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떻게 체스를 버릴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체스가 우리를 지배하니까요. - P92
제 안에서 집중력이 깨어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심각하게 말했던 집중력, 체스 게임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주변세계로 관심을 확대하는 집중력 말입니다. 단순히 특정한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보는 것 말입니다. 많은 철학자가 추구했던 목적이죠. 그것이 타보리의 가르침의 일부이며, 제가 망설임 없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길 그가 바랐음을 직감했습니다. - P95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선택지를 버린다는뜻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불멸할지도 모릅니다. 저도 이 규칙을 따라야 했습니다. - P100
제 일생, 삶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 기쁨과고통이 정체된 안개의 표면에서 표류했습니다. 그런 곳에선 사물들이 언제나 시선이 가는 곳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 무엇도 명확하거나 필연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 다른 사물들과 단순하게 연결돼 있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확실한 경계나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형태를 지니지 않습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기억 속에서 아직도 불타고 있는 체스보드의 그 포지션만 빼고 말입니다. 불타는 덤불이 모세에게 강한 이미지로 남았듯이 그 포지션이 제게 그랬습니다. - P101
마이어가 기다리던 수였다. 마이어는 이제 완전히안심했다. 체스 게임을 할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즉 처음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주 안정되면서 모든 것이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졌고 아주 미묘한 변화에도 미래를 쥘 수 있게 됐다. - P103
어떤 사람과 비밀을 나누는 것보다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 P110
저는 실수 없이 본능적으로 체스를 두었습니다. 잘못된 수는 아니지만 좀 약한 수를 두려 하면 잡으려던말에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폭풍이 다가올 때 돛대 위에나타나는 세인트 엘모의 불처럼 파란빛이 반짝였습니다. - P120
체스보드 위 세상은 전혀 작지 않다. 죄 없는 무해한 세상도 아니다. 때로 진짜 예술 작품처럼 창조적 행동에 속하던 것이 전대미문의 폭력 행위, 일종의 피 흘리지 않는 비밀 살인이 되고, 그 결과를 두 적수가 서로 확인하고 공유한 순간부터 체스는 무해하지 않다. 체스보드 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도전만이 두 사람을 이어 준다. 두사람은 둘의 합작품인 정신적 창조물의 양극으로 서로상대방의 우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게임에서 어느한쪽이 지속적으로 무자비하게 패배하는 일은 없다. - P141
지금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속된 라이벌 관계뿐아니라 재앙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재앙이라는 단어를 불가피한 힘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기 위해 사용한다. 불가항력적인 사건을 일으킬 뿐 아니라 모든 인간 원칙을 전복하고 극단적으로 광폭하게 행동하여, 우리를 만든 신과 더불어 우리 스스로가 현존하는 유일한 악이 아닐까 하는 의심, 아니 확신을 우리 안에 심어 주기까지 할 수 있는 지성, 그 지성이 안든 불가피한 힘 말이다. - P144
사람들은 대부분 불안한 미래의 위협을 벗어나 다른 데로 마음을 돌리고 싶어 했고, 체스는 사십 년 후 활력 넘치는 개성의 소유자 보비 피셔와함께 나타나는 황금기와 비견될 만한 전성기를 누리고있었다. - P163
바로 그 시기 내가 참가했던 경기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우리는 세상 어딘가에 나의 적수, 부정적인 분신, 생명나무의 거룩한 이름들과 반대되는 존재가 있다고생각한다. 현인들이 그 이름도 부르지 말라 충고했던 클리포스, 언제나 머리를 들 준비가 된 뱀, 절대 만나길 바라지 않지만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에 결국은 부딪히고마는 맞수가 있다. 내 경우에 과거 세대의 노력을 포함하여 몇백 년에 걸친 모든 노력이 이 치명적인 충돌을 준비했던 듯하다. - P166
육체적인 면에서도 우리는 사뭇 달랐다. 그 당시 나는 작고 통통했던 반면 그는 키가 크고 아주 말라서 짧은 바지를 입은 황새 같았다. 나는 갈색 곱슬머리인 반면 그는 가는 금발 직모가 관자놀이까지 덮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유대인이고 그는 아리아인이었다. 베를린카이저호프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 사춘기소년이 된 그는 히틀러 유겐트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당시 독일에서 요란하게 촉망받던 새로운 인종의 체스유망주, 대표가 되어 있었다. - P170
공격, 장악, 지배, 승리 같은 체스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놀라운 변화에 휩싸인 거대한 세상 현실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1933년 5월 어느 날 베를린에서 거대한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화형대에서는 책이 불탔다. 프로이트, 프루스트, 아인슈타인의 이름이 적힌 책뿐 아니라 슈타이니츠, 님초비치, 루빈스타인의 이름이 붙은 책도 광장에서 불살랐다. 그사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100만 부 이상 팔려 나갔다. 오케스트라는 멘델스존, 쉰베르크, 힌데미트, 기타 유대인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를 금지당했다. 1만 6000점에 달하는 그림과 조각품이 ‘타락한 예술‘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전시회와화랑에서 몰수당하고 파괴되었다. - P171
곧 노골적으로 유대인을 보이콧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이 공직, 대학, 의회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그해말에 이미 유대인 몇만 명이 이민을 결정했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유대인은 이 모든 현상에서 긍정적인 신호를보았다. 결국 메시아가 오기 전에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는가? 하지만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통탄스러운 예언이었다. 많은 유대인은 제약이 엄중했는데도 좀 더 남아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유대인도독일인 아니었던가? 많은 유대인이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조국을 위해 싸웠다. 조국의 이상과 영웅을 공유했다. 독일은 ‘그들의 조국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 땅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면 세계 어느 곳이 안전한은신처가 될 수 있겠는가? - P172
우리를 마비시키는 공포가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는 게토의 삶, 소외된 삶으로 돌아갔고, 주변에선 군대 열병식과 집회가 빈번했으며, 시끄럽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이미 세밀한 선별 작업이 이루어졌다. 모든 유대인 남자는 이름에 이스라엘을 붙여야 했고, 모든 유대인 여자는 자라(Sarah)를 붙여야 했다.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일시적인 체류 허가증을 소지한 방문객신분이 됐다. 우리를 대거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거나팔레스타인으로 돌려보낼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것은많은 유대인이 자신의 역사적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는의미였다. 그렇게 고대하던 약속의 땅은 어디에 있을까? - P173
나는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화려한 나치스 친위대 군복을 입었다. 그의 증오는 여전했다. 경멸하는 태도와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 P174
2만 명이 체포당해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부서진 유리의 밤‘ 이라 기억될밤이었다. 끝 모를 학살의 시작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세련된 시적 이름이다. - P186
넓은 수용소 마당을 지나갈 때 어이없게도잠시 편안함을 느꼈다. 세심하게 질서 잡힌 장소에서는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음악도 있었다. 축음기에서 나오는 탄호이저의 멜로디가 슈트라우스의 왈츠 멜로디와 두루뭉술하게 섞였다. - P192
마우렌시그는 나치 시대에 체스가 유대인을 박해하는 수단으로 널리 사용됐다는 점, 아리안 체스‘의 우수성을 찬양하며 ‘유대인 체스를 비하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아 소설로 형상화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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