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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
선우은실 지음 / 읻다 / 2024년 10월
평점 :

고통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이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 p.235
진짜 좋았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사실은 제목만 보고 '웃기지 않은 일에 웃지 않는 일', 사회가 웃기지 않은 일을 가지고 웃기다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마음가짐 그 정도의 가벼운 산문일 줄 알고 이동 중에 읽었는데 예상외의 묵직한 맛에 연필을 쥐고 자리 잡고 앉아서 차분히 한번 더 읽었다.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건 생각보다 더 일상적으로 그리고 무참하게 움직인다. (···) '모든 가정엔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따위의 말로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폭력과 상처와 불가해한 일을 그저 '가족의 일'로 묶어버리기도 한다. 시시때떄로 부조리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오히려 가족의 본질일진대, 그럼에도 가족의 가치만을 끝없이 찾도록 만드는 것. / p.109
해당 책은 선우은실 평론가의 첫 산문집이다. '생활비평'이라는 말을 가볍게 넘겼는데, 정말로 자신의 생활과 그 속에서 스치는 자신의 미세한 감정 한 올까지 잡아채어 비평하는 모습에서 평론가의 글이란 이렇게나 다르구나 감탄했다. 가정 내 '딸'이라는 위치, 비혼, 여성 등 자신의 위치에서 마주치는 이름 모를 감정이 평론가의 눈에서 문장으로 해석된다.
사실 '에세이'라는 장르와 '생활'이라는 주제에서 기대되듯 누구에게나 술술 익히는 류의 책은 아니다. 첫 문장부터 '이 책은 불편하게 디자인되었다'라고 박아두고 시작하는데, 사실 전형적인 평론가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이 한 번에 와닿지 않고 여러 번 곱씹게 만들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독자가 스스로 사유하지 않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이는 글에서 끝난다.
하지만 이 주제가 보편적인 여성들에게 전부 통용되는 만큼 그 촘촘한 비평과 쌓아 올려진 문장은 나 자신을 날카롭게 파고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어렵게 느끼더라도 차분하게 읽어준다면 좋겠다. 타인에게 (제멋대로) 기대했다 실망했던 마음, 웃기지 않은 것에 웃어주면서 사회성이라는 이름을 덮어씌운 나날들, 외부의 변화에 자신을 놓쳤던 나날들, '여성'이라는 속성이 범죄의 조건이 됨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 무엇인지 모르고 찝찝한 채로 흘려보냈던 많은 감정과 그 근원들에 저자가 말하는 속성을 붙여보며 저자가 자신을 풀어낸 글에서 외려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인간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잘 견디기 위해, 나를 이해하기 위해 타인을 알아가 보려는 노력을 하고자 한다. 앎이라는 것은 힘strength 이기도 하지만 힘이 드는effort 일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너무나 쉽게 쓰이는 '타인을 깊이 이해한다', '너무나도 동감한다'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나를 위해 타인을 이해하기를 선택했다는 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솔직한 고백에서 오는 온기가 마음을 파고들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한참을 머물렀다.
버티는 것이 변하지 않기를 고수하는 일이라면 견디는 일은 변하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 p.191
+ 이전에 임선우 작가의 『초록은 어디에나』(자음과모음, 2023)을 읽으면서 버티다와 견디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어느 길도 보이지 않을 때 최소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온 몸으로 압력을 받아내는 것이 버텨낸다는 것이라면, 견딘다는 것은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당시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면서 풀어서 썼는데 저렇게 한 줄로 설명 가능할 줄이야. 이마를 탁 침.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