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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6월
평점 :

열세 명.
그 숫자에 눈살을 찌푸린 검사는, 사형 판결 선고 이후 집행까지 절차가 몇이나 되는지를 세어 보았다. 열세 가지였다.
13계단. / p.40
사형이 확정된 수감자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가석방된 전과자와 교도관이 익명의 후원가의 도움을 받아 재수사를 펼쳐나가는 이야기.
사형제 찬반 논의는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고 이를 소재로 한 이야기는 질리도록 많다. 사형제 관련 형법의 맹점에 대한 토의 역시 질릴만 하면 한 번씩 하게 되는, 그다지 독특한 소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여전히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앞부분이 재밌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읽는 내내 '이 소설이 왜 이렇게 유명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큰 감흥이 없었다. <억울한 사형수의 누명을 풀어준다>는 딱히 특이한 소재도 아닐 뿐더러 차라리 이 소설의 시점이 그 사형수의 입장이었다면 몰입을 빠르게 했겠지만 아예 제 3자가 발벗고 나서는 이야기라 독자 입장에서 이 사형수가 왜 억울한지, 어째서 사형을 당하면 안되는 것인지 초반에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교도관인 난고와 상해 치사죄를 지었으나 가석방된 미카미가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모습을 그냥 팔짱끼고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어디서부터 달라지냐면 4장 과거부터. 난고가 교도관의 입장에서 사형수들의 사형을 집행하는 이야기부터 무섭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사형제 관련 이야기를 피해자의 유족이나 가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이를 집행하는 교도관의 입장에서 바라본 건 정말로 처음이라 신선했으며(물론 내가 접하지 못한 소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 전혀 타입이 다른 두 명의 사형수를 대비시켜 사형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법의 허점을 맹렬하게 파고드는 이야기가 토론장에서 팽팽하게 다른 의견이 맞부딪힐 때 느껴지는 듯한 지적 쾌감까지 준다. 특히 피해자의 유족이 원하지 않는 사형 집행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법은 무엇을 위해 사형수의 목숨을 뺏는 것인지 구태여 고민하려 하지 않아도 소설을 읽는 행위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독자를 사형과 관련한 문제에 천착하게끔 만든다.
내일의 처형은 누구를 위해 진행되는가. 난고와 오카자키가 160번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피해자 유족의 의지와는 달리 범죄자에게 절대 응보를 과하는 것은 더더욱 범죄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아닐까.
p.204
후반부부터는 숨도 못 쉬고 읽었다. 소설의 앞부분에 작가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던져졌다면 뒤부터는 소설적 재미가 몰아치므로. 3장만으로도 내게 이 책은 어떤 소장용 가치를 갖게 되었는데, 다 읽으면 그냥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의미고 뭐고를 떠나 너무 재밌어서 품에 꼭 안게 되어버림... 한치의 어긋남 없는 완벽한 사회파 추리소설 그 자체.
이런 소설은 한 번 읽어 결론을 알게 되면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 어려운데, <13계단>은 언젠가 다시 꺼내 읽을 것 같다. 난고가 사형 집행을 하며 끊임없이 고뇌했던 그 질문들은 여전히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일로 남겨져 있고, 인간이 문명 사회를 이루어 집단으로 살고 있는 이상 절대로 정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들일테니. 후에 다시 읽을 나는 어떤 사건을 떠올리면서 어느 입장을 취하게 될까.
+ 일본의 범죄자 신상 완전 공개 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우리는 흔히 악질 범죄자를 왜 보호하냐, 모자이크 치워라 이런 말을 하지만 이게 사건의 진상과는 달리 언론의 입맛에 맞게 짜맞춰 악마화되기 쉬울 수도 있겠다. 그럼 중한 범죄자만 공개하면 되는것 아니냐 하겠지만 경중은 뭘로 나눠야하는가, 피해자의 수? 범죄 방법? 이것도 만약에 피해자나 유족이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걸까. 진심이라면 모르겠으나 가해자와 그 가족이 가서 협박을 해서 그에 못 이겨 불원희망서를 낸다면?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