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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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안에 있는 생명체는 커다란 멧돼지처럼 생겼고 그만큼 컸다. 하지만 사지가 모두 제자리에 달리지 않았고 발굽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손가락이, 즉 가느다란 피부가 튀어나와 있었다. 머리 역시 기형적이고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 귀도 없고 눈은 감고 있었다. / p.53


H.G.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을 식민지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이 이야기는 마을과 동떨어진 저택에서 모로 박사가 만들어 낸 동물인간들과 함께 자란 카를로타로부터 시작한다. 모로 박사는 대농장에 제공할 일꾼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동물인간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연구 보조와 저택 관리를 위해 몽고메리를 고용하고, 이야기는 카를로타와 몽고메리 각자의 시선에서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원작이 된 <모로 박사의 섬>은 인간 우월주의에서 오는 잔혹함과 그로 인해 생겨난 기괴한 동물인간들과 마치 신이 된 양 인간의 힘으로 억지로 꿰어 맞춘 자연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이기심의 허무함을 알려주고 있다. 백인 남성에 의해 쓰인 책은 철저하게 지배층의 시선에서 피실험체의 기괴함을 바라보고 같은 지배층을 폭로하는 것이라 어쩐지 위압적이다.  


그에 비해 <모로 박사의 딸>은 조금 더 온기가 있는 인간적인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식민지 여성의 위치에서 본 동물인간들은 그저 피실험체가 아니다. 그들도 감정을 느끼고 동료를 사랑하며 피가 이어지지 않은 다른 종이라도 형제처럼 사랑하고 연대할 수 있는 생명이다. 동물인간들은 서로를 아끼고 모로 박사의 딸인 카를로타와 가족이자 친구처럼 함께 살아간다. 원작보다 사람과 소통이 원활하게 가능하고 정서적인 교류가 많다는 이유에서 그들을 '인간적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에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어폐를 느끼지만 마땅히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점에 아쉬움을 느낀다. 



읽으면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느낌을 계속 받았는데, 확실히 마지막까지 드라마 같다. 약자였던 동물인간들이 인간이 만들어 낸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기 위해 나아가는 이야기,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인형처럼 키워졌던 카를로타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세계를 확장시키는 서사, 빚에 떠밀리듯 온 박사의 저택에서 과거와 부인을 그리워하며 살던 몽고메리가 현재를 바라보고 동물인간을 지키는 선택을 하는 것까지 많은 이야기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몽고메리가 약간 도구처럼 쓰이는 느낌은 있는데 작가가 식민지 여성이다 보니 조금 더 약자의 입장에서 카를로타와 동물인간에게 더 많은 이입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카를로타와 동물인간을 통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확실해 보였는데 몽고메리는 좀 애매해서 나에게는 이 인물 자체가 잘 와닿지 않았다. 집사처럼 쓰일 거면 끝까지 그러던가 아니면 확실하게 삼촌롤을 가져가던가 모로 박사의 동물 실험에 대한 고뇌나 방관자로서의 죄책감을 더 부각하던가... 굉장히 애매하게 이리저리 포지션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다가 후반부에 수호자 같은 도구로 쓰이고 끝낸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이야기의 카타르시스는 사실 카를로타의 각성보다는 '루페'라는 캐릭터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루페는 카를로타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여성형 동물인간인데, 그 둘은 자라면서 부딪히는 일이 잦아진다. 모로 박사에게 순종적인 카를로타와 달리 일탈을 부추기기도 하고 담장 너머를 꿈꾸고 박사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 루페는 카를로타에게 종종 '눈이 없다' '귀가 없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는 형제라고 하고 서로 소중하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지배관계가 있으며 동물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인질로 박사에게 착취당하는 모습을 제대로 지켜보지 않는 카를로타에 대한 꽤 직설적인 지적이다. 약자의 이야기를 하는 이 책에서도 약자 중의 약자, 동물인간이면서 여성인 루페의 입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과 함께 계층의 전복과 자유가 나온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면서도 상당히 통쾌하다.



카를로타는 자기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동물인간을 에두아르도가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부르는 걸 듣자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어렸을 때는 아흐 카브가 공중에 번쩍 들어 올려 줘서 기쁨에 겨워 꺄악 소리를 질렀다. 또한 카치토, 루페와 함께 숨바꼭질을 했으며 다른 동물인간들에게 책에서 읽은 운율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동물인간들은 턱이 툭 튀어나왔고 눈은 이상한 곳에 달렸으며 손이 기형적으로 생겼지만 카를로타는 이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 p.224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이 책은 원작을 모르더라도, 뜻을 곱씹지 않더라도 그 서사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성장형 주인공의 모험물이기도 하며 판타지 같은 설정 아래 어느 정도 로맨스가 가미되어 있지만 비중이 크지는 않아서 불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원작이 인간(강)과 동물(약)의 대립구도였다면 여기서는 인간, 남성, 백인 / 동물, 여성, 원주민으로 형성되어 있고 작가는 두 집단의 온도차를 선명하게 그려냄으로써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과 동시에 희망이 어디있는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이 점에서 원작과는 확실히 다른 매력이 있다. 친근하고 유쾌한 동물인간들의 술자리는 이득을 재고 자본을 계산하는 인간들의 모임보다 따뜻하고, 약자들의 연대는 때로 강자들의 것보다 질기고 강하다. 나는 원작보다 이 책을 훨씬 즐겁고 편하게 읽었는데, 약자를 착취하는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해 상대의 기괴함을 강조하여 충격을 주지 않더라도 서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도는 충분히 전달이 된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 모로 박사의 마지막이나 카를로타의 비밀 같은 것에서 K-드라마의 맛이 난다. 어쩐지 익숙하고 맛있더라. 냠.


++새벽에 읽기 시작했는데 그 새벽에 밤을 새워서 다 읽었다. 이야기가 몰아쳐서 끊을 곳이 없었다구...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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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 - 개발과 손익에 갇힌 아름드리나무 이야기
김양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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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십 살 된 큰 나무는 그냥 옮길 수 없다. 옮기기 편하게 하기 위해 뿌리와 가지를 대부분 잘라낸다. 사실 '옮긴다'는 말과 가장 가까운 현실은 '시민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갖다 버린다'는 의미다. / p.104


할머니가 사시던 전남의 어떤 면, 작은 동네 어귀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어릴 적 아빠 차를 타고 갈 때마다 그 나무가 보이면 할머니 댁까지의 거리를 어림짐작할 수 있게끔 하는 반가운 이정표이기도 했는데 그게 당산나무임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큰 후의 일이다. 그게 당산나무임을 몰랐을 때에도 어쩐지 어린 눈에는 나무의 울퉁불퉁한 뿌리나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두껍던 둘레, 잎이 무성하다 못해 어둡던 나무 아래가 무서워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다른 곳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현재 그 나무는 없다. 왜 베었을까. 살고 있는 마을 사람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있던 당산나무를 베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천년도 사는 것이 나무인데 고작 백 년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이토록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걸까.



오래된 나무는 마치 강한 힘을 가진 것 같다. 이것이 예부터 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겨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이유일 것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런 나무의 밑에서는 절로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나무들이 인간의 편의와 고작 미관 때문에 사라져 가고 유행 따라 갈아치워 진다. 보호수로 지정되어도 민원보다 앞서지 못한다. 본인의 이득에 따라 일단 베어버리고 벌금을 내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몰래 골프장 공사를 짓게 하고 골프장 vip 회원권을 받은 공무원도 있었고, 재선을 목표로 무리하게 생태하천을 파괴한 시장도 있었다. 후에 문제 되면 사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정치인의 고개 숙임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다고.



나는 나무를 보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인간 사회를 봤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현재만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시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기후 위기가 전 세계를 뒤흔드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당장 현실적으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가까운 곳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고, 그 시작은 정물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으로 나무를 재인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해당 책은 있는 생명을 지키는 일의 중요함을 전달하고자 그 출발선상에 다시 독자를 끌어놓았고, 나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스러져간 생명들에 대해 어떠한 착잡함을 느꼈다. 세월을 몸에 새기고 미래에도 계속 살아갈 나무들이 결국 이 책의 사진으로만 남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 그냥 역시 인간을 메워야...


++ 최근에 『모로 박사의 섬』(허버트 조지 웰스, 문예출판사), 『모로 박사의 딸』(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황금가지)를 연속으로 읽고 이걸 읽으니 인간 너무...동식물 전방위로 백해무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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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 - 고전 속 퀴어 로맨스
숀 휴잇 지음, 루크 에드워드 홀 그림, 김하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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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없는 세상이란 거짓 개념이며, 그 역사에 군데군데 구멍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11


문학을 읽다보면 내가 사랑 렌즈를 껴서 그런게 아니라 진짜 주인공의 의심스러운 친구들이 있다. 우정이라는 탈을 쓰고 가슴이 짜르르 울리는 짓을 하는 앙큼한 녀석들, 내가 그런 녀석들 때문에 친구를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게 친구라면 나는 친구가 없다. 『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는 그런 작품들 속 퀴어의 이야기, 특히 고대의 이야기를 긁어모아 묶은 책이다. 제목이 너무 직설적인가. 저 문구는 강렬한 동성애 감정을 노래한 시의 일부분이다. '키스가 죽음을 의미한다 해도 나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예요'. 미친 사랑의 노래다.


또 한 번은 어린 소년인 스포루스를 자기 여자로 만들려고 그를 거세시키고 억지로 끌고 와서 사포를 씌우고 결혼식을 올렸다. / p.160, 네로와 스포루스


절절하고 비극적이라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도 있지만 진짜 행위가 노골적이고 솔직해서 아찔한 것도 많았다. 현대 시민으로 살면서 들어본 적 없는 날 것의 표현도 많았고, 충격과 야만 그 자체인 서사도 많았다. 디오니소스와 어떤 인간 남자가 원나잇을 약속했는데, 인간이 죽어버리자 신이 슬퍼하며 그 무덤 위에서 딜도를 꽂아 맹세를 지켰다는 전개의 이야기같은. 이것보다 수위가 센 이야기들이 많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무리 낭만이라지만 단어 하나만 바꾸면 야만인데 여기는 야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르티알리스의 풍자시라던가 정신나간 네로라던가....카툴루스가 분노하며 하는 저주라던가(p.127)... 지금 이런 말 하면 상대한테 백퍼센트 고소 들어온다. 그냥 모가지를 따버리는게 나을 수도 있을 정도의 수위다. 



"지금 증명할 수 있어요. 내게 기회를 줘요. 그러면 곧 내가 그 어떤 남자보다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나한테 남자의 물건과 비슷하게 생긴 장난감이 있어요. 조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반드시 보여줄게요." / p.36, 스리섬 이야기


고대에 얼마나 소년애가 장려되었는가는 인간의 성별은 세 개였다고 하는 플라톤의 말에서 살짝 엿 볼 수 있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세 번째 성. 여성을 욕망하는 남성은 제 3의 성으로 보고, 온전한 남성이라면 본성상 남자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며 남성에게 끌리는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그것을 '남자답고 고귀한' 특성으로 보는데 그 분류에도 여성끼리의 사랑은 없었다. 여성들끼리의 사랑은 그 때도 수치스러운 것이었으므로. 마치 문 닫은 열린 교회 같은 느낌. 아킬레우스도 헤라클레스도 남성을 사랑하고 당당하게 소년 연인을 전시하고 다니는데 왜 여자만 신에게 '남자로 만들어달라는' 기적을 구해야 하는지.



고대가 아무리 동성애에 열려있고 심지어는 소년애가 권장된다 하더라도 여성 차별은 뿌리가 깊다. 꼭지 중 '남자의 마음과 욕망'을 가진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처럼' 여성을 사랑한다고 텍스트에 적혀있다 해서 그를 트랜스 남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나? 그냥 여성으로서 다른 여성을 사랑한 건데, 그 당시 기준 "사회적으로 학습된 남성상"인 모습이라 그렇게 적힌게 아닌가. 왜냐면 남성끼리의 사랑은 권장되었으나, 여성끼리의 사랑은 당시에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남성은 전쟁을 하고 여성은 출산을 하는 것이 미덕이자 의무였던 고대의 시대적 특성 상 종족 번식이 되지 않는 여성끼리의 사랑은 배제되었던 걸까.



에로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단순히 뒷받침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우도록 사람들을 부추김으로써 아레스를 능가한다. / p.165


사랑에 빠진 연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는 결코 후퇴하거나 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로맨틱하다. 옆에서 같이 싸우는 게 연인이기에 절대 물러설 수 없고 서로를 지켜야하므로. 어떤 의미에서 전쟁과 파괴 신 아레스보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더 강력하다는 말은 사랑의 힘의 놀라움을 증명한다. 이런걸 보면 고대에 남자들의 사랑을 응원한 건 잦은 전쟁에 써먹을 병사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나치즘이나 국가때문이 아니라 옆의 전우들을 위해 싸웠고 탈영률은 0에 가깝고 연합군보다 평균 50%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전우의 힘이 군대를 강하게 결속하는데, 전우가 연인이라면 더욱 강한 힘을 내지 않았을까.



이 책은 길지 않은 이야기들이 계속 몰아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한 꼭지당 내용이 짧다는 건 쉽게 읽히고 긴 집중력을 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깊이가 얕다는 어쩔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를 불러온 게이 커플'에서 이 커플이 독재자를 살해하고 공모자를 고발한 행위가 왜 민주주의를 불러왔는지 본문 내용만으로는 쉽게 제목을 이해할 수가 없다. 각자의 내용이 굉장히 재밌으므로 책이 조금 더 두꺼워지더라도 길고 자세히 작성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고대에서부터 노래되어 온 퀴어에 대한 이야기를 모았지만 동성애 자체보다는 강력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다를 것 없이, 때로는 더 강한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현대 미술과 만난 고대의 퀴어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을 박살내고 재해석한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품는 감정에 '정상'을 따로 정의할 수 있는가. 날 것으로 느껴질 만큼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능청스레 풀어내는 고대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다듬어지고 정제된 글보다 특정 관념의 세계를 강하게 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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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의 상자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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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뒤로도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친절한 동료부터 평생 나를 사랑한 부모님까지. 이별은 익숙해질지 언정 덜 슬프지 않고, 미완으로 남은 기억은 언제까지나 가슴 한편에서 나를 부른다. / p.246


최근의 미디어는 그야말로 도파민으로 가득한 자극과 '악'의 승리, '선'의 무력함으로 가득하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선은 너무나 연약하고 악은 항상 승승장구하며, 결국 그 악과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악'으로 분장하는 서사의 드라마나 영화의 예를 나는 꽤 많이 들 수 있다. 세계는 후퇴하는 것 같고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는 언제나 반복되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그래도 나아질 거야'라는 말을 하려면 다소 용기가 필요하다. 현실을 모르니까, 머릿속이 꽃밭이 아니냐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모르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는 걸까.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없는 걸까.




이 책은 두 가지의 큰 줄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연작 소설들로 이루어진 [카두케우스 이야기], 보다 더 현실적인 배경으로 돌아와 일상에 닥친 재난을 이야기하는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표제작 <미정의 상자>는 바로 이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에 속해있다. 모든 이야기에 약간의 픽션이 곁들여져 있지만 결국 평범한 개인의 소박한 일상을 뒤트는 장치로서의 기능만 할 뿐 그렇게 어려운 과학적 문제가 있지 않아 쉬이 읽힌다. 



나는 이 두 테마에서 '시간'을 가장 눈여겨보았다. SF 역시 사람의 이야기인지라 그 마음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소연 작가는 시간이라는 소재를 주물러 감정이 변화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낸다. <미정의 상자>는 재난으로 연인을 잃은 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계속 다른 시도를 하는 이야기이며, [카두케우스 이야기]의 단편들은 더욱 시간을 재밌게 사용한다. 우주를 누비며 별들을 뛰어넘는 사람의 시간과 행성에 발을 붙이며 살아가는 사람의 시간의 흐름이 과연 같을까? 서로 보내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다를 때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누군가의 3년이 누군가의 40년이라면. 신파를 찍어낼 수 있다면 찍을 수 있고, 감동을 주려고 작정한다면 줄 수도 있는 설정 속에서 작가는 그저 담담하다. 자극적인 서사와 격정적인 감정 서술에 매몰되지 않는 담백한 글은 읽는 순간보다 덮은 뒤에서 잔잔한 여운을 퍼트린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점은 작가는 그냥 SF라는 살짝의 비현실적 배경을 사용하면서도 현실의 사회적 문제를 중첩하여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카두케우스'라는 사기업이 우주여행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문제, 회사에서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인간, 조금 더 현실로 돌아오자면 현재 청년들의 주거 문제나 방역 관련해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안전불감증과 같은 이야기들. 작가는 다양한 문제들을 아주 태연하게 다루고 있다. 과장 없이 다루고 있는 모습에서 사회 문제, 특히 자본에서 나오는 문제들을 굉장히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일상화된 사람의 덤덤함이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미래를 희망적으로 그려낸다. 그 부분이 놀랍다. 시선은 차갑지만 온기는 잃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 알면서도 '확실하게 한 걸음씩' 나아감을 믿는 단단함이 반짝인다. 



사회의 우울을 읊기 쉬운 시대에 작은 희망을 보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슬픔을 겪고 있더라도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시선이 모든 수록작들을 관통한다. 눈이 부시지는 않더라도 확실하게 빛나고 있는 용기를 가진 책이라서 덮은 뒤 좋은 여운이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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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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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돌아오지 못할 길로 들어서고야 마는 것은 나의 정해진 패턴이었다. / 첫 문장


9년 전 캄보디아로 4개월간 해외 봉사활동을 갔던 동이, 혜란, 석이. 귀국 후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동이는 혜란으로부터 석이가 실종되었다는 전화를 한 통 받게 된다.


사람은 외따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개인의 평온을 위해 다른 사람이 힘을 쓰고 있으며, 나의 생활 역시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결국 사람이란 서로에게 빚을 지고, 빚을 지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캄보디아에서 해외 봉사를 하며 친하게 지내던 세 친구는 세월호 참사 이후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부채감에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나의 현실이 버거워 외면하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곤해한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그리고 우리는 몇 달 전에 큰 또 한 번의 사고를 겪었다. 운이 좋아 나를 빗겨갔을 뿐인 국가적 참사들. 사회는 그 참사를 직시하고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 날보다 더 안전해진 제도 아래 실질적으로 득을 보는 것은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때때로 잊히지 않는 것이 바로 영원"이라고 책은 말한다. 잊히지 않는 것,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영원이라면 우리는 영원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기꺼이 져야만 하는 것이다.



+ 왜 요즘 예소연 작가가 주목받는지 알 것 같은 작품이었다.

++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인덱스가 덕지덕지 붙어있던데 ㅎ...저두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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