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서문끝














제1부 반유대주의



이 세기는 혁명으로 시작하여
사건으로 끝난 주목할 만한 세기이다.
아마 그것은 쓰레기의 세기로 불릴 것이다.
ㅡ로제 마르탱 뒤 가르 - P81

‘시온장로 의정서‘ 같은 명백한 날조가 정치 운동 전체의 교본이 될 정도로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역사가의 과제는 더이상 날조를 폭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의 과제는 분명 정치적 · 역사적인 사건의 진상, 즉 날조가 믿어진다는 사실을 간단히 처리하는 설명을 꾸며내는 것이 아니다. 

날조가 믿어진다는 사실은 그것이 날조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단지이차적인) 정황보다 더 중요하다. - P89

유대인은 국가의 첫 걸음에 기꺼이 재정 지원을 하려는 유일한 집단이었으며, 자신들의 운명을 향후 국가의 발달과 연결시켰던 집단이었다. 그들이 보유한 자금과 국제적 관계 덕분에 유대인은 국민국가가 그 시대의 가장 큰 기업과 고용주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훌륭한 위치에 있던 것이다." - P105

19세기 무렵에 제국주의가 등장하면서 유산계급은 국영사업을 비생산적이라고 진단했던 과거의 평가를 바꾸기 시작한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더불어 폭력 장치가 점차 완벽해지고 그 장치를 국가가 절대적으로 독점하면서 국가는 사업을 하는 흥미로운 기업이 되었다. 이는 물론유대인이 누렸던 독점적이고 독특한 지위를 점차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06

결국 가장 안전한 자본 투자의 방법으로 간주되던 정부 발행 채권을 입수할 수 있는 자유가 평등권 자체를 상징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즉 국제전을 치러낼 수 있는 국가는 시민의 재산을 실질적으로 보호할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 P107

근대적 반유대주의의 시작은 어디에서나 19세기 후반의 마지막 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에서 근대적 반유대주의는 예기치 않게 또다시 귀족들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귀족은 프로이센이 1871년 이후 왕정에서 국민국가로 전환하면서 국가에 대립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 제국의 실질적 설립자인 비스마르크는 수상이 되면서부터 유대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제 그는 유대인에게 의존하며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규탄받는다. 정부 기구 속에 잔존해 있던 대부분의봉건적 유산을 제거하려던 그의 시도와 부분적 성공은 어쩔 수 없이 귀족과의 갈등으로 귀결되었다. 귀족은 비스마르크를 공격하면서 그를블라이히뢰더의 무고한 희생양이나 매수된 하수인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그들의 관계는 그 반대였다. 블라이히뢰더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스마르크가 높이 평가하여 매수한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 P131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반유대주의 운동은 귀족이 주도했고 그 합창단이 소시민으로 이루어진 요란한 폭민이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독일의 경우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기독교적 사회주의와 프랑스의 반드레퓌스파에도 해당된다. 이들 나라에서 귀족은 절망적인 마지막 투쟁에서 기독교라는 무기로 자유주의와 싸운다는 그럴싸한 구실을붙여서 교회의 보수 세력-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 독일의 개신교 교회과 동맹을 맺으려고 기를 쓴다. 폭민은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목소리를 더욱 크게 울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들이폭민을 조직할 수도 없었고 원치도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목적이 달성되면 이들을 해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폭넓은 층의 국민을 동원하는 데 반유대주의 슬로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P135

쇠너러는면허권의 기한 연장에 반대하는 서명을 4만여 명에게 받았고, 유대인문제가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로스차일드가와 왕정의 재정적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정부가 국가나 사회에 명백하게 불이익이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허가기간을 연장하려 했을 때 온 천하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쇠너러의 문제 제기와 여론 선동이 오스트리아 반유대주의 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독일인 슈퇴커의 선동과는 반대로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의심의 여지 없이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따라서 이 운동이반유대주의를 선동의 무기로 사용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즉각적으로범게르만주의를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이 범게르만주의는 독일의 다른반유대주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깊은 영향을 나치즘에 미쳤다.
- P144

드레퓌스 사건은 이데올로기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19세기 반유대주의가 함축한 모든 요소를 완전히 들춰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국민국가의 특수한 조건에서 생성한 반유대주의의 정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폭력적형태는 미래의 발전 과정을 예시하기 때문에 그 주요 당사자들은 30년이상 미뤄질지도 모르는 공연의 마지막 총연습을 무대에서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사건은 유대인 문제를 19세기의 중심부에 세웠던공공연하거나 비밀스러운 모든 힘, 정치적이고 사회적 원인을 모두 한데 끌어 모았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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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3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짝짝짝 👍

미미 2022-10-03 23:14   좋아요 1 | URL
아렌트에 대한 애정으로 읽고 있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