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는 칭얼대지도 보채지도 않고부모가 쥐여 주는 장난감을 고분고분히 갖고 놀았다. 아이는 따돌림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깨닫고는, 모든 것을 다 보는지 아니면아무것도 안 보는지 알 수 없는 우묵하고 무감정한 눈으로 삶을관조했다. 공놀이에는 절대 끼지 않고 책 읽기와 고독을 즐겼으며, 햇빛을 끔찍이 싫어해서 볕에 나갈 때면 언제나 일단 멈춰 서서 눈을 찡그리고 눈썹 위로 손차양을 했다. - P48
아들의 습관적인 고립이 어쩌면 의사나 과학자의 무심한 태도가 아니라 신비주의자나 사제의 내적 침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아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는 불경하게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피터?" "금방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태연한 목소리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구나." "관찰하고 있었어요." "관찰하다니, 뭘?" "달을요." - P50
닭장의 닭들이 불구이거나 별난 구석이 있는 동족을 죽을 때까지 쪼아 대듯이, 동급생 아이들은 피터를 괴롭히고 조롱하고 암사내라며 놀려 댔다. 독기를 품은 그 말은 피터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다. 그러나 피터가 아이들에게 덤빈 적은 아버지가 주정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뿐이었다.
피터보다 몸놀림이 날쨌던 또래아이들은 슬쩍 피했다가 피터를 둥그렇게 에워싸고 서서는, 신이나서 눈을 반짝이며, 모질게 파고드는 ‘이‘ 소리를 똑같은 입모양으로 발음했다. 피터는 알았다. 그 아이들의 아버지들도 그리고할아버지들도 일찍이 또 다른 원을 이루고 서서, 누군가 다른 외톨이를, 다른 괴짜를 괴롭혔으리라는 것을,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장차 똑같은 원을 이루고 서리라는 것을. - P50
그렇게 아이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피터는 노회한 늙은이에게나 어울릴 지혜를 터득했다. 그들을 대적할 때에는 자신의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방식이 아니라, 피터가 깨달은 또 한 가지는, 지금 느끼는 이 새롭고 차갑고 불편부당한 증오의 표적이 단지 눈앞의 아이들만이 아니라 평범하고 부유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안온하게 살아가는 자들, 그러면서 그가 남몰래 그리는 ‘고든‘이라는 성의 이미지를 감히 더럽히려 드는 자들 모두라는 사실이었다. - P51
그렇게 피터는 가족의 좌절과그칠 줄 모르고 흐느끼는 바람 소리에 맞서 꿈의 책을 지었다. 그것은 도래할 세상의 청사진이었다. 피터는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되어 그 세상을 불러올 사람이었다. 그 세상이 오면 그는 프랑스의학자들 앞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어머니와 상냥한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옆에 조용히 비켜서 있을 터였다. - P52
"어이구, 우리 아들이야 당연히 훌륭한 의사감이지." 조니는혼자 앞날의 계획을 세우며 그렇게 말했다. "애가 평소에 책을 어떻게 읽는지 알아? 눈도 깜빡이질 않아. 당신도 눈치챘어? 바로그거야, 부릅뜬 눈, 우리 아들은 사실을 사랑해." - P55
피터는 정말로 사실을 사랑해서, 자기 방에 틀어박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었다. 열두 살에 이미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그림을 베껴 그렸고 히포크라테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책, 또 아버지가 이제는 포장도 뜯어보지 않는 의학 저널도 띄엄띄엄 읽었다. - P55
그러나 잠에서 깬 조니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볼 뿐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이번에는 로즈가 남편에게술을 한잔 마시라고 권했다. 로즈의 남편은 위스키가 고통을 없애준다는 말을 자주 했고, 지금 그는 고통 속에 있었으므로.
(또 위스키다ㅎ) - P63
"그림이에요. 아버지." 아버지라, 조니는 속으로 생각했다. 맙소사, 얼마나 무거운말인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림을 받아들었다. 그림은 다 해서 열 장이었고, 모두 강가에 자라는 식물의뿌리 구조를 그린 것들이었다. 조니는 눈을 감고 입술을 지그시물었다. 이토록 훌륭한 그림이라니, 여기에 비하면 그 자신의 솜씨는 얼마나 형편없던가! "정말로 자랑스럽구나. 나는 이렇게 잘그리질 못했는데." - P64
어느 늦은 가을날 오후, 눈을 몰고 올 찬 바람의 냄새가 강렬할 무렵, 조니는마을 뒤편의 산속에 왕진을 다녀왔다. 그곳에 사는 임신부에게서사산된 아기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운 좋은 아기야, 운도 좋지. 조니는 생각했다. 그 아기는 결코좌절할 일도, 냉혹한 자연의 섭리 앞에 두려워 떨 일도 없었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무너지는 그 섭리 앞에. - P65
피터가 벽을 따라 달아 놓은 선반들은시커떻고 묵직한 조니의 의학 서적 때문에 아래로 살짝 처져 있었다. 선반 위에는 박제한 땅다람쥐와 토끼 외에 비커와 증류기 같은 화학 실험 기구도 함께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피터는 학교에서 겪는 나날의 수난으로부터, 아이들의 조롱과 험담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을 얻었다. 그곳에서 의심할 것 없는 자신만의 세계에빠져들었다. 창고에 있는 자기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피터의 눈은 내면을 향했다. - P66
피터는 남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 주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어머니에게만은 예외였다. - P76
예전에 이곳에 출몰하던 주정뱅이는 양치기였다. 그 양치기는 암캐 한 마리를 술집에 데리고 들어왔는데 필은 인간들이 있는집에 짐승을 들이는 짓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 암캐는 양치기의발치에 엎드려 코를 킁킁대다가, 고개를 들어 주절주절 떠드는 주인의 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얼간이는 사람들의 귀가 욱신거릴 때까지 자기 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 암캐가 얼마나 영리한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얼마나 날쌘지, 얼마나 믿음직한지, 얼마나 고분고분한지, 그리고 정말이지 얼마나 귀여운지도. - P78
기억 속의 미서 전쟁 무렵, 미국과 에스파냐가 쿠바에서 전쟁을 하던 지난 세기 끝 무렵에 그는 얼마나 되바라진 소년이었던가. 그때는모든 도시의 모든 공원에서 관악대가 군가를 연주했고,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에는 어김없이 불꽃놀이 축제가 열렸다. 지나가 버린, 자랑스러운, 숨을 거둔 시절이었다. 그의 눈길이 브롱코 헨리에게 처음으로 머물렀던 때도 그 시절의 어느 날이 아니던가? - P89
목장 저택 앞의 언덕에 점점이 드러난 바위에서, 언덕 자락을 여드름처럼 흉하게 뒤덮은 세이지브러시 덤불에서, 그는 질주하는 개의 놀라운 형상을 보았다. 개의 날씬한 두 뒷다리는 튼튼한 양어깨를 앞쪽으로 떠밀었다. 더운 김을 뿜으며 아래로 수그린 주둥이는 북쪽 산의 골짜기와 능선과 산그늘로 도망 다니는 겁에 질린 어떤 것 - 어떤 생각 — 을 쫓고 있었다. 그 추적이 어떻게 끝날지 필은 머릿속으로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개는 먹잇감을붙잡을 운명이었다. 그는 눈을 들어 산을 보기만 해도 그 개의 숨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개가 그토록 또렷이 보이는데도 그 형상을 알아본 이는 필 말고는 딱 한 사람뿐이었고, 조지는 결코 그 한 사람이 아니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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