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과 체찰 - 조선의 지성 퇴계 이황의 마음공부법
신창호 지음 / 미다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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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선생의 면모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주로 편지글 형태가 많이 실렸는데, 성리학에 관한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는 내용이다. 자신의 안부와 함께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곡진하고 친절하다.

 

거목 퇴계가 왜 이토록 유명하게 되었고, 그의 학문이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그가 쓴 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회적 명망이나 지위로 봤을 때  보통의 유명인사라면 큰소리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할텐데, 퇴계의 글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 나이 차이가 아무리 많이 나도 같은 학문의 길을 걷는 동반자로서 깍듯한 예우와 함께 상대방을 배려하는 여유가 묻어난다. 

 

당대의 학자 기대승과 나눈 '사단칠정론' 논쟁만 보아도 그렇다. 서른 살이나 아래인 젊은 학자 기대승의 지적을 받고 흔쾌히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것은 인정했고,  동등한 학자의 지위로 상대를 높여 주면서 조목조목 따질 것을 따졌다. 노학자의 고매한 인품이 문장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퇴계는 가정환경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진사출신인 아버지를 생후 7개월에 여의고 3세에 양자로 백부의 집에 기탁하면서 고난이 시작된다. 온갖 고난을 전전하면서도 배움에 있어서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학문에 너무 매진하다가 일찍 병을 얻어 평생 질병의 고통에서 괴로움을 당하는데, 그도 글에서 밝혔듯이, 단기간에 무엇을 이루겠다고 공부에 너무 욕심내는 것을 경계했다.

 

인생이 몇십 년이 되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단번에 많은 것을 이루려고 너무 몸을 혹사한 나머지 병을 얻은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 후학들에게 큰 학문을 성취하려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공부할 것을 권했다.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하루아침에 학문을 완성하는 것도 어리석은 생각이고, 성실하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 때에 크게 이룰 것이라고 했다.

 

몸이 노쇠해지고 눈이 침침해지면서 학문적 물음에 일일이 답변을 못해주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장면에서 문득 비애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대방은 양해를 구하는 퇴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아픈 와중에도 배움을 향한 학구열은 여전히 불타고 있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데, 배우고는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슬프다는 퇴계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조선사에 있어 퇴계만큼 공직의 부름을 많이 받은 학자도 드물 것이다. 퇴계의 공직생활은 주로 중종이나 명종조에 있었지만 어느 왕이 집권하든 퇴계는 항상 공직 임명 1순위였다. 우아한 인품과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에 왕조차 그의 인품과  학식을 흠모하여 곁에 두기를 간절히 원했다.

 

퇴계는 노년이 될수록 악화되는 건강과 후학양성이라는 자신의 포부를 실천하기 위해 안동으로 내려가 칩거한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병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몸소 체험한 퇴계는 하는 일 없이 녹봉만 축낸다는 미안함에 매번 공직에서 물러났다 다시 부름을 받고 공직생활을 하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16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붕당이 생기고 당파세력들이 서로를 헐뜯고 싸울 때 그것을 조정해 줄 명망있는 대신이 왕은 필요했을 것이다. 국운이 기울고 탐관오리들이 설쳐되는 조선 중기의 정세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나마 이런 상황을 지탱해 줄 버팀목으로 퇴계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수대에 걸쳐 공직생활을 하면서 왕은 퇴계만큼 미더운 신하가 없었다. 퇴계는 병마를 핑계로 낙향을 간청하고 왕은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왕의 요청을 거부하는 거만함이 극치에 이르렀다는 모함과 세상의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퇴계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인 조선 중기를 율곡과 더불어 슬기롭게 이끌고 간 현신임에 틀림없다. 사심없이 청렴하게 살았고, 왕에게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 성학십도를 지어 현명한 왕이 나아갈 길을 밝혔고,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비록 유교의 폐단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그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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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향기 2016-10-0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명 조식과 관련해 유명한 일화는 `을묘사직소`인데 명종이 단성현감에 남명 조식을 제수하나, 남명 조식은 관직을 받을 수 없음을 상소로 고한 것이다. 유독 이 상소가 유명한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쓰러져가는 고목에 비유했음은 물론이고 명종을 선왕의 단지 어린 고아로, 문정왕후를 구중궁궐 내의 과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화를 입었을 뻔 하였으나 당시가 선비들의 기강이 흐트러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는 선비가 바로 서 있음을 나타낸다고 하여 많은 선비들과 학자들이 남명을 두둔했다. 이에 명종은 이 일은 불문에 처한다고 사건을 마무리한다.(이황과 조식 선생을 제가 혼동해서 처음에 잘못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