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한국, 아시아와유럽, 라틴아메리카 등 지구상의 모든 나라와 지역에서 일어났던 전쟁과 혁명, 폭력과 권력을 위한 투쟁, 그것들에반대하기 위한 투쟁,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격렬하고 조용한 투쟁과 뼈에 사무치도록 처절하기도 하고 닭털처럼 사소하기도 한 싸움, 행동으로 나타나는 투쟁과 마음속으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암투, 그리고 감정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모든 가해행위 가운데 인간의사랑이나 존엄과 무관한 것이 있을까요? 이 모든 유형의싸움과 투쟁 가운데 사랑과 존엄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게 있을까요?
- P8

소설은 삶의 많은 진실을 유일하게 대변한다. 그렇다면소설의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기로 하자. 어떤 진실한 삶의모습은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실한 경지에도달할 수 있다.
- P15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글씨 왼쪽에는 다섯 개의붉은 별이 빛을 발하고 오른쪽에는 물병 달린 장총이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풍성하게 수확한 보리이삭이 새겨져 있었다. 사단 전체가 본받아야 할 모범 인물이요, 전형적인 조직형 인물인 고참 공무분대장은 이 나무팻말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남달리 알고 있었다. 다섯 개의 별은혁명을 의미하는 것이고 물병과 장총은 전투와 역사, 그리고 길고 험난한 혁명의 역정을 의미했다. 또한 보리이삭은풍성한 수확과 아름다운 미래, 공산주의가 실현된 이후의찬란하고 아름다운 세월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P16

이때부터 사단장이 출근하고 나면 소련 사람들이 지은 이 병영의 양옥 건물 안에는 서른두 살인 사단장의 아내 류렌과스물여덟 살인 취사병 겸 공무원 우다왕만 남게 되었다.
마치 커다란 꽃밭에 신선한 꽃나무 한 그루와 호미 한 자루만 남은 것 같았다.
- P22

지금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쇠사슬 가운데 한 고리가위층에 있기 때문에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P28

방 안은 불이 꺼진 채 온통 황혼처럼 어두침침했다. 방안에 놓인 침대와 탁자, 의자가 끈적끈적하고 걸쭉한 분위기 속에 진흙탕처럼 뒤엉켜 있었다. 류롄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마오쩌둥 선집》 1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우다왕이 전에 먹던 사탕 맛을 음미하듯 과거를회상하게 되어서야 그날 그 황혼의 어두침침함 속에서는절대로 책을 볼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31

세월이 흘러 가늘고 촘촘한 체 또는 여과기에 걸러 이시간을 진지하고 변별력 있게 분석해보면 우리는 우다왕과 류롄의 사랑과 모험에서 우다왕이 처음부터 공모자였다는 대담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그럴듯하게는 그가 흐르는 물에 배를 띄우듯 지극히 자연스럽고 순리적인 협력자이자 공모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목욕하는 동안 그의 두 손은 떨렸고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우다왕의 가슴 속에서 놀란 말이 미친 듯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비누 두 개가 떨리는 그의 손에서 여러차례 미끄러져 떨어졌다.  - P59

그때부터 취약하고 부실했던 그의 내면 가장 깊은곳의 진지와 보루는 완전히 점령당했다. 그 순간 우다왕은옷만 입으면 곧장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그녀가 도대체 자신이 어떤 일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나무팻말에 적힌 문구의 감춰진 의미와 비밀이 무엇인지 분명히 확인하고 싶었다. 신비한 동굴을 발견한 아이처럼 동굴 안이 어떤 모습인지 끝까지 들어가 보고 싶은다급한 심정이었다.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가 그녀의 침실문을 열어젖히고 모든 걸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 P61

 방 한가운데 선 우다왕은 갑자기 강력한 불빛 아래 있는 땅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신비한 어둠에 완전히 흡수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구원을 요청하듯 시험 삼아 매력과 마력을 동시에 지닌 한마디를 내뱉었다.
"누님!"
"문 좀 닫아줘."
- P64

그의 사랑의 쾌속열차가 마음속 저항에 부딪히고 있었다. 곧 닥쳐올 성애의 절정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은 1분 1초 무정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둠이 방 안에서 하늘과 땅을 덮고 있었다. 뜨거운 불이방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사해四海가 분등하고구름이 분노하며 다섯 대륙이 진동하는 가운데 바람과 천둥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우다왕은 세 번째로 얼굴의 땀을 훔치며 그녀가 침대 위에서 자신을 향해 간절하고 따듯하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를 들었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그의 입에 그녀가 입을 대고 물 한 모금 넣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 P67

사실 과거든 현재든 아니면 미래든, 수많은 문제에있어 단순함이 항상 복잡함을 지배하는 법이었다. 단순함은 언제나 황제였고 복잡함은 신하에 불과했다. 수없이 복잡한 일도 표면을 벗겨내면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과 같은너무나도 간단한 문제들만 남았다. - P102

 여성 군복은 약간 헐렁했지만 남성 군복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젊은사람이 입으면 조금 늙어 보이고 늙은 사람이 입으면 다소젊어 보이며, 잘생긴 사람이 입으면 대중 한가운데로 떨어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못생긴 사람이 입으면 오히려약간 멋있어 보였다.  - P108

두 사람은 초조함과 애정의 목마름, 원한의 욕념을 품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마른 땔나무 한 무더기가 불붙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잠시 힘겨워졌다. 거대한 불길에 사방이 온통 짙은 연기로 뒤덮인것 같았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불꽃이 명멸하면서 짙은 연기가 하늘을 덮을 기세로 피어올랐다. 그때 류롄이 상황에가장 잘 어울리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군, 잘했어. 아주 잘했어."
- P119

 하늘과 땅처럼 영원하고 열광적인 그날의 키스와 애무로 인해 두 사람의 분명했던 관계는 복잡하고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곧게 쭉 뻗은 길이 원시의 숲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구부러져 종잡을 수없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깊은 곳에 오래 머물자 그녀의 두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마침내 처연하게 쏟아져 내렸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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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3-06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레커 작품들 재밌습니다.
광활한 대륙의 기운이 느껴지능 ^ㅅ^

미미 2022-03-06 10:57   좋아요 1 | URL
역시 스콧님👍 이 작품에 놀라서 다른 작품들도 다 빨리 읽어보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