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번의 저녁이 지나가는 동안 거실은 빛과 온기로 가득한 섬이 된다. 우리 네 명은 아버지가 밀리에 요우르날렌지‘에 나오는 집을 본떠 만든 인형 극장의 뒤쪽 벽에 붙어 있는 종이 인형들처럼 언제나 거기 있다.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고, 바깥세상은 침실이나 부엌처럼 얼어붙을 듯 춥다. 거실은 시간과 공간 속을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난로에선 불꽃이 으르렁거린다.  - P17

아이마다 자신만의 어린 시절이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진실이 있음을 안다.  - P29

생활 보호를 받으면 투표권이 상실되었지만, 어쨌건 우리는 굶주린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내 뱃속은 언제나 뭔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경험을 통해절반의 굶주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딱딱해진 페이스트리와 커피만으로 며칠씩 때우다가 더 잘사는 집의 문가에서 흘러나오는 저녁 식사 냄새를 맡을때 느껴지는 허기였다. 내가 먹던 페이스트리는 책가방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담으면 25외레였다. - P34

아버지는 절대로 나를 때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읽은 모든 책은 아버지의 책이었다. 내 다섯 번째 생일날에 아버지는 그림 형제의 옛날이야기」한 권을 내게주었는데, 무척 멋진 판본이었던 그 책이 없었다면 내어린 시절은 회색빛으로, 음울함으로, 결핍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 P36

한번은 내가 "비탄‘이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막심 고리키의 작품에서 발견한 그 표현이 몹시 마음에 들었었다. 아버지는 말려 올라간 콧수염 양 끝을 쓰다듬으며 그 단어에대해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러시아어에서 온 단어야. 고통과 비참함과 슬픔을 뜻하는 말이란다. 고리키는 위대한 시인이었지."
나는 기쁨에 차서 말했다. "나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곧바로 얼굴을 찡그리더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어!" 상처받고 화가 난 나는 다시 내 안에 틀어박혔고,
그러는 동안 어머니와 에드빈은 그 터무니없는 생각을비웃었다. 나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내 꿈을 털어놓지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고는 어린 시절 내내 그 맹세를 지켰다. - P37

지금은 저녁이고, 나는 언제나처럼 침실의 차가운 창턱에 올라앉아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내게는 하루 중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두려움의 첫 번째 파도는 가라앉았다. 아버지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한 뒤에 따뜻한 거실로 돌아갔고, 문 뒤쪽에 쌓인 옷들은 더 이상 나를 겁나게 하지 못한다. 나는 신의 자애로운 눈동자를 닮은나의 저녁 별을 올려다본다. 조심조심 나를 따라오는그 별은 낮보다 내게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나는 내 안에 흘러 다니는 모든 말들을 글로 쓸 것이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은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온 그말들을 읽을 테고, 결국 여자가 시인이 될 수 있었다는사실에 놀랄 것이다.  - P39

내 안의 말들을 어딘가 적어놓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다. 하지만 그런 글들을 대체 어디다 숨겨 놓을까? 심지어 우리 부모님에게도 잠글 수 있는 서랍은 없다. 2학년이 된 나는 찬송가를 쓰고 싶어 한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말들이 그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등교 첫날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주여 감사와 찬미를 받으소서, 우리가 너무도 평화롭게 잠잤나이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새처럼활기차게, 바다의 물고기처럼 기운차게, 아침 햇빛이창유리로 들어오니‘ 부분에 이르렀고, 나는 너무 행복하고 뭉클해진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고, 그걸 본 아이들은 모두 나를 비웃었다.  - P39

나는 구름 한 점 없이 비단결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하늘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창문을 연다. 마치신이 그 너그러운 얼굴을 천천히 땅 위로 낮추고, 그분의 거대한 심장이 부드럽고 평온하게, 내 심장 아주 가까이에서 뛰는 것만 같다. 커다란 행복을 느끼자 길고우울한 시 구절들이 내 마음을 뚫고 지나간다.  - P42

어린 시절은 관棺처럼 좁고 길어서,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거기서 나갈 수 없다. 그것은 늘 그 자리에 있고, 모두가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 P46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 당신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그것을 감지한다. 각각의 유년기는 특유의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서 남들보다 나쁜냄새가 날까 봐 두려워한다. 당신이 어딘가에 서서 석탄과 재냄새가 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소녀가 당신의 삶이 풍기는 끔찍한 악취를 알아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 - P47

그런 지름길을 모른다면 당신은 어린 시절을 견뎌야만 한다. 매시간 그 속을, 그 절대로끝나지 않을 시절 속을 터덜터덜 걸어가야만 한다. 오직 죽음만이 당신을 거기서 해방시킬 수 있기에 당신은 오랜 시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어느 날 밤에는 죽음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한다. 그때 죽음은 당신의 눈꺼풀이 다시 열리지 않도록 입맞춤해 줄 하얀 로브 차림의 친절한 천사가 된다.  - P48

어린 시절은 캄캄한, 지하실에 갇힌 채 잊혀 버린작은 동물처럼 언제나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추운 날 나오는 입김처럼 당신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그것은 가끔은 너무 조그맣고, 또 가끔은 너무 크다. 정확하게 딱 맞는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을 벗어던진 뒤에야 당신은 그것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고, 마치 극복한 병처럼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 P51

우리는 어디로 방향을 틀더라도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맞부딪히고, 그단단하고 뾰족한 모서리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는다.
그 일은 수많은 상처들이 우리를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 놓은 뒤에야 멈춘다.  - P53

나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 주고 나를 이해해 주는 어떤 신비로운 사람을 만나는 꿈을 꾼다.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어린 시절의 거리에서는 그런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없다. - P56

그 순간,
나는 에드빈이 내게서 멀고, 경이롭고, 잘생기고, 쾌활한 존재였던 그 모든 시절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그가 좋아진다. 그 어떤 것에도 기분이 나빠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그는 별로 사람 같지가 않았었다. - P97

아버지는 내가 도서관의 시집들을 집까지잔뜩 지고 오지 못하게 하고, 결국 나는 산문이 담긴 책속에서 시들을 찾아내야 한다.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들이야." 아버지는 경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시들은 현실하고 아무 관련이 없어." 나는 현실을 좋아해 본 적도 없고, 현실에 관해 쓰지도 않는다. 내가 헤르만 방‘의 「길가에서」를 읽고 있으면 아버지는 두 손가락 사이에 그 책을 끼워 들어 올리고는 온갖 싫은 티를 다 내며 말한다. "이 사람이 쓴 건 아무것도 읽어선안 돼.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정상이 아니라는게 끔찍하다는 건 나도 안다. 정상인 척하려고 애를 쓰느라 나도 나름의 고생을 하고 있다. 그래서 헤르만 방역시 정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되레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 P100

에드빈은 훗날 내게 말하게 된다. 자기는 사실 그시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고. 물론 그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쓴 거였다면 말이지만 "시 전체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 그냥 죽도록 웃을 수밖에 없어." 에드빈은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의 칭찬이 기쁘다. 그 시가 거짓말이라는 점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진실을 드러나게 하려면 이따금씩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안다. - P101

한때 나는 젊었고 환히 달아올랐지
웃음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서
나는 얼굴을 붉히는 장미 같았네
이제는 늙고 잊힌 사람이지만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내 다른 시들은 모두 에드빈이 말한 것처럼 여전히 ‘거짓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사랑을 다루고 있었고, 쓰인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나는 애정을 쟁취하는 흥미로운 일들로채워진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다. - P110

나는 버림받아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오직 밤과 빗줄기와 나의 말없는 저녁 별만이, 그리고 나의 시 노트만이 그 무렵의내게 실낱같은 위로를 안겨 주었다.  - P117

 "잘 가요, 학생." 그가 말한다. 나는 온통 부서진 희망들을 끌어안고 어찌어찌 문 밖으로 걸어 나온다. 천천히, 아무런 감각 없이, 나는 도시의 봄을, 다른 사람들의 봄을, 다른 사람들의 기쁨 어린 변화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뚫고 걷는다. 나는 절대로 유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내 시들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
나는 술을 안 마시는 착실한 숙련공과 결혼하든지, 아니면 연금이 나오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죽도록 실망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시 노트에 다시 글을 쓴다. 아무도 내 시들을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시를 써야만 한다. 시가 내마음 속의 슬픔과 갈망을 무디게 만들어 주니까.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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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06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동의 밑줄 (ʘ̥ᨉʘ̥)

미미님 오후의 커피
요기

✧* ∧⋈∧✧*
°* (๑•ᴗ•๑)
*゚o🍔☕o゚

청아 2022-09-06 12:38   좋아요 1 | URL
읽을 때 너무너무 좋았는데 리뷰를 어찌 써야하나 막막합니다.
그냥 꼭 다 읽어보라고 강요하고 싶은 마음ㅋㅋㅋㅋ
스콧님 차와 간식 잘 먹고 마실께요!후훗*^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