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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2월
평점 :

통 안에 있는 생명체는 커다란 멧돼지처럼 생겼고 그만큼 컸다. 하지만 사지가 모두 제자리에 달리지 않았고 발굽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손가락이, 즉 가느다란 피부가 튀어나와 있었다. 머리 역시 기형적이고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 귀도 없고 눈은 감고 있었다. / p.53
H.G.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을 식민지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이 이야기는 마을과 동떨어진 저택에서 모로 박사가 만들어 낸 동물인간들과 함께 자란 카를로타로부터 시작한다. 모로 박사는 대농장에 제공할 일꾼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동물인간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연구 보조와 저택 관리를 위해 몽고메리를 고용하고, 이야기는 카를로타와 몽고메리 각자의 시선에서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원작이 된 <모로 박사의 섬>은 인간 우월주의에서 오는 잔혹함과 그로 인해 생겨난 기괴한 동물인간들과 마치 신이 된 양 인간의 힘으로 억지로 꿰어 맞춘 자연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이기심의 허무함을 알려주고 있다. 백인 남성에 의해 쓰인 책은 철저하게 지배층의 시선에서 피실험체의 기괴함을 바라보고 같은 지배층을 폭로하는 것이라 어쩐지 위압적이다.
그에 비해 <모로 박사의 딸>은 조금 더 온기가 있는 인간적인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식민지 여성의 위치에서 본 동물인간들은 그저 피실험체가 아니다. 그들도 감정을 느끼고 동료를 사랑하며 피가 이어지지 않은 다른 종이라도 형제처럼 사랑하고 연대할 수 있는 생명이다. 동물인간들은 서로를 아끼고 모로 박사의 딸인 카를로타와 가족이자 친구처럼 함께 살아간다. 원작보다 사람과 소통이 원활하게 가능하고 정서적인 교류가 많다는 이유에서 그들을 '인간적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에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어폐를 느끼지만 마땅히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점에 아쉬움을 느낀다.
읽으면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느낌을 계속 받았는데, 확실히 마지막까지 드라마 같다. 약자였던 동물인간들이 인간이 만들어 낸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기 위해 나아가는 이야기,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인형처럼 키워졌던 카를로타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세계를 확장시키는 서사, 빚에 떠밀리듯 온 박사의 저택에서 과거와 부인을 그리워하며 살던 몽고메리가 현재를 바라보고 동물인간을 지키는 선택을 하는 것까지 많은 이야기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몽고메리가 약간 도구처럼 쓰이는 느낌은 있는데 작가가 식민지 여성이다 보니 조금 더 약자의 입장에서 카를로타와 동물인간에게 더 많은 이입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카를로타와 동물인간을 통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확실해 보였는데 몽고메리는 좀 애매해서 나에게는 이 인물 자체가 잘 와닿지 않았다. 집사처럼 쓰일 거면 끝까지 그러던가 아니면 확실하게 삼촌롤을 가져가던가 모로 박사의 동물 실험에 대한 고뇌나 방관자로서의 죄책감을 더 부각하던가... 굉장히 애매하게 이리저리 포지션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다가 후반부에 수호자 같은 도구로 쓰이고 끝낸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이야기의 카타르시스는 사실 카를로타의 각성보다는 '루페'라는 캐릭터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루페는 카를로타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여성형 동물인간인데, 그 둘은 자라면서 부딪히는 일이 잦아진다. 모로 박사에게 순종적인 카를로타와 달리 일탈을 부추기기도 하고 담장 너머를 꿈꾸고 박사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 루페는 카를로타에게 종종 '눈이 없다' '귀가 없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는 형제라고 하고 서로 소중하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지배관계가 있으며 동물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인질로 박사에게 착취당하는 모습을 제대로 지켜보지 않는 카를로타에 대한 꽤 직설적인 지적이다. 약자의 이야기를 하는 이 책에서도 약자 중의 약자, 동물인간이면서 여성인 루페의 입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과 함께 계층의 전복과 자유가 나온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면서도 상당히 통쾌하다.
카를로타는 자기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동물인간을 에두아르도가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부르는 걸 듣자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어렸을 때는 아흐 카브가 공중에 번쩍 들어 올려 줘서 기쁨에 겨워 꺄악 소리를 질렀다. 또한 카치토, 루페와 함께 숨바꼭질을 했으며 다른 동물인간들에게 책에서 읽은 운율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동물인간들은 턱이 툭 튀어나왔고 눈은 이상한 곳에 달렸으며 손이 기형적으로 생겼지만 카를로타는 이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 p.224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이 책은 원작을 모르더라도, 뜻을 곱씹지 않더라도 그 서사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성장형 주인공의 모험물이기도 하며 판타지 같은 설정 아래 어느 정도 로맨스가 가미되어 있지만 비중이 크지는 않아서 불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원작이 인간(강)과 동물(약)의 대립구도였다면 여기서는 인간, 남성, 백인 / 동물, 여성, 원주민으로 형성되어 있고 작가는 두 집단의 온도차를 선명하게 그려냄으로써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과 동시에 희망이 어디있는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이 점에서 원작과는 확실히 다른 매력이 있다. 친근하고 유쾌한 동물인간들의 술자리는 이득을 재고 자본을 계산하는 인간들의 모임보다 따뜻하고, 약자들의 연대는 때로 강자들의 것보다 질기고 강하다. 나는 원작보다 이 책을 훨씬 즐겁고 편하게 읽었는데, 약자를 착취하는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해 상대의 기괴함을 강조하여 충격을 주지 않더라도 서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도는 충분히 전달이 된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 모로 박사의 마지막이나 카를로타의 비밀 같은 것에서 K-드라마의 맛이 난다. 어쩐지 익숙하고 맛있더라. 냠.
++새벽에 읽기 시작했는데 그 새벽에 밤을 새워서 다 읽었다. 이야기가 몰아쳐서 끊을 곳이 없었다구...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