는 침입자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시민이다.
야생은 자연 속에만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도 있다.

💡이름에 새겨진 오해와 역할

청설모와 다람쥐의 혼동은 단순한 외형 문제 이상이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름조차 혼동한다.
여우는 교활하다는 이유로 미움받았고, 담비는 잊힌 존재였다.
반면 곰은 귀엽고 강하다는 이미지 덕에 보호받는다.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이 동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귀엽거나 상징성이 있으면 보존되고, 불쾌하거나 해롭다고 여겨지면 사라진다.
이름은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편견을 고착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이 누군가의 무관심 탓이라면, 그 무관심은 대부분 이름에서 비롯된다.
동물의 운명은 그들의 생태보다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의미에 달려 있다.

💡생존은 전략이자 선택의 문제

돼지의 심장이 인간의 목숨을 구하고, 담비는 무리를 지어 사냥한다.
한국 너구리는 겨울잠을 자지 않고, 청설모는 남향에 다주택을 짓는다.
이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생존을 위한 전략이자, 환경에 맞춘 적응이다.
인간이 과학으로 분석한 이 생태는 사실 놀라운 직관과 선택의 결과다.
땅 위에서, 나무 위에서, 밤과 낮을 나눠 살아가는 동물들은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이상해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최적화된 방식이다.
생존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끊임없는 조정과 판단이다.
그 안에는 고단한 진화의 역사가 담겨 있고, 인간과의 오랜 상호작용도 포함되어 있다.
적응력은 경쟁력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태도다.

💡보호라는 이름의 정치

멸종위기종 보호 정책에는 언제나 여론이 필요하다.
국민이 관심을 가져야 예산도 생긴다.
그래서 반달곰은 살아남았고, 여우는 한동안 잊혔다.
정책의 기준은 과학적 절박성보다는 대중의 공감대다.
자연보호는 생태 문제이기 이전에 사회적 문제다.
누가 주목받는가에 따라 보호받는 생명도 달라진다.
황금박쥐는 그 희소성과 이름 덕에 이야기로 남았지만, 평범한 벌레의 절멸에는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생태계는 균형의 문제지만, 인간 사회는 선택의 문제다.
자연을 지키는 일도 결국은 정치다.
이미지, 스토리, 관심도 모두 동물 보호의 전략 요소가 된다.

공감할 수 있어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은 야생조차 선택받아야 살아남는 시대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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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살인
카라 헌터 지음, 장선하 옮김 / 청미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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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청미래 @cheongmirae 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족 살인> - 진실은 누가 조작하고, 누가 소비하는가

📌 책 소개

20년 전 일어난 미제 가족 살인 사건을 소재로, 전 세계로 방영되는 리얼크라임 쇼의 제작 현장이 펼쳐진다.
방송 연출자는 피해자의 의붓아들.
전문가 패널로 참여한 인물들은 ‘강력 용의자’ 라는 꼬리표를 단 인물들이다.
시청률 경쟁에 따라 점점 자극적으로 흐르는 연출, 제작진 내부의 긴장, 감춰진 가족사, 그리고 결정적인 진실을 둘러싼 충돌까지.
방송이 추구하는 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가면을 쓴 복수인지 묻는 이야기가 촘촘하게 구성된다.
사건은 과거의 것이지만, 그에 접근하는 방식은 현재의 미디어 논리 위에 있다.
방송 대본, 기사, 댓글, 인터뷰 등으로 서술이 구성되어 독자는 쇼의 시청자이자 사건의 관찰자이자, 때로는 배심원이 되기도 한다.

💬서평

💡진실을 좇는다는 명목 아래

누군가의 죽음을 파헤치는 쇼는 정의보다 흥밋거리를 추구한다.
사건의 중심은 20년 전 살인사건, 그러나 쇼의 포맷은 그것을 미스터리 퀴즈처럼 만든다.
각본과 연출이 있고, 출연자는 자신이 피해자든 전문가든 '콘텐츠' 로 편집된다.
의붓아들은 피해자의 가족이자 연출자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그는 자신의 진심이 조작되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카메라의 앵글은 그마저 흡수한다.
과거의 진실보다 지금의 화면 구성이 더 우선이 되는 순간들.
그렇게 진실은 말해지기보다 소비된다.
쇼는 점점 진행되지만, 누구도 온전히 안전하지 않다.
타인의 과거를 다룬다는 건 누군가의 아픔을 무대 위로 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쇼

쇼에는 심리학자, 전직 경찰, 법의학자까지 출연한다.
그들은 이 사건의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불린다.
그러나 방송의 목적은 수사라기보다 '서사' 다.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은 사실 분석이 아니라 시청자의 궁금증을 유지하는 설명자 역할이다.
그래서 분석보다는 반응이 중요하다.
긴장하는 표정, 확신에 찬 말투, 추측이 포함된 발언.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법정이 아닌 세트장이다.
수사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다.
전문가가 말하는 순간, 그 말은 진실처럼 기능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진실을 검증하지 않는다.
그저 다음 회차를 위한 복선처럼 활용된다.
타인의 권위를 빌려 무게감을 주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하는 일

쇼의 연출자인 남성은 사건 피해자의 의붓아들이다.
그는 20년 전의 죽음을 현재의 콘텐츠로 바꾸는 역할을 자처한다.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는 명분은 있지만, 그 과정은 모호하다.
그는 복수를 꿈꾸는 것일까, 아니면 화해를 원하는 것일까.
가족이라는 연결고리는 그를 피해자이자 기획자로 만든다.
그러나 쇼가 진행되며 그의 역할은 점점 분열된다.
그는 연출자이면서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동시에 시청자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인물이 된다.
그는 중립적이지 않다.
동시에 객관적이지도 않다.
감정은 편집되고, 행동은 연출된다.
가족이라는 감정적 진실은 쇼의 논리 속에 침식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스스로 선택한 무대 위에서 자신마저 의심하게 된다.

💡종결이 아닌 폭로로 끝나는 결말

사건은 해결된다.
하지만 그 해결은 재판이 아니라 쇼의 마지막 회차에서 일어난다.
누군가가 폭로하고, 모두가 침묵하고, 진범이 밝혀진다.
시청자는 그것을 '해결' 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순간을 만든 건 수사가 아니라 대본 없는 클라이맥스다.
긴장과 몰입은 충분했지만, 결론의 무게는 의외로 가볍다.
진범은 드라마적으로 납득되지만, 법적으로는 어떠한 절차도 없다.
누군가가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이 진실이 된다.
그리고 아무도 그 말의 진위를 되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음 에피소드를 기대할 뿐, 그 말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이 아니라 '종결감' 이 이 쇼의 마지막 장면을 결정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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