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우 샤흐트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음악가가 되기를 꿈꾼다. 그는 자신이 상상력으로 바이올린을 멋지게 연주할 수 있다고 내게 말하곤 한다. 그의 손을 바라보면 그의 말을 믿게 된다. 그는 잘 웃는다. 하지만 웃고 난 뒤에는 돌연 감상적인 멜랑콜리에 빠져드는데,
그것이 그의 얼굴과 자세에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어울린다. - P14

샤흐트는 규정들을 어기는 행동을 즐겨 한다. 터놓고 말하면, 나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침대에 나란히 누워 온갖 이야기들을 나눈다. 살아온 이야기들, 다시 말하면 직접 겪은 일들을 지껄인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꾸며낸 이야기들을 훨씬 더 많이 한다. 뜬구름 잡듯 지어낸 이야기들. 그럴 때면 우리를 둘러싼 벽들이 위아래로 흔들거리며 나지막이 울리는듯하다. 비좁고 어두운 방이 차츰 넓어지고, 길들, 넓은 홀들, 도시들,
성들, 낯선 사람들과 풍경들이 나타나고, 천둥이 치고, 누군가 속삭이고, 지껄이고, 우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 같다.  - P15

더 깎을 만한 구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따금 이발소로 달려간다. 그 기회를 이용해 거리 나들이를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발소에서 면도를 한다. 보조 미용사가 내게 스웨덴 사람이냐고 묻는다.
미국 사람? 그것도 아니라고요. 그럼 러시아 사람? 도대체 어느 나라사람이에요? 난 그런 종류의 민족주의적 색깔을 띤 질문들에 냉혹한침묵으로 답하는 것을 즐긴다. 조국에 대한 내 감정을 묻는 사람들을아리송한 상태에 놔두는 것이 좋다.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덴마크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종류의 솔직함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지루하게 만들 뿐이다.  - P24

예컨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화나게 하고, 나에 대한 좋지 않은견해들을 잔뜩 갖게 했다는 것을 끔찍하게 의식하며 죽음을 맞는 일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여겨진다. 이것은 이느 누구도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항 속에서 아름다움의 전율을 느낄 수 있는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겁 없이 저지르는 행동, 어리식은 짓거리 때문에 비참하게 죽는 것, 이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분명코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결국 천박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짓거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 P29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은 때로 너무나 유혹적이다. 그래서 그것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된다. 구속은 불법적인행동을 하고 싶도록 만든다. 그래서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구속을 사랑한다. 만약 어떤 규율도, 어떤 의무도 이 세상을 지배하지않는니면, 아마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너무나 지루한 나머지 입맛을잃고 굶어 죽거나, 불구가 되어버릴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다그치고,구속하고, 감독하기만 하면 된다.  - P31

시계를 팔았다. 궐련용 담배를 사기 위해서다. 시계 없이는 살 수있지만 담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나쁜 짓인 줄은 알지만 어쩔 수없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안 있어 입을 만한 말끔한 옷이 하나도 없게 된다. 깨끗한 셔츠 깃이 필요하다.
인간의 행복은 그런 일들에 달려 있지 않으면서 또 그런 일들에 달려있기도 하다. 행복? 아니다. 하지만 단정해야 할 필요는 있다. - P55

이곳의 훈련생이란흠잡을 데 없이 동그란 영(善)이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 P59

우리는 하나하나씩 이해해나간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면 그땐 그것이, 말하자면우리를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반대로, 겉보기에는 우리가 우리 것으로 만들었던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 P71

무엇보다도 우선 네가 알아야 할 것은, 결코 네가 무언가를 위반했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위반이라는 거, 아우야, 그런건 존재하지 않는단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정말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래도 노력은해야 한다. 열정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연연하지도 마라.
명심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 P74

그렇다, 나는나 스스로를 교육시키기 위해, 나 자신에게 미래의 자기 구현을 위한준비를 시키기 위해 이 벤야멘타 학원의 훈련생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장차 닥칠 힘겹고 음울한 그 어떤 미래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 편지도 쓰지 않는다. 소식을알리다 보면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고, 밑바딕부터 시작하겠다는 내 계획이 완전히 망가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대담한 일들은 침묵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그르치게 되고 나쁜 결과를 보게 된다.  - P77

내가 만약 부자라면, 절대로 세계여행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여행이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낯선 것을 피상적으로 알게 되는 일에 나는 어떤 매력도 못 느낀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속적인 자기 계발이란 것을 나는 대체로 거부할 것이다. 저 멀고 광활한 미지의 나라보다는 심연, 영혼 같은 것이 내게는 오히려 더 유혹적이다. 가까이 있는 것을 연구하는 일은 틀림없이 나를 매혹시킬 것이다.  - P83

순응하는 것, 그건 생각하는 일보다 훨씬, 훨씬 더 고상한 일이다. 생각을 하면 저항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은 항상꼴사납게 일을 망쳐버린다. 철학자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것을 망쳐놓았는지를 알기나 할까.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무언가를 행한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게 훨씬 더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머리들이 쓸데없이 일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학술적으로 다루고, 이해하고,
지식을 갖게 되면서 인류는 삶에 대한 용기를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다. 

예를 들어 벤야멘타 학원의 한 훈련생이 자신이 점잖다는 사실을알지 못한다면, 그는 점잖은 학생이다. 만약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의식중에 했던 얌전하고 점잖은 그의 행동들이 전부 사라지면서 그는 뭐가 됐든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지.
- P101

자기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감을잃게 되거나 모욕을 당하게 될 때 위태롭다. 자의식에 찬 사람들은 의식에 적대적인 무언가를 끊임없이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 P104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두 배로 하라는 것을뜻한다. 무심하고, 신속하게, 가볍게 내려진 허락보다 더 따분한 것은없다. 나는 모든 것을 얻고 싶다.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다. 웃음도 그야말로 극단적인 경험을 필요로 한다. 웃음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같을 때, 타들어가는 화약을 모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때, 그때 나는 비로소 웃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가장 웃음다운 웃음을 웃는 것이며 나를 뒤흔든다는 것의 완전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는 규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은빛으로, 심지어 금빛으로 빛나게 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해 매혹적인 것으로만든다는 사실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또 확고한 신념으로 간직하지않을 수 없다. 

거의 모든 일들이, 거의 모든 욕망들이 바로 금지되었기에 매혹적인 웃음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울어서는안 된다는 상황, 그것이 사람을 더 울게 만든다. 사랑을 포기하라는것, 그래, 그것은 사랑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하면, 난 열 배로 사랑한다.  - P117

친근한 모든 것들, 따뜻한 존재들을 모두 혐오할 정도로 그렇게 야만적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사람들과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사린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언으로 설득시키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내 신뢰를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따스한 내 마음은 내게 귀하다. 매우 귀하다.  - P118

(꿈) "이젠 모스크바로 가라, 너 말이야!" 우리 줄에 있던 누군가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난 그에게 대답하려던 것을 그만둔다. 나는 다만 거대한 계획을 가진 기계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나는 부모에대해서, 친척과 노래, 개인적 고통이나 또는 희망에 대해서, 고향이갖는 의미와 마력에 대해서 더이상 아는 것이 없다. 군대식의 규율과인내가 나를 단단하고, 꿰뚫을 수 없는, 거의 내용이 없는 육체덩어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군은 계속된다. 모스크바를 향해, 난 인생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인생이 이미 오래전부터 너무 저주스러워져버렸고 더이상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갑작스런 경련을 동반하는 그 모든 고통을 느낄 대로 느껴보았기 때문에 이제 나는 더이상 느끼지 않는다. 대략 이것이 나폴레옹의 지휘하에 있던 어느 병사의 삶이다.
- P154

그에 비하면 훈련생인 나, 나는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쉿, 전능함에 대해선 이야기 말자. 고상한 말들을 입에 담으면 혼동을 하게 마련이니. 벤야민타씨는 충격과 무력감에 너무 잘 빠진다. 너무 심해서 웃음이, 심지어비죽거리는 웃음이 나올 수도 있다. 

난 만물이, 만물이 약한 존재라고생각한다. 약하기 때문에 모두 벌레처럼 떨며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자 그러니까, 이러한 깨달음, 이러한 확신이 나를 갑부로 만든다. 즉 크라우스로 만드는 것이다. 크라우스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는 부자다. 내면에 있는무언가가 그를 공략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그는 바위 같다. 그래서 인생은, 거센 풍파는 그의 미덕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다. 그의천성, 그의 본성에는 미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를 좀처럼 사랑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를 미워한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나 사랑스러운 것, 매혹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 파멸되거나 악용될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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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04 06: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문장이 완전 제 취향이네요^^ 이거 바로 읽어봐야 겠어요👍

미미 2021-08-04 08:46   좋아요 2 | URL
이런 문장들에다 끝까지 놓기힘든 묘한 끌림이 있는 작품이었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