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강당을 나서기 직전에 너는 뒤돌아본다. 혼들은 어디에도 없다.침묵하며 누워 있는 사람들과 지독한 시취뿐이다.

(밤에 읽으면 안되겠다;;) - P13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 P17

생글거리던 눈, 고단한 미소. 부드러운 천으로 겹겹이 손끝을 감싼것 같은 노크 소리. 그것들이 가슴을 저며 너는 깊은 잠을 이루지못했다.  - P39

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밤의 모든 것. 늦은 밤 창문으로불어들어오던 습기 찬 바람, 그게 벗은 발등에 부드럽게 닿던 감촉.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오는 로션과 파스 냄새. 삐르르 삐르르, 숨죽여 울던 마당의 풀벌레들. 우리 방 앞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커다란 접시꽃들.네 부엌머리 방 맞은편 블록담을 타고 오르는 흐드러진 들장미들의 기척 누나가 두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 P55

어머니가 부쳐준올배쌀을 공기에 담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지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도는 것.
- P85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P95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P96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 P97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 P20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말이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 P22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무너뜨려 다시 혼자가 되는 비슷한 경로를 거울 속 일그러진 얼굴처럼 지켜보는 사이 십년이 흘렀습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누구도 우리를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뼈가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김진수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꼭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어, 형.
아직 완전히 취하지 않은 그의 검고 깊은 눈이 나를 응시했습니다.
언제가 됐든 내가 죽을 땐, 그 사람들까지 꼭 데리고 갈 생각이었어.
잠자코 나는 그의 잔에 술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아. 지쳤어.
- P29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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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5-18 1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에 저 책 읽었는데, 세세한 문장 같은 것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표지의 안개꽃 이미지는 남은 것 같아요.
오늘이 5월 18일이라서, 어제 전야행사 한다는 내용 뉴스에서 봤습니다.
미미님, 내일은 부처님오신날이예요.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미미 2021-05-19 14:23   좋아요 3 | URL
도서관에서 오늘 빌려왔는데 들고오면서 책표지가 예쁘다고 생각했어요^^*5.18이라 읽어보려구요.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휴일맞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