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집 - 동양고전총서 10
제갈량 / 홍익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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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공명의 중원 회복 전략은 촉과 형주, 두 방면에서 관중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형주를 잃은 뒤로는 촉으로부터 북쪽 방면으로 정벌하는 방법밖에는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릉전투(夷陵戰鬪. 222년)에서 패배한 후, 오와 국교를 회복한 것이나 남중(南中)을 평정하려 했던 것도 이를 위한 준비였다. 남중 평정 작전의 결과, 군수 물자를 상납 받게 된 덕분에 국가의 재정이 풍요로워지자 공명은 군사를 훈련하고 대대적인 공격에 나설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촉의 상대는 중국 대륙의 북쪽 절반을 손에 넣고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위나라였다. 쉽사리 싸움을 걸 수 있는 호락호락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촉 땅은 험악한 산지로 둘러싸여 수비하기는 쉬웠지만, 공격하기에는 군대의 진군이나 군량미 보급 등에 어려움이 많아, 중원 토벌에 나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229년 5월 위나라의 문제(文帝) 조비(曹丕. 재위220~226)가 죽고, 그의 아들 조예(曹叡 . 재위226~239)가 22세로 즉위했다. 오나라 손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차례에 걸쳐 공격했지만 격퇴 당했다.

 

공명은 이러한 동쪽의 정세를 주시하면서 227년 3월에 북방 정벌군을 한중(漢中)으로 옮겼다. 이 때 후주(後主) 유선은 아직 20세로 모든 정치를 공명에게 맡기고 있었기 때문에, 공명은 출발에 앞서 여러 신하에게 조정의 정무처리 및 승상부 사무 처리를 맡겼다. 이렇게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의 업무를 위임한 공명은 출전에 즈음한 상주문(上奏文), 이른바 <출사표(出師表)>를 유선에게 올렸다.

 

선제(先帝 : 유비)께서는 창업의 뜻을 절반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삼분되어 있으며 익주는 피폐해져 있어, 진실로 우리의 흥망을 다투는 위급한 때입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폐하를 모시는 신하들은 궁궐 안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충실한 장수들은 궁궐 밖에서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도 잊은 채 돕고 있습니다. 이는 선제께서 내려주신 각별한 은총을 추모하며 폐하께 그 은혜를 보답하려는 뜻입니다. 폐하께서는 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뜻있는 신하들의 기개를 격려하셔야 할 것입니다. 공연히 스스로를 비하하는 경솔한 언행으로 충신들의 간언을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궁중과 정부가 함께 일치하여 상과 벌을 주는 일에 불공평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간사한 짓을 하거나 법률을 어긴 자, 또는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응당 담당 관청에 넘겨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공평한 정치를 널리 알리셔야 합니다. 사사로운 정에 치우쳐 안팎으로 법률이 달라져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공명은 <출사표>의 첫머리에서 어린 유선에게 황제의 소양을 조목조목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고, 이어서 자신이 북방 정벌에 임하는 동안의 업무 처리를 맡긴 신하들의 성향이나 장점을 상세히 설명한 뒤 다시 글을 이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 이것이 전한(前漢)이 흥성한 원인이며,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한 것. 이것이 후한(後漢)이 쇠퇴하여 멸망한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항상 신과 함께 이 일을 논의하시며, 일찍이 후한 말의 환제(桓帝 .재위146~167)와 영제(靈帝. 재위167~189)가 소인을 가까이 하여 나라를 쇠퇴의 길로 이끌었던 일을 탄식하고 통탄하셨습니다.

시중(侍中), 상서(尙書), 장사(長史), 참군(參軍)의 벼슬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성실하고 선량하며 절개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신하들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가까이하여 믿으시면 한(漢) 황실의 융성은 날로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공명은 되풀이하여 제왕학(帝王學)을 강조한 다음, 북방 정벌에 대한 자신의 결의를 서술한다. 이것이 바로 후에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출전이 된 대목이다.

 

신은 본래 한낱 평민의 신분으로 남양(南陽)에서 직접 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하고 있었을 뿐, 제후(諸侯)에게 가서 명성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굽히시어 세 번씩이나 신의 초려(草廬)를 찾아오셔서 저에게 당대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이 일로 신은 감격하여 선제를 위하여 몸 바쳐 일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후에 형주가 함락되고 당양(當陽)전투에서 패전하여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신이 군사(軍師)로서 막중한 임무를 맡은 지도 벌써 21년이 흘렀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신중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임종할 때 신에게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선제의 명령을 받은 이래로 신은 밤낮없이 걱정하고 탄식하며 선제께서 맡기신 일에 공적을 세우지 못하여 행여나 선제의 명철함에 손상을 입히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리하여 노수(瀘水. 현재의 금사강)를 건너 불모의 땅 남방(南方)으로 깊숙이 원정을 나섰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군대와 무기도 풍족하므로 마땅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中原)을 평정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바라는 것은 우둔한 재능을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을 물리쳐 한(漢) 황실을 부흥시켜 옛 도읍지(洛陽)로 돌아가는 일뿐입니다. 이것이 신이 선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명에게 중원 회복과 한(漢)황실의 부흥은 지상 명령과도 같았다.

 

신은 큰 은혜를 받고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멀리 떠나며 표(表)를 대하니-상주문(上奏文)을 앞에 두니-눈물이 흘러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명은 눈물을 흘리며 상주문을 마무리하고 유선에게 올린 다음, 20만의 정벌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공명의 첫 북방 정벌은 228년 봄에 시작되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그 해 겨울 2차 북방 정벌을 결행하게 된다. 공명은 이때도 상주문을 올렸는데, 이를 <후 출사표(後出師表)>라고 한다. 이 <후 출사표>는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글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이 <후 출사표>에는 만년에 접어든 공명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동시에 <전 출사표>에 견줄 만한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 당시 삼국의 상황이 간결하게 잘 나타나 있다. 결국 두 차례 북방 정벌은 다 실패로 끝이 나고, 공명은 54세로, 유비의 부름을 받아 그의 군사가 된지 27년째 되는 해에 천하통일의 꿈을 펴지 못한 채 오장원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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