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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평점 :

■ 우크라이나 침략은 거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군사화되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경제활동의 주체로서의 “국가”가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앞으로 아마도 약 5~10년 동안 미 · 중 · 러 · 인도 등 여러 열강 사이에서는 전쟁과 갈등, 대립을 통한 “서열 정리”, 그리고 종속 지대(자원 지대 등)의 재분할 등이 대단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p.123)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벌써 2년이 지났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서방 국가들의 압박 속에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다. 전쟁은 미국이 내세우던 질서가 얼마나 허무한지, 말 뿐인 세계화가 어떻게 박살나는지 그 민낯을 샅샅히 들춰냈다. 한 마음일 줄 알았으나 러시아를 지원하는 국가도 있었으며, 우크라이나의 호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가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궁금했다. 나름 혁명의 국가인 러시아(구소련)인들이 왜 푸틴의 독재에 아무 저항 못하는지, 심지어 그 높은 지지율은 어디서 나오는지. 러시아가 뭐가 아쉬워서 세계를 상대로 먼저 전쟁이란 칼을 빼들었는지.
얼마나 내가 러시아를 몰랐는지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넓은 땅의 존재감과 세계사의 흐름에서 러시아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역량을 너무 부풀려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도 경제적 규모가 큰 줄 알았고, 여전히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인줄 알았다. 그렇기에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그저 푸틴의 제국주의적 야욕에만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내내 러시아의 경제적 규모와 그 산업 구조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번듯한 IT 기업 하나 없고 수출 경쟁력도 떨어지는 '후진적 열강'. 그 상황 속에서 아직도 그들에게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는 것 역시 눈에 띄었다. 복잡한 정세와 러시아 국내 상황 속에서 꽤나 많은 계산 속에 이루어진 전쟁임을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설명은 설명일 뿐,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긍정이나 수용이 아님)
■ 1950년대 이후에는 국가에 어느 정도의 ‘여력’이 생겨 소련의 인민들은 비록 다당제 선거에서 원하는 정당의 후보를 찍을 권리는 없어도 아파트를 무료로 배정받는 것은 물론이고 별장을 지을 땅과 텃밭까지 무료로 제공받을 권리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정치적 권리의 결핍이 사회적 권리의 풍요로 “보상”되는 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언의 “사회적 계약”에는 물론 대중들의 탈정치화 등과 같은 많은 문제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러시아 등지에서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가 지속되는 현상은 그와 같은 “보상”의 매력을 증명해줍니다. (p.62)
익숙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새롭게 알게 된 세계 정세라 끝까지 흥미를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특히 3, 4부는 한국 이야기도 나오니 더더욱. 러시아의 전쟁과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고 기후 · 젠더 문제 등 전체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세계, 미국도 사실상 보호주의로 정책을 돌려 탈세계화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현재 한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한국인으로서 알기 힘든 이야기와 언론에서 절대 알려주지 않는 정보들을 가득 담고 있다. (ex. 푸틴과 박정희의 차이(p.204, 푸틴에게는 '김대중'이 없다), 파편화되는 세계, 윤석열 정부의 실패는 시작됐다(p.283))
■ 이처럼 각국의 대외적인 다변화, 관계의 다면화, 다각의 실리 추구가 대세인 요즘의 세계에서, 윤석열 정부의 미국에 대한 "충성 어린" 태도는 장기적으로 커다란 비극의 서곡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p.286)
귀화한 구 소련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러시아와 세계 정세는 이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 될 것이고, 제3자에 가까운 위치에서 한국의 상황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한창 올림픽하는데 속보로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 결정을 했다고 뜬게. 진짜 당시에는 푸틴 머리에 소주 꽂은 줄 알았음. NO WAR 이라는 반전 메시지를 들었던 우크라이나 선수가 결국 총을 들고 참전했다는 것도 너무 슬펐고...
++ 책 내에 ''나 "" 같은 따옴표 사용이 너무 잦다. 강조하고 싶은 단어나 특이한 단어에 표시해둔 것 같았는데, 너무 잦으니까 오히려 가독성이 떨어졌음. 처음부터 끝까지 밑줄로만 가득한 참고서를 보는 느낌이었다. 정작 무엇이 중요한 단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는 이야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8기 자격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