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아르는 이런 질문을 던져요. 분명히남녀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인데 여자는 왜 한 번도 저항을 안 하지?‘ 신기하다는 거예요. 다른 모든 곳에서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면 자기를 주체로 세우고 외부를 타자로 세우고, 이쪽이 주체면저쪽을 타자로 세우는 쟁투관계라는 게 성립이 되는데 여성은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한 번도 투쟁적이었던 적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예시들이 나와요. 프롤레타리아도, 흑인도 각각 ‘우리‘
라고 스스로를 모은다는 거죠. 그러면서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를, 흑인들은 백인들을 타자로 만든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들은 ‘우리‘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 P128

"여자들은 타자와 대결해서 싸울 수 있도록 자신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현실적인 수단이 없었계다". 흑인들이 그들 외부의 백인들을 타자로 이야기할 때, 주로하는 일이 뭐예요? 흑인들의 고유한 역사나 흑인들의 프라이드를 이야기하면서 주체가 되거든요.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한 게있다‘는 거죠. 노동자는 ‘역사의 주인, 노동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자본가라는 건 없어져야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자들은자신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현실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에 주체가된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보부아르는 여성들이 여성들만의 고유한 과거, 역사, 종교와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거나, 노동자 계급처럼 노동으로부터 비롯된 연대감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같이 살지도 않는다는 거죠.
- P129

 "여자들은 주거·노동·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매이고 아버지나 남편 같은 남자들의사회적 신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자들보다 남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 사이에서 분산되어 살고 있다."
- P130

"부르주아 여성은 부르주아 남성과 연대성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여성과는 관계가 없다. 백인 여성은 흑인 여성이아닌 백인 남성과 연대한다."
ㅡ시몬드 보부아르 - P131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책, 페미니즘 저작들은 추상적으로
‘인류가………‘ 이렇게 시작하는 책은 없어요. 대체로 사사로운 경험, 내가 느꼈던 불쾌함에서 시작해요. 왜 그럴까요. 그 작은 것,
일상적인 것이라고 하는 그거라도 잡아야지 구체적인 수단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제2의 성》 2부도 마찬가지에요. 읽으면왜 이렇게 자세히 묘사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세하게 묘사를 하는 건 그래야만 여자가 주체가 될 수있기 때문인 겁니다. 이러한 묘사를 읽는 여성들은 여성들이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돼요. 

그리고 그경험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함께 겪고 있고, 겪어왔던 일이라는 걸 확인하면서 다른 세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 P135

보부아르는 여자들이 계속 주체가 되려고, 타자의 입장을벗어던지려고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세뇌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예요. 여성이 왜 주체가 될 수 없었는지,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짓눌려왔는지 역사, 신화, 운명 같은 것들을 하나같이 분석해주겠다는 거죠. 이렇게 분석을 하고 여자들이 이걸 많이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 여성이 원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구나.
오랫동안 압제가 가능했던 습속의 체제와 교육이 여성을 만들어왔구나. 더 이상 제2의 성이라는 위치에 만족할 수 없다‘ 이렇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 P137

남자들끼리의 우정만 다루는, 여자가 안나오는 드라마는 있어요. 그런 데서는 여자가 등장을 하더라도서비스를 해주거나, 주인공을 챙겨주는 엄마 같은 역할, 즉 중요하지 않은 역할로 나오고요. 로맨스 없는 남자극은 있어도, 로맨스 없는 여자극은 드물어요.
- P140

우리가 채택하는 관점은 실존주의 도덕이다. 모든 주체는기투企投를 통하여 자기초월로서 구체적으로 확립된다. 주체는 다른 자유를 향한 부단한 자기초월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유를 완성한다. 무한히 열려 있는 미래를 향하여 발전을 도모하는 것 외에는 눈앞의 실존을 정당화하는 길은없다. 초월이 내재로 떨어질 때마다 실존은 ‘즉자존재卽自存在가 되고, 자유는 사실성이 된다. 만약 그것에 주체가 동의했다면, 이런 전락은 하나의 도덕적인 허물이다. 만약이 전락이 주체에 의해 강제된다면 좌절과 압박의 형태를취한다. 그래서 그것은 두 가지 경우 모두 절대악이다. 자기실존의 정당화를 바라는 모든 개인은 이 실존을 자기초월의 무한한 욕구로 경험한다.

ㅡ보부아르

🍭🍭🍭🍭🍭 - P141

실존철학의 근본적 명제 중 하나인 기투는 그래서 발생해요. 한 번 초월을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한 번만이 아니라 다시 이 상황에 벗어나기 위해 또 초월하고, 또 초월하고, 또초월한다는 거죠. 기투, 그러니까 자기를 던지고, 초월해서 던지고, 결단하고, 선택하는 그 과정에서 부단하게 자기의 자유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데, 그런 자기의 실존도덕 앞에서, "야, 지금이렇게 사는 게 행복이야"라고 하는 건 나를 기투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이건 "부자유가 행복이야"라고 하는 거랑 다를 게 없지않느냐는 거고, 보부아르는 철학자로서 이런 식의 행동은 도무지용납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 P142

"무한히 열려 있는 미래를 향하여 발전을 도모하는것 외에는 눈앞의 실존을 정당화하는 길은 없다"ㅡ보부아르 - P142

 "초월이 내재로 떨어질 때마다 실존은 즉자존재自存在가 되고, 자유는 사실성이 된다"라고 쓰죠. 초월vercome한다는 건 자기 조건 자체를 넘어서려고 한다는 거잖아요. 넘어서다가 넘어서려던 그 조건에 떨어질 때마다 실존은 ‘즉자존재 (존재하는 그 자체)‘가 된다고 하죠. 이건 헤겔의 용어인데, ‘즉자존재ansich‘와 ‘대자존재für sich‘가 있어요. 즉자존재는 자기가 놓여 있는 사물성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안에 새로운 규정이 없어요. 반면 대자존재는 이런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수업 한번 다녀오면 뿌듯한 게 있죠. 내가 좀 채워진 것 같잖아요. 여러분을 수업에 내던진 거잖아요. 일종의 기투를 한 셈이죠.
그래서 뭔가를 얻어냈잖아요. 수업을 겪어낸 거잖아요. 내용이생겼죠. 내가 제2의 성을 다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들어는 봤다는 거죠. 

그런 식의 상태가 대자존재예요. 대자존재는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 동일하게머무는 상태와는 다른 타자성을 겪어내야 하고, 그 타자성을 겪으면서 다시 자기로 돌아와야 해요.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은 사라지겠지요. 그런 점에서 대자재는 타자성을 겪어서 자기 자신을 좀더 알게 되는 상태로 이해할 수도 있어요.
🍭🍭🍭🍭 - P143

그에 비해, 즉자존재는 내용이 없는 상태예요. 아무것도배운 것 없이 그냥 멍하게 있는 거잖아요. 내용이 없는 상태를 ‘ansich‘라고 해요. 극복하고 초월하려고 한다는 건 자기의 어떤 내용, 속성들을 채워가는 건데, 즉자존재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대자존재는 채워요. 그리고 이 대자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타자라는 존재가 필요해요. 주체는 타자와의 쟁투 속에서 자기를다시 확인을 해요. 이 구도는 사르트르나 시몬 드 보부아르가 버리지 않는 구도예요. 주체가 되기 위해 타자가 필요하고 타자와의 쟁투를 통해서 초월하고, 그다음에 자기의 내용을 채워내면서대자존재가 되는 것. 이런 걸 변증법이라고 표현하죠.  - P144

"초월이 내재로 떨어질 때마다 실존은 ‘즉자존재 [존재하는그 자체]‘가 되고, 자유는 사실성이 된다. 만약 그것에 주체가 동의했다면, 이런 전락은 하나의 도덕적인 허물이다. 만약 이 전락이주체에 의해 강제된다면 좌절과 압박의 형태를 취한다

ㅡ보부아르,괄호 안은 김은주 - P144

이 ‘자유‘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자유를 어디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건 ‘프리덤freedom‘의 자유죠. 그런데 보부아르가 봤을 때 ‘어떤 쇠사슬로부터해방됐어‘가 자유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새로운 것을 쟁취하는 게 자유 lberty 예요. 누군가로부터 해방이 된다는 건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거잖아요.. 노예의 위치에 있었던 거죠. 노예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유의 내용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게 자유의 기본이죠. 보부아르는 리버티 liberty라는 자유의 입장에서 있는 거예요.
- P145

보부아르는 여성들이 타자이기 때문에, 이미 정해진 실존밖으로 나가는 초월이 불가능하다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묻죠. 페미니즘은 바로 ‘나 여기서 뭐하는 거지?‘라는 질문에서 각성하기 시작하죠. 다시 말해 내 실존, 내가 뭐하고 있는지정당화justify 한다는 거거든요. 보부아르는 ‘내가 여기 왜 살지?‘ ‘여기 왜 있지?‘ ‘이 의미가 뭐지?‘라고 묻는 존재는 언제나 여기 나의 상태를 넘어서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 P147

보부아르는 타자로서 여성의 위치를 이야기함으로써, 사실상 여성이 인간이 아니었고 결코 자유로운 적도 없었다고 설명을 해요. 실존철학은 여성을 타자의 지위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으로 실존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게 하는 중요한 방법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부아르는 여성 역시 인간임을 역설한다고 할수 있겠죠.  - P156

제1물결, 제2물결 페미니즘은 영미 페미니즘 운동을 근거로 많이 삼기 때문이에요.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참정권 운동이라든지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는 운동이 크게 벌어지는데, 1930년대부터 이 운동이 시들어요.
그리고 여성운동이라고 묶일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이 사라지면서1950년대까지 일종의 여성운동의 퇴조기가 와요.
- P164

서부에서 골드러시도 끝나고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세상이 변해요. 그 사이에 참정권 운동도 일어나는데,
이 운동은 1865년 남북전쟁 후에 흑인 남성에게까지 참정권을 확대한 수정헌법 14조에 여성 참정권도 포함할 것을 여성들이 요구하면서 전개됩니다.  - P164

20세기 이후에 소위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사상들은 ‘정말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게 있나?‘를 물어요. 우리의 선택은 문화적 조건, 권력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산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나의 선택을 했다‘라고 하지만 그 ‘나‘라는 말도 사실 교육을 통해서 배웠고, ‘선택‘이라는 말도 교육을 통해서배웠어요. 16세기 조선조하에서 노비가 "나는 자유가 있다! 똑같이 배우게 해달라!" 이렇게 할 수 없잖아요. 그 당시에 ‘노비의 선택‘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잖아요. 어떤 노비가 나는 자유로운선택을 했으니까 양반가를 벗어나겠다고 하면 추노당하는 거죠.
노비는 재산이니까요.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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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2-06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부아르는 여성의 당연했던 위치가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 사람.^^
그의 글은 일종의 혁명인 거죠.^^

미미 2022-02-06 11:23   좋아요 1 | URL
네! 문장에 그녀의 명징한 철학이 살아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