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보기에 그는 독특했다. 지금껏 그녀가 만났던 누구와도 달랐다. 그는 줄을 서거나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는 시간을 대비해 재킷 주머니 속에 늘 문고판 책, 주로 역사책을 넣고 다녔고 몽당연필로 읽은 부분을 표시해두는 사람이었다.  - P17

* 블루스타킹: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문학에 정통한 여성이나 학식 있는 여성을 냉소적으로 일컫는 말.
- P17

학부 마지막 해엔 역사가 낳은 "위대한 인물 론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 강력한 개인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믿음은 진정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까? 확실히 지도교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대문자로서의 역사History는 불가항력적인 힘들에의해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서, 머지않아 곧 하나의 과학으로 이해될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 샤를마뉴, 프리드리히 2세, 예카테리나 대제, 넬슨, 나폴레옹(지도 교수의 강한 요구로 스탈린은 제외시켰다) 등의 생애가 에드워드에게 시사하는 바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에드워드는 강력한 개인의 무자비한 성품, 노골적인 기회주의, 그리고행운이 수백만 명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 비딱한 결론 덕에 B마이너스라는 점수를 받아 일등 자리까지 위태로울 뻔했다.
- P21

이렇게 경이롭고 마음이 훈훈해질 정도로 특별한 사람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고 자의식이 강해 마치 전기를 띤 입자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몸짓에서 모든 생각과 감정이 흘러나와 뻔히 다 들여다보이는 듯한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 P25

서른 살 이하의 영국 국민 중 누구도 - 당연히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도 - 영국 총리가 세계정세를 주도하고 있다고 믿지 않았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속속 합법적인 독립을쟁취하면서 대영제국은 매년 쪼그라들어갔고, 이젠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세계는 미국인과 러시아인의 것이었고 대영제국, 잉글랜드는 약소국이었다(이렇게 말하면 왠지 불경스러운쾌감이 느껴진다). 

물론 아래층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다. 전쟁터에서 싸웠거나 그 때문에 고통받았고 엄청난 규모의 죽음을겁했던 마흔 넘은 사람들은 그 모든 희생의 대가가 주변국으로의 일탈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35

그는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단단히 붙이고 혀로 그녀의 부드러운 혀 밑을 정밀하게 탐사한다음, 아랫니 안쪽을 더듬어, 그녀가 삼 년 전 뒤틀린 사랑니를전신 마취하고 뽑아낸 빈자리로 이동했다. 

그녀가 생각에 잠길때마다 혀를 갖다대곤 하던 자리였다. 그곳은 그녀에게 어떤 공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관념, 즉 그녀의 잇몸에 난 빈자리가 아니라 개인적인 상상 속의 장소에 가까웠다. 그곳에 다른 사람의혀도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는 기이하기만 했다.  - P41

* 칼잡이 맥:
Mack the knife;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등장하는 노래 제목으로,
훗날 많은 재즈 가수들이 다시 불러 유명해진 곡이다.
- P44

그녀의 아버지는 사업가에게 기대할 만한 딱 그런 정도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단어 선택은 와인 반 병으로 신랄해지곤 했는데, 그에 따르면 헤럴드 맥밀런은 싸워보지도 않고 제국을 포기하려는 멍청이, 노동조합에 임금억제를 가하지 않는 지독한 멍청이, 유럽인들에게 가서 제발 그들의 사악한 클럽에 끼어달라고 굽실거릴 생각이나 하는 한심하고 지독한멍청이였다.  - P68

플로렌스는 사소한 가사일로 어머니와 무언의 신경전을 벌이고 난 뒤, 정오가 지나 집을 나섰다. 바이얼릿은 특히 딸애의 세탁기 사용방식을 영 못마땅해했다. 집을 나서면서 그녀는 편지부치러 간다, 점심은 안 먹을 거다, 라고 말했다. 그녀는 밴버리가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시내로 향했다. 지붕 있는 시장을배회하리라, 그러다 어쩌면 옛날 학교 친구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 P69

여학생 기숙사에서 애정이 넘치는 친구들과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신체적으로 얼마나 소원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플로렌스에게 키스하거나 안아준 적이 단 한 번도없었다. 

아주 꼬맹이였을 때조차도, 바이얼릿은 딸을 만져본 일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플로렌스 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마르고 뼈만 앙상했고, 플로렌스도 딱히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목말라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 관계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
- P70

키 크고마른 남자들에게는 간혹 매혹적인 구석이 있는데, 골격과 울대뼈가 피부 아래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라든가 새같은 얼굴, 육식동물처럼 굽은 등이 그랬다.  - P71

한 소절 한 소절 집요하게 반복하며,
어지러이 노래하던 지빠귀 한 마리는 폭염에 결국 노래를 포기했다.  - P73

그녀와 에드워드의 문제는 묵직한 들보가나지막이 가로지르고 돌바닥이 깔린 그 소리 울리는 홀에서 만난 최초의 그 몇 초에, 그들이 처음으로 교환한 그 시선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 P78

만약 다른 누군가가 어머니를 두고그런 말을 했더라면 에드워드는 달려들어 한 방 날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의에 찬 침묵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이런중상傷을 듣는 와중에 그는 불현듯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당연히 사실이었고 진실과 싸울 수는 없었다.  - P87

침실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구식 잠수복을 입고 깊은 바닷속에 뛰어든 것 같은 불편하고 몽롱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생각이 자기 것 같지 않았다.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주입되고 있었다. 산소 대신 생각이.
- P97

맥밀런, 게이츠컬, 케네디뿐 아니라 엉터리 러시아어로 흐루시초프 흉내도 냈고 여러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알 리드, 토니 행콕 같은 코미디언들의 흉내도 곧잘 낼 줄 알았다.  - P113

그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늘 새롭게 굽이치는 파도나 물결과 같은 것임을 깨달아가고 있었고, 바로 지금 그런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다.  - P150

그녀는 어느덧 이렇게 묻고 있었다.
"나이팅게일인가?"
"지빠귀야."
"밤인데?"
그녀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여기가 주요 서식지인 게 틀림없어. 가여운 녀석, 열심히 일해야 살겠군."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처럼."
그녀는 즉각 웃음이 터져나왔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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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16 2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언제 이걸 또 읽으셨다니~!역시... 맞습니다^^

미미 2021-05-16 23:45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리뷰보고 읽었는데 너무 재밌었어요ㅋㅋ게다가 나중에 다시 읽고 싶은 소설이었음요! 열심히 따라가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