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의 상자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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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뒤로도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친절한 동료부터 평생 나를 사랑한 부모님까지. 이별은 익숙해질지 언정 덜 슬프지 않고, 미완으로 남은 기억은 언제까지나 가슴 한편에서 나를 부른다. / p.246


최근의 미디어는 그야말로 도파민으로 가득한 자극과 '악'의 승리, '선'의 무력함으로 가득하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선은 너무나 연약하고 악은 항상 승승장구하며, 결국 그 악과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악'으로 분장하는 서사의 드라마나 영화의 예를 나는 꽤 많이 들 수 있다. 세계는 후퇴하는 것 같고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는 언제나 반복되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그래도 나아질 거야'라는 말을 하려면 다소 용기가 필요하다. 현실을 모르니까, 머릿속이 꽃밭이 아니냐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모르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는 걸까.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없는 걸까.




이 책은 두 가지의 큰 줄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연작 소설들로 이루어진 [카두케우스 이야기], 보다 더 현실적인 배경으로 돌아와 일상에 닥친 재난을 이야기하는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표제작 <미정의 상자>는 바로 이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에 속해있다. 모든 이야기에 약간의 픽션이 곁들여져 있지만 결국 평범한 개인의 소박한 일상을 뒤트는 장치로서의 기능만 할 뿐 그렇게 어려운 과학적 문제가 있지 않아 쉬이 읽힌다. 



나는 이 두 테마에서 '시간'을 가장 눈여겨보았다. SF 역시 사람의 이야기인지라 그 마음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소연 작가는 시간이라는 소재를 주물러 감정이 변화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낸다. <미정의 상자>는 재난으로 연인을 잃은 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계속 다른 시도를 하는 이야기이며, [카두케우스 이야기]의 단편들은 더욱 시간을 재밌게 사용한다. 우주를 누비며 별들을 뛰어넘는 사람의 시간과 행성에 발을 붙이며 살아가는 사람의 시간의 흐름이 과연 같을까? 서로 보내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다를 때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누군가의 3년이 누군가의 40년이라면. 신파를 찍어낼 수 있다면 찍을 수 있고, 감동을 주려고 작정한다면 줄 수도 있는 설정 속에서 작가는 그저 담담하다. 자극적인 서사와 격정적인 감정 서술에 매몰되지 않는 담백한 글은 읽는 순간보다 덮은 뒤에서 잔잔한 여운을 퍼트린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점은 작가는 그냥 SF라는 살짝의 비현실적 배경을 사용하면서도 현실의 사회적 문제를 중첩하여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카두케우스'라는 사기업이 우주여행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문제, 회사에서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인간, 조금 더 현실로 돌아오자면 현재 청년들의 주거 문제나 방역 관련해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안전불감증과 같은 이야기들. 작가는 다양한 문제들을 아주 태연하게 다루고 있다. 과장 없이 다루고 있는 모습에서 사회 문제, 특히 자본에서 나오는 문제들을 굉장히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일상화된 사람의 덤덤함이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미래를 희망적으로 그려낸다. 그 부분이 놀랍다. 시선은 차갑지만 온기는 잃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 알면서도 '확실하게 한 걸음씩' 나아감을 믿는 단단함이 반짝인다. 



사회의 우울을 읊기 쉬운 시대에 작은 희망을 보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슬픔을 겪고 있더라도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시선이 모든 수록작들을 관통한다. 눈이 부시지는 않더라도 확실하게 빛나고 있는 용기를 가진 책이라서 덮은 뒤 좋은 여운이 오래 남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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