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 소멸 사회 - 압축 성장 대한민국은 왜 복합 위기의 길로 들어섰나
이관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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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토론회에서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걱정하시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독도를 일본에 내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시는 분도 있더군요. 그분들께 '걱정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차피 독도는 조만간 일본 땅이 될 테니 말입니다. / p.23


정치학자 이관후 저자의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매우 충격적인 말로 문을 연다. 대한민국의 소멸 위기라는 말은 이제 낯설지도 않고, 결혼과 출산 생각이 없는 나로서는 진짜 어쩌라는 수준의 말이다. 한국이 저출생인데 지금 그를 담당할 나이의 여성이면서 지금 뭐 하냐는 손가락질과 책임을 떠넘기는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하기까지 하다. 뭐 낳을 사회가 되어야 말이지. 그런데 바로 독도부터 얘기하고 들어가다니. 사실 한국이 없어질 위기인데 독도의 운명이야 당연한 거 아닐까. 그럼에도 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소멸이라는 말에 무뎌졌다는 게 느껴진다.



빠르게 성장한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유례없는 속도로 빠르게 소멸하기 시작한다는 주제는 낯설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생률 타이틀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만 봐도 이 나라가 어떤 상태인지 짐작이 가지 않나. 한국은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소멸하고야 말아야 하는 운명인 걸까. 나는 많은 것이 소멸한 한국에서 과연 지금까지처럼 무사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정부는 국가 경영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부·여당은 국가의 미래가 아니라 집권 세력, 지지 세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국정 운영에 대한 책임은 뒷전입니다. 결과가 나쁘면 전 정부와 야당 탓을 하면 됩니다. 야당은 정부가 외교와 경제를 망치고 있으니 반사 이익을 누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 나라가 망해도 좋은 것입니다. 아니, 망하게 방치할수록 좋습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는 게 더 설득력이 있느냐의 문제만 남았습니다./ p.38


여야의 '심판 프레임' 그 속내를 알게 된 무서운 문단. 국민의 심판을 바란다는 말, 선거철마다 매번 듣던 말이라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하다. 상대가 무능해야 내가 밥그릇을 더 차지할 수 있는 싸움이라면 내가 나서서 잘하려고 하는 것보다 상대의 실패만을 바라는 것이 더 빠른 길이며, 내가 여러 정책을 내는 것보다 상대의 말을 비판하는 것이 더 쉬운 길인데.


공생하여 나라를 이끌어야 할 정치인들은 한국의 각종 소멸과 국민의 절망을 다른 당에 떠 넘기고, 그 책임은 국민에게 오롯이 지운다. 저출생도 국민의 탓, 아동 학대도, 사기를 당하는 도 국민의 탓, 지방으로 가지 않은 것도 모조리 국민의 탓.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정책은 없고 커다란 일이 터지면 부랴부랴 사건을 수습하듯 '00법'이라는 이름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며 넘어가는 일들. 저자는 이 모든 사회의 소멸에는 정치의 소멸이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밥그릇 싸움에 서로가 망하기만을 기다리고, 정책의 실패를 바라는 사이에 한국은 얼마나 많은 비상신호와 기회들을 놓쳐왔을까. 



유일한 희망은 정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치의 소멸을 말하고 있는 지금, 돌아보면 2016년의 촛불이 꿈만 같'(133)다던 저자는 지금의 형형색색 응원봉을 보면서 어떤 글을 쓸까. 한국의 소멸을 걱정하는 그처럼 이렇게나 한국을 걱정하고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응원봉의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추운 거리에 밖으로 나오고,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멀리서나마 마음을 전하면서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정치를 복원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답은 탈조다' 라면서 희망이 없는 한국을 떠나기를 부추기는 sns 어딘가에 돌아다니는 그 말들은 시위 현장에 나가보면 절대 나올 수 없다. 이 불빛의 개수가 곧 희망이고 사람들의 배려와 연대 의식이 가득했으며,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있을 정도로 평화로운 집회를 여는 시민들의 수준은 그 어느 나라보다 선진적이다. 소멸 직전의 문턱에서 한국을 다시 일으킬 힘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 2주에서 3주만 늦게 나오지. 너무 일찍 나와 아쉬운 책이었다. 한시 바삐 개정판이 나왔으면 하는 올해의 책을 꼽으라면 유시민 작가의 책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에 이어 2위로 올림. 




+ 『검찰 국가의 배신』(이춘재, 한겨레출판) ,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나라』(신장식, 한겨레출판) 와 묶어서 정치 에디션 내지 탄핵 에디션으로 나와도 될듯. 진짜 미친 시대였다. 5년같은 2년 반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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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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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이 땅에 주인으로 태어나 잡초라는 이름으로 짓밟히고, 뽑혀도 그 질긴 생명력으로 생채기 난 흙을 품고 보듬어 생명에 터전을 치유하는 위대함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p.27, <잡초공적비 비문>


너무나 유명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임을 떠나, 유홍준 교수에게는 개인적으로 친근함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우리 과 교수가 그렇게 좋아하고 그렇게 틈만 나면 칭찬을 하며 꼭 읽어보라고 권하였기에 하도 많이 들어 영문 모르게 마음속으로 친근함이 느껴진다. (실제로 친분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거짓말 같다는 게 우리 과 동기들의 정설이다.)



많은 부분을 떠나 그의 인생만사를 따라 책을 읽던 도중 계엄이 터졌다. 병렬독서 중이던 대다수의 책을 읽지 못하고 뉴스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던 때에 이 책만은 계속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이상하게 시의성이 느껴지는 부분과 제4장 <예술가와 함께>, 제5장 <스승과 벗>이 강렬하게 나를 잡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실 계엄 전까지 '잡초'의 이야기와 중국의 프로 여성 바둑 기사인 루이의 이야기를 가장 인상 깊게 읽은 터라 그 부분에 메모를 가장 많이 남기며 읽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이 책의 의미를 순식간에 뒤바꿨다. 물론 저자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으나 독자와 현시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므로 사회의 분노에 따라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의 반복에 분노하기도 하고 고양되기도 하고 유쾌한 글맛에 잠시 한시름 놓기도 했다.


게다가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그 벗들의 이야기를 보며 사람의 관계의 소중함과 서로를 보살피는 방법, 저자의 스승이자 벗인 사람들을 보며 내가 지나온 인연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니 이런 부분에서도 시기가 적절하긴 했다.



타인의 인생 궤적이 혼란한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삶은 쉬지 않고 한국의 역사를 따라 걸은 길이었으므로 그 인생만사에 한국의 미가 있고, 유신독재의 역사 민주화 운동의 정신까지 있었다. 잡문집이라 하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난이도가 있는 책은 아니었는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장을 넘기는 손을 늦추었다. 좋은 책은 시대가 흘러도 여전히 그 의미를 잃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저자의 잡문집도 그렇게 남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도 한국인이 우리의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리 없고,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라면 분명 이 글 곳곳에 담긴 정신을 잊지 않을 테니까.



하늘을 바라보고 부끄럽지 않은 삶이 자신과 집안에 얼마나 큰 피해가 오는가를 생각할 때도 사회가 저를 부르는 소리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고 먼 훗날 저의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스러운 세계만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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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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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교주를 죽여라. / p.48


주인공 우혁은 중학생 시절 계곡에 빠졌다가 신비한 소년으로 인해 치유받은 특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때의 경험으로 인해 '평범' 그 너머를 엿보았고 이후 비일상적인 스릴을 좇아 도박중독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제 마음을 잡고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서른넷의 우혁 앞에 그 소년이 예전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나타난다. 


소년은 과거 서른두 명의 신도가 집단 자살한 사이비 종교 '새천년파'의 교주이며, 그는 1999년 12월 31일을 종말일로 예언한 '재림 예수'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누군가는 그를 아직 재림 예수로 믿으며 추적 중이고, 소년은 우혁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진심은 맹목적인 매혹과 결부되었으며 고결한 순교자는 광신도의 다른 명칭이었다. / p.240


신학을 기틀로 삼아 그 위에 현대적 상상력을 덧씌운 소설. 성경 구절과 어느 정도의 신학적 이론이 나오긴 하지만, "만약 네가 세상을 끝장낼 수 있으면, 그러고 싶으냐?"에 대한 각 인물들의 답을 이끈 나침반 역할 정도이다. 해석은 다양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각자의 문제이므로. 그러나 이 정도로 신학적인 정보값 위에서 인간의 윤리를 집요하게 묻고 파헤치는 소설이 있었나 하면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 문단의 유행이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다정한 속성의 SF(Science Fiction)라 하면, 이 책은 신학을 바탕으로 윤리를 묻고 추측하여 건조하게 탐색해 나가는 SF(Speculative Fiction)이므로 확실하게 이질적이며 독특한 맛이 있다.



개념을 물질에 앞세움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는 도시의 결절들. 만질 수 없거니와 상상의 대상조차 아니므로 실체와 정신을 동시에 압도하고 마는, 추상화된 객체들. 강남과 남양주의 차이를 궁금해하는 사람에게는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부동산 시세가 병기된 지도를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내비게이션 화면에 나타난 아이보리색, 회색, 초록색 구획의 조화는 실존 이상의 실재였다. / p.90


이 책의 많은 것들이 긍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도박중독자인 주인공도 그렇고, 집단 자살을 일으킨 사이비 종교, 대기업 회장이지만 명품보다는 카시오 시계를 차며 도망친 '재림 예수'를 추격하는 인물. 인물상만이 그런 것도 아니다. 도시의 풍경과 세계의 구조에 대한 서술 역시 차갑고 건조하다. 대기업 상표로 도배된 도시, 우혁이 일하는 서울 대치동의 학원가, 학생 유치를 위한 경쟁과 강사들 사이의 견제 등 자본주의와 사교육 시장에 대한 시선이 날카롭다. 나는 이전에 단요 작가가 <수능 해킹>(창비, 2024)을 공동 저술한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사교육 관련 이야기가 중점은 아니지만 이 장편소설에서 인상적일 만큼 차갑고 이 부분만큼은 현실을 잘라낸 것과 같아 기억에 남는다.



“그 양반은 교리를 소망이 아니라 실체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신학교에 적응하질 못했던 셈이지. 세상 사람 모두가 공평히 소중하다는 말에 ‘빌 게이츠 딸은 소말리아 아동보다 훨씬 잘사는데 불평등한 거 아닌가요’ 하는 어린애들처럼. 어른이라면 주어진 현실과 믿고 싶은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면서 이 순간에 할 일을 정하지만 어린이는 곧이곧대로 보고 움직이거든.” / p.264


사실 완벽히 모든 말을 이해하기에는 살짝 어려웠다. 종교적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과 별개로 내가 가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연못에 발 끝 조금 담근 정도일 것이므로. 이 소설의 무서운 점은 인물들이 늘어놓는 궤변에 가까운 장황설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독자를 이 소설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어느 인물에게도 정을 주지 못했고, 크게 공감하지도 못했으며(근데 애초에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공감할 인물상들이...아닌 것 같음) 어떤 부분은 어렵게 느끼기까지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400p 가량의 장편소설을 끝까지 붙잡아 낼 수 있었다. 힘이 강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작가가 던져주는 다음 대사만을 애타게 기다리다 머리채가 잡혀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끌려가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피와 기름>에서 정확히 그런 느낌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나가는 천 명의 사람들과 내 눈앞에서 죽는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눈앞에서 죽어가는 백 명 쪽이 더 괴롭지 않을까. 대의는 멀고 내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삶의 의미를 '지구 반대편 이름 모를 천 명이 살아가니까 나도 살아가야지'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보통은 곁에 있는 사람 때문에, 건네진 손 하나 덕분에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마침표가 충분히 납득 가고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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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
선우은실 지음 / 읻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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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이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 p.235


진짜 좋았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사실은 제목만 보고 '웃기지 않은 일에 웃지 않는 일', 사회가 웃기지 않은 일을 가지고 웃기다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마음가짐 그 정도의 가벼운 산문일 줄 알고 이동 중에 읽었는데 예상외의 묵직한 맛에 연필을 쥐고 자리 잡고 앉아서 차분히 한번 더 읽었다.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건 생각보다 더 일상적으로 그리고 무참하게 움직인다. (···) '모든 가정엔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따위의 말로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폭력과 상처와 불가해한 일을 그저 '가족의 일'로 묶어버리기도 한다. 시시때떄로 부조리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오히려 가족의 본질일진대, 그럼에도 가족의 가치만을 끝없이 찾도록 만드는 것. / p.109


해당 책은 선우은실 평론가의 첫 산문집이다. '생활비평'이라는 말을 가볍게 넘겼는데, 정말로 자신의 생활과 그 속에서 스치는 자신의 미세한 감정 한 올까지 잡아채어 비평하는 모습에서 평론가의 글이란 이렇게나 다르구나 감탄했다. 가정 내 '딸'이라는 위치, 비혼, 여성 등 자신의 위치에서 마주치는 이름 모를 감정이 평론가의 눈에서 문장으로 해석된다.




사실 '에세이'라는 장르와 '생활'이라는 주제에서 기대되듯 누구에게나 술술 익히는 류의 책은 아니다. 첫 문장부터 '이 책은 불편하게 디자인되었다'라고 박아두고 시작하는데, 사실 전형적인 평론가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이 한 번에 와닿지 않고 여러 번 곱씹게 만들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독자가 스스로 사유하지 않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이는 글에서 끝난다. 


하지만 이 주제가 보편적인 여성들에게 전부 통용되는 만큼 그 촘촘한 비평과 쌓아 올려진 문장은 나 자신을 날카롭게 파고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어렵게 느끼더라도 차분하게 읽어준다면 좋겠다. 타인에게 (제멋대로) 기대했다 실망했던 마음, 웃기지 않은 것에 웃어주면서 사회성이라는 이름을 덮어씌운 나날들, 외부의 변화에 자신을 놓쳤던 나날들, '여성'이라는 속성이 범죄의 조건이 됨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 무엇인지 모르고 찝찝한 채로 흘려보냈던 많은 감정과 그 근원들에 저자가 말하는 속성을 붙여보며 저자가 자신을 풀어낸 글에서 외려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인간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잘 견디기 위해, 나를 이해하기 위해 타인을 알아가 보려는 노력을 하고자 한다. 앎이라는 것은 힘strength 이기도 하지만 힘이 드는effort 일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너무나 쉽게 쓰이는 '타인을 깊이 이해한다', '너무나도 동감한다'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나를 위해 타인을 이해하기를 선택했다는 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솔직한 고백에서 오는 온기가 마음을 파고들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한참을 머물렀다.   



버티는 것이 변하지 않기를 고수하는 일이라면 견디는 일은 변하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 p.191


+ 이전에 임선우 작가의 『초록은 어디에나』(자음과모음, 2023)을 읽으면서 버티다와 견디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어느 길도 보이지 않을 때 최소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온 몸으로 압력을 받아내는 것이 버텨낸다는 것이라면, 견딘다는 것은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당시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면서 풀어서 썼는데 저렇게 한 줄로 설명 가능할 줄이야. 이마를 탁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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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딥페이크 성범죄부터 온라인 담론 투쟁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들
한국여성학회 기획, 허윤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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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은 그것을 공정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와 언제나 함께해왔다. / p.259


범죄는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특히 요즘의 범죄는 오프라인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 더욱 가혹하게 벌어진다. 성범죄는 디지털 세계로 넘어가며 더욱 교묘하고 가혹해졌으며 이미 거대 산업이 되었다. 그러나 사법부의 관점과 디지털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철저하게 분리된 세계로 보며 과거와 동일한 기준으로 처벌이 내려진다. 피해자의 고통은 온라인이라 하여 실제로 당하는 것보다 더 가벼울까.



해당 책은 현재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정의하고 그 산업을 집어주며 현행법상이 얼마나 미흡한지 꼬집는 1장, 페미니스트 인공지능의 가능성과 IT업계의 윤리 편향 등을 말하는 2장, 신자유주의 하에서 능력주의가 젠더가 만나 빚어지는 갈등과 공정이라는 환상에 대해 말하는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어 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먼저 시작한다. 폭력과 살인, 신체 훼손과 시신을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인데, 여기서 특히 여성의 신체는 좋은 자본 축적의 수단이 되고, 남성들은 여성을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 개념에서 파생되는 말이 '고어 남성성'인데 현재 한국의 남성들이 지키려는 남성성을 정의하는데 쓰인다.

어렵지 않게 N번방을 생각하면 된다. 또 많은 유튜브 렉카들이 해당된다. 여성 신체를 훼손하고, 뒤에서 여성을 협박하여 이중으로 돈을 챙기는 시스템. 그러면서 '페미는 비정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마녀사냥처럼 여성들의 sns를 뒤져 밥줄 뺏기를 하는 놀이.


이 파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여성, 특히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를 범죄자로 만드는 놀이를 하면서 자신들을 "선량한 일반 남성"이라고 정의내린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범죄자와 페미니스트를 같은 선상에 놓기 때문에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부를 때 크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선량한데, 페미랑 동급인 범죄자에 놓는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3장이 가장 재미있었다. 나는 능력주의를 표방하면서 공정한척 하며 차별 구조를 공고히 하는 신자유주의에 관심이 많은데, 능력주의와 젠더가 만나 어떤 현상을 낳는지, 그 능력주의 마저 여성을 차별하는 사실에 공감이 가면서도 가장 이입이 많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OECD 가입 이래 성별 임금 격차부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여성이 남성보다 못하기 때문에? 내가 고등학교를 나온 지역에는 남고가 있었는데, 학부모들은 "성적에서는 여자애들을 이길 수 없으니 남고를 보내서 내신을 확보해야한다." 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했다. 실제로도 여성이 남성보다 성적이 높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와 블라인드 채용으로 넘어가면 2017 공공기관 채용 기준 1차 서류 통과율은 남성보다 여성이 근소하게 높다. 그러나 면접을 거치면 여성 합격자 비율은 큰 폭으로 낮아졌다. 이 일은 어떻게 설명 되는가. 여성 지원자들의 사회성 부족? 그러나 무슨 일만 생기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소프트 스킬은 여성들한테 있지' 하면서 분위기 메이커로 여성을 앞세우지 않나? 너무 옛날 일인가. 그럼 2023년부터 2021년까지 공무원 양성평등 채용목표제로 추가 합격한 인원은 남성이 여성보다 천 명 가량 많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까. 책에서도 말하듯 "능력주의는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는다."(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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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만 놀랍게도 전혀 어렵지 않다. 들불처럼 번지는 딥페이크 범죄와 다른 형태로 여전 존재하는 N번방들, 여성의 신체를 팔아 돈을 버는 BJ들 등 어렵지 않게 관련 사례가 떠오르고, 그 사례들이 이 책의 문장들을 만나면서 시야가 확대된다. 심지어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되기까지 한다. 현 시점에 충분히 고민이 되는 문제들과 그 기반이 되는 그들의 생각, 해결하지 못한 이유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방향성 제시까지 너무나 좋은 저서였다. 2024년의 한국 사회에 발을 딛고 있는 페미니스트라면 반드시 생각해야하는 의제들이 많아 여성학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경험을 말하자면 일할때 남성들은 두세시간에 한번씩 담타가지면서 서로 밀어주자고 온갖 기회를 주는데, 여자들은 그 시간에 일했다. 그들이 30분씩 자리를 비운 동안 밀린 일거리까지 처리했다. 실적이 우수한 사람도 여성이었다. 그리고 승진은 남성들이 먼저 했다.


++ 여성의 몸이 지켜줘야만 하는 보잘것없는 남성성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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