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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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는 말해져야 할 시간에 말해지고 어떤 이야기는 말해지지 않아야 할 시간에 말해진다.
말해질 시간에 말해진 이야기는 살지만
혹은 살리지만
삶으로써 살리지만
말해지지 않을 시간에 말해진 이야기는죽는다.
혹은 죽인다.
죽임으로써 죽는다.
어떤 이야기는 살고 살리기 위해 말해질 시간을 기다린다.˝

-

참, 그래서 오랫동안 담아두는 이야기가 있다.
말해질 시간을 기다려
그 말이 그 때 그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그리하여 그 말의 온전한 뜻이 온전하게 다다르기를.

하지만 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대부분의 말들은 그 시기를 앞지르거나 뒤늦게 따라온다는것을.

그것을 이 책은 여러 단편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_

이 책은 모르는 사람들로 꾸며져 있다.
대체적으로 ‘아버지‘ 에 대해
몰랐던 이야기들.
거의 모든 챕터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같은 공간에서 살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
그의 지나간 시간을 관심있어하지도 않고,
같이 있었던 시간에 관심두지도 않았다.
말해질 시간을 기다렸지만
영영 오지 않았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때서야 시작된 반추된 그의 모습들은
그가 대꾸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 알게 된 모습들도 반쪽들뿐이다.
그가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히 주인공이 알아낸 모습들에서만 빚어진 그의 뒷모습은 결국 앞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마주보고 있었을 때 묻지 못했으므로.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같을 지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들에겐
모르는 사람들이며
우리는 누군가들을
모르는 사람들로 느끼며
끊임없이 모르는
누군가들을 만들어내며
살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겐 끝까지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나면 주변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를 .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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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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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순간은 아름답고 , 돌아오지 않기에 조금은 슬프며 , 돌아오지 않아서 방점을 찍을 수 없는 추억이 되는 방면에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라 아프고, 돌아오지 않기에 원통하며, 돌아오지 않아서 말줄임표를 찍을 수 밖에 없는 과거가 된다.

이 둘의 차이를 나는 , 동급생 그리고 아이히만 쇼에서 볼 수
있었다

우선 동급생.

화가였던 프레드 울만의 자전적인 이야기도 들어간 소설인 동급생은 , 유대인 소년과 독일 소년의 우정을 , 세잔의 그림을 보듯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독일 슈투트가르트를 배경으로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유년기에 대한 향수와 순진한 두 소년의 경험들이 화창한 봄날씨와 같은 풍경에 어우러져, 나치의 잔혹함에 더욱 더 극명히 대비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느낀건 무엇보다 독일에 직접 가보고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풍경 묘사를 너무나 아름답게 채색해놓았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감독이 소설을 쓴 것과 작가가 소설을 쓴 것을 보고 다른 점을 느꼈던 것처럼, 이번에는 화가가 글을 쓰면 이렇게 쓰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중요한건 , 여기서는 나치에 대한 언급은 전체 소설의 10분의 1도 되지 않지만, 그 10분의 1이 나머지를 압도한다는 점이 매력으로 보여진다.

오히려 언급하지 않으며 독자에게 이를 상상할 여지를 남겨주었다는 점이 오히려 더 깊게 생각하고 이야기에 몰입하게끔 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정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지만, 전속력이 아니라 이 부분에 감흥을 느끼고 저 부분에 호기심을 가지며 , 그렇게 요모조모 살펴보며 걷는 오솔길처럼 서술되어서,그 오솔길 끝에 다다랐을때 펼쳐질 감동을 더 극대화 시켜주었다.

진부하겠지만, 다른 모든 평들과 결론은 같다. 마지막 문장 한 줄이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왜 황순원의 소나기가 생각났지?- 아무튼 그런 작품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나치, 파시즘의 비극에 대해서 이러한 시점도 존재함을 느끼며, 그 때 그 주인공들은 아름다운 풍경에서 아름답게만 기억되기를. 그리고 그때 그 고통받던 사람들도 그 시절을 잊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아이히만 쇼 .

이는 나치의 사건의 그 후를 다루고 있다. 동급생이 나치의 잔혹함이 있기 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극채색화시킨 작품이라면 아이히만 쇼는 나치의 몰락 이후, 그 잔혹함이 있은 후의 고통에 대하여 영상이란 프리즘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마치 내가 다큐멘터리의 제작자이고, 감독이고, 시청자가 된 것같은 느낌으로 실제 아이히만 재판을 보며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제쳐두고서라도, 어떻게 아이히만은 저토록 침착하며 아무 감정을 못느끼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절로 들게 되었다. 그와 반대로 피해자들의 법정 진술은 또한 우리에게 분노와 이 시대를 살았던 자에게는 원통함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영화 제목이 아이히만 재판이 아닌, 아이히만 쇼 인 이유는 이러한 비극 앞에서도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이익에 따라서 이를 영리적인 '쇼'로 재탄생 시킴으로서 아픔을 자본으로 치환시키는 것 또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난 여기서도 악의 평범성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선의로 시작될 수도 있는 작업이었겠지만 말이다 - 이 영화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통받은 유대인의 아픔에 대해서 아이히만이 뉘우치는 것을 보고자 했던 허위츠 감독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벌백계, 가해자의 뼛속까지 뉘우치는 모습, 이런 것들을 얻진 못했어도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의 아픔, 고통을 외면했던 이들에게 더이상 무지에 의한 , 방관에 의한 악이 실현될 수 없도록, 다시는 악의 뿌리가 자라나지 못하도록 깊은 각인을 새겨주는 또 다른 성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파시즘, 나치에 대해서 같은 역사에 대해 극명히 다른 두 작품을 보면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내 삶에서, 내 가치관에 적용할지 자신에게 되물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나의 사실에 다양한 프리즘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기에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을 접해보고 싶다.

ps- 이 작품들을 보면서 위안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안부에 대해서는 아직 공론화가 활발하지 않아서 다양한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앞으로 이에 대한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감상을 남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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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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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러나 저러나, 한 인간이 성장해 가는 것은 운명이다
그 성장의 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작가는 글로 표현했고, 글로 치유했으며, 글로 기록했다.

끊임없이 상처받고, 고통받았던 자기 자신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글로 매끄럽게 나열해 놓았다는 것에 역시나...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가 아닌, 역시나...를 항상 달고 사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기도 했고, 부담일거같아 걱정도 되었다. 물론 공지영은 걱정하지 않아도 이미 두 발로 제 땅에 서 있는 사람이지만.

처음에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라는 제목을 보며 그동안의 공지영의 소설과 좀 다른 낯선 느낌을 받았다. 제목만 보면 민음사에서 펴낸 신인 작가들 소설 제목같아서, 코미디일지 발랄 로맨스일지 , 대체 무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첫 장에 시작하는 월춘장구-딱 지금 이 춘삼월, 춘사월 계절에 맞는 제목-를 보면서 단번에 흡입되는 몰입력은 역시나 !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소설의 첫 장을 넘기고 나서 바로 눈에 띄는 구절인 " 살 자리인 줄 알고 도망친 곳이 죽을 자리였고, 죽겠다고 도망친 곳이 때로는 살자리였다"(p.11) 는 ,월춘장구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모든 단편의 주인공 혹은 등장인물들에게 투영되는 내용이었다.

공지영 자신도, 할머니와 그 자식들도 , 어디엔가 있을 최인향의 언니도, 순례와 정례도, 심지어 병아리도, H도 신기자도 , 그러했다.

어쩌면 이는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일 지도 모른다.


운명이 생을 덮치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안다. 그 포충망 속에 사로잡히고 나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회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통을 중심으로 하여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느 것이다. 다만 하나의 슬픔의 계절이 있을 뿐이다. (p.195)

... 고통은 가장 긴 하나의 시간이다.(p.13)


언젠가 고통을 겪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었을 때 , 나도 모르게 감정에 동요가 일었다. 나 또한, 글-이라고 하기에는 비루하지만, 무언가 서술하고 문장을 나열했던 모든 행위들-은 고통스러웠을때 - 끝나지 않는, 측량할 수 도 없고 가늠할 수 없으며, 언제 끝날지 실측되질 않았던 - 그 고통에 겨워서 그것을 가눌 길이 없어 써제꼈던 것이다.

행복한 시간만을 가진 자들에게 가질 수 없는 그나마 제일 공평한 것이. 시간 그 뒤로는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행복한 자가 쓰는 글이 고통을 겪어던 자가 쓴 글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겐 한가지의 행복을 떠올리는 일보다 수만가지의 고통을 떠올리는 일이 더 쉽기에.

이 소설은 그러한 고통을 겪은 자들이, 또한 같으면서도 다른 제각각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작가와 소설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위안을 얻고, 그 고통을 잠시나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어쩌면 치유할 수 없을지 몰라도, 흙탕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진흙과 물이 분리되어 맑은 물만 위로 떠오르듯, 그러한 경험을 이 책을 통해서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끔, 아니 자주 , 남들보다 예민한 탓으로 고통을 좀 더 많이 느끼는 나에게는 오스카와일드와 프레모 레비, 빅터 프랭클의 글귀들에 많은 공감이 갔고 또 그러한 작가들에게서 공지영이 느끼는 감정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슬며시 나의 생에 스며들었다.

다시, 또 얼른 , 다음 책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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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유진 옮김 / 푸른숲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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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어떤 사람이 깨어나보니 유령이 되어있는데 자기가 죽었는지 모르는 영화를 본 적 있는가? 내 상황이 바로 그랬다.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 나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았지만 왜 그러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원하고 외치고 소리를 질러도 내 존재를 알릴 수가 없었다. 


긴 시간이었다. 눈을 감았다 눈을 떠도, 세상은 달라질 것 없어보였고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한 시간만 13년.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살아있는데, 사람들은 죽은것처럼 대하는 그 상황들이 어떠할지. 그 와중에도 그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그 수보다 배로 경험을 얻었으며, 체험을 하였다. 그 중에는 좋은 기억도 있지만 , 어둡고 음울한 기억도 있고 , 슬픈 기억들도 가득하다.

이 책은 그가 쓰러진 뒤 의식만이 깨어난 후부터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끔 옆에서 도와준 버나를 만나고, 그 뒤에 의사소통을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  와중에 자신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부터 이 책을 내기까지 옆에서 한결같이 있어준 부모님과 형제의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 만난 아내 조애나와의 이야기까지 그는 가감없이 이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 어떤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이. 우리가 하지 못할 그 모든것들을 침착하게 해내어 나가면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일깨워주고 있다.

처음에는 절망이 왔다. 올림픽에 절망의 여신보다 빨리 달리는 경기가 있다면 나는 분명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절망은 온 마음을 갉아먹는, 비틀리고 야멸친 여신이다. 공포에 갑작스럽게 배에 가해지는 서늘한 일격이고 외로움이 등을 짓누르는 육중한 무게라면,절망은 가슴에서 시작해 오장육부를 비틀린 금속으로 만들어 이내 온 몸을 삼켜버리는 괴물이다. 절망의 여신이 나를 감염시키면 온몸의 세포가 다 떨렸다. 
마지막으로 외로움이 찾아온다. 외로움의 여신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도 천천히 삶을 앗아갈 수 있어서 어쩌면 셋 중에 가장 무시무시한 여신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구원한 것은 외로움의 여신에게도 아킬레스 건이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외로움의 여신이 내게 감아놓은 고립의 실타래가 이따금씩 풀릴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순간은 시시때때로 온다. 주인공은 이러한 순간을 어떻게 보면 고집스럽게 버텨냈고, 또 물흐르듯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다. 처음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도, 주변에서 이를 믿지 못함에도 그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러한 과정은 독자들에겐 우리 또한 포기하지 말고 고통과 슬픔도 아킬레스 건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미지의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비행사처럼 약간은 붕 뜬 상태로 세계를 다니는 경험을 한다. 유령소년이었던(의식은 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시절)때와 달리 사물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되고 이에 따라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과거를 직시하지만, 빨려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앞을 바라보고 나아간다. 그렇게 되기까지 스스로의 내면에서 수많은 격렬한 고통을 안고왔겠지만, 과거의 고통과 절망과는 작별하고  사랑하는 조애나와 손을 잡고 밝은 빛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 희망의 미소를 안겨주었다.

우리에게도 물리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고, 나의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오지 않더라도, 삶을 살아가면서 이와 비슷한 정신적인 고립감을 느낄 때가 가끔씩 찾아온다. 외로움의 여신이 나를 찾아오고, 모든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올것이다. 그럴 때 나는 마틴을 생각하면서, 한 때는 유령소년이었고 엄마에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를 분노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간 작지만 큰 소년을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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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7-03-10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여기가 서재시군요 ㅎ 반갑습니다. 독서를 참 좋아하시는군요 ㅎ

역시 리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군요 ㅋㅋㅋ

likewind 2017-03-10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감사해요 리얼 좋아하는 분들은 다 좋으신것 같아요 ㅎㅎ 엘저넌에게 꽃을 이 책도 위의 책하고 비슷한데 재밌게 읽었어요!
 
JOY 기쁨의 발견 -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의 마지막 깨달음
달라이 라마 외 지음, 이민영 외 옮김 / 예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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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아 니가 필요해"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 했던 말이다. 처음에는 슬픔이에게 "이 원을 나오지 마" 라는 말을 할 정도로, 기쁨이에게 슬픔은 제재되어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슬픔이가 사라졌어도 라일라 인생에 기쁨만이 가득한 것도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인생에서는 기쁨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 영화는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다.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슬픔에서 시작되어도 마무리는 기쁨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지금 현재 현상이 슬픔이라던가, 분노 등으로 시작되어도 좌절만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갑자기 이 책을 설명하기 전에 엉뚱하게도 나는 인사이드 아웃을 이야기했다.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가 말하려던 것이 바로 인사이드 아웃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혹시 이 영화를 보면 두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실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책에서는 삶의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가 만나 약 일주일간 대화를 한 것을 적은 글이다. 사실 나는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아도, 데스몬드 엠필로 투투(투투대주교)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는 달라이 라마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항거한 이 분의 이야기도 상당히 마음에 와닿았다.

첫 장은 둘의 만남부터 시작하여 기쁨이란게 무엇인지, 그리고 절망이나 고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 한 것 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장은 기쁨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쓰여있는, 현실에서 시시때때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모든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두려움 스트레스 , 좌절과 분노, 슬픔과 비탄, 절망, 외로움, 질투  등등 ..그리고 세번째 장에는 기쁨의 여덟기둥이라 하여 관점, 겸손, 유머, 수용, 용서, 감사, 연민, 베풂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사실 기쁨이란 것은, 상당히 다양한 개념들이 섞여있기 때문에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했는데 , 저자 중 한명인 더글라스에이브람스가 자신의 시점으로 두분을 관찰하고 인터뷰 하며 또한 자신이 그 인터뷰 속에서 솔직하게 느낀 점들을 적어내려감으로서 그러한 다양한 개념들이 분산되지 않고 잘 융화되어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더불어 더글라스는 심리학적,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의 이야기에 현실적인 근거를 덧붙임으로서, 종교라던가 신실한 믿음 등이 없이 지내는 나에게 부담스럽거나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수긍할 수 있는, 하나의 가르침으로서 다가왔다.

또한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이러한 고통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삶에서 벌어지는 일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가, 즉 우리의 마음에서 오는 것을 설명함으로서,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더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정신의 면역력을 높이는 방법등을 첨부함으로서 , 우리가 이 사회에서 겪고 있는 사소한 스트레스부터 전 지구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인권문제, 폭력, 전쟁등에까지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나아가야 할 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투투대주교에게서 감명받은 것은, 우리가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화가 난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이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죄책감 또는 회의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한 점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기보단 이 상황을 인정하고, 이를 고쳐나갈 방법을 생각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이 우리에게 오히려 겸허함을 가져다 주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어 더 나은 방향으로 우리의 분노나 절망을 현명한 이기심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달라이라마와 투투 대주교는 이러한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달라이 라마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고, 투투 대주교는 이를 피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수양을 하지 못한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이러한 감정들을 우리가 스스로 피한다는건 힘들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투투 대주교의 말이 좀 더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둘이 일치하는 점은   위에서 인사이드 아웃을 이야기 했듯이 이 두분도 기쁨과 슬픔은 불가피하게 서로 엮여 있으며, 서로를 엮어주는 건 힘든 시간, 고통스러운 시간, 슬픔과 비탄이라고 한 점이다. 둘은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슬픔들에 대하여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긍정적으로 활욜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쁨의 여덟가지 기둥에 대해서도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제일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유머 부분이었다.

아마 유머, 이부분에 대해서 내 나름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 면접을 보았을 때 면접관은 한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조직의 리더가 되면 " 이라고 시작한 이야기는 (물론 나는 맨 마지막 신입사원인데 리더를 논한다는 데 좀 놀라웠다)

다섯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한명은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고", 하며 한 손가락을 접고

"두명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며", 두 손가락을 접고

"두명은  일도 안하고 놀기만 할것입니다" , 잔인하게 두 손가락을 접었다.


"리더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면접 예상 질문에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예상 외의 질문이기에, 당황하기도 했고 이러한 질문이야 말로 어쩌면, 정말 개인의 가치관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대학교 4학년때 학술제가 떠올랐다. 조별 과제의 흑역사, 하필이면 조장이었던 나,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1등을 했던 그때의 기억.


"유머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가 떠올랐다. 리더가 되면, 적어도 유머는 있어야 한다. 다만 남을 비하하거나, 기분나쁘게 하는 유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낮춤으로서 상대방이 친밀감을 가지게 하면서, 또한 남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긴 유머. 그런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술제때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한명, 한명은 주도적이진 않지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고, 한명은 이걸 해서 상금을 탈 바엔 알바를 뛰는게 낫다고 했으며( 그럼에도 상금이 나왔을때 정확히 N분의 1로 가져가긴 했다) , 나머지 두명은 연락두절이었다. (다행히 수업때 출석은 해서 과제에 대한 이야기는 쉬는시간에 겨우 했다) . 이때에도 나는 조장이라는 이름은 쓰지 않고 그냥 가볍게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고, 적당히 밀당을 하면서 꾸려나갔다.


이 책에서도, 이러한 유머를 적절히 그 둘은 사용하고 있었고, 기쁨의 한 덕목으로도 유머는 당당히 자리잡고 있었다. 달라이라마와 투투 대주교는 시종일관 웃음꽃이 피는 인터뷰를 형성해가고 있었고, 그렇기에 읽는 독자에게도 웃음을 줬다. 진정한 리더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기쁨의 한 덕목으로서 유머를 어떻게 다룰지도 내심 궁금했다.


그들은 유머에 대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다가가기 가장 쉬운 길이라고 소개하였으며, 자신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다면 사람들은 그가 젠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걸 알고, 스스로 무너질 줄 아는 사람을 누군가 다시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겸손과도 연결되어 이 겸손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게끔 하고, 세상속에서 자신들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게끔 도와준다고 하였다. 맞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유머를 가지면 (이러한 유머에 대해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다. 바로 버락 오바마의 '오바마 아웃' 제스쳐였다. 레임덕을 데리고 와서 키우고 싶다는 식의 농담을 했었던 오바마. 그러한 유머방식이 국민들에게 웃음을 주고, 상황을 유연하게 만들어주며 스스로 겸손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남에게 자신에게 기쁨을 만들어주는 모습이 다시 한번 상기되었었다.)


또한 인터뷰 내내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는 서로를 놀리며 이야기 하는데, 서로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도 이를 폄하하는 것이 아닌 유머로 되는 일은 그 유머의 깊은 이면에 '존중'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대주교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타인을 비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반대로 지금 이 둘의 유머에는 '이리와서 내 옆에 앉아 나를 웃음의 소재로 삼더라도 함께 웃으면 좋겠다. 그런 다음 너를 웃음거리로 삼아서 또 함께 웃자' 가 들어있다. '존중' 그 자체인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는다 해서, 당장의 고통과 슬픔, 분노나 스트레스가 완화될 지, 마음의 평화가 올 지, 기쁨으로 치환될 수 있을 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바꿀 수는 없더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관점'을 달리하여 상황을 바라보며 기쁨의 여덟 기둥을 조금씩 자신의 마음 속에서 넓혀 나간다면,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의 말이 점차 내 마음의 일부로 자리잡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바꿀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무엇이며, 만약 바꿀 수 없다면 싫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달라이라마가 말한 가르침인데 , 나에게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온 구절이다. 그동안에도 이런 가르침은 다방면으로 여러 사람에게 전해져 내려온 사실임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관점을 달리 보아 상황을 단순하게, 그리고 거시적으로 본다면 기쁨이라는 것이 단어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체화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바꿀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무엇이며, 만약 바꿀 수 없다면 싫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리와서 내 옆에 앉아 나를 웃음의 소재로 삼더라도 함께 웃으면 좋겠다. 그런 다음 너를 웃음거리로 삼아서 또 함께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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