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고독

독일이 게토 습격을 감행한 1943년 4월 19일은 유월절 전날이었고, 다가오는 25일 일요일은 부활절이었다.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는 자신의 시 「꽃밭」에서, 게토 안 유대인들이 싸우고 또 죽어가는 동안, 장벽 너머 크라신스키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회전목마를 타고 있던 당시 기독교 축일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미워시의 말을 들어보자. "그때 나는 죽음의 고독함을 떠올렸다." 게토 반란 기간 내내회전목마는 돌고 또 돌았고, 그것은 고립된 유대인의 상징이 되었다.

게토 장벽 너머 폴란드인들이 삶 그리고 웃음을 누리던 그 순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많은 폴란드인은 게토안 유대인들의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또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고, 누군가는 이들을 돕고자 했으며, 몇몇은 이를 실행하다.
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 P524

바르샤바 게토 반란이 일어나기 딱 1년 전, 폴란드 국내군은 영국과 미국에 폴란드 유대인을 상대로 저지른 가스 학살에 대해 이미 전달한 상태였다. 분명 폴란드 국내군은 그들에게 헤움도 학살 시설에대한 정보를 넘겨주었고, 폴란드 당국은 그것이 영국 언론에 전달되는 것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서방 동맹국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않았다.  - P524

폴란드 정부는 동맹들에게 (유대인을 포함한) 폴란드 국민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에 맞서 독일 민간인을 공격 대상에넣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다시, 영국과 미국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폴란드 대통령과 바티칸 폴란드 대사는 교황을찾아가 유대인 대량학살에 대해 공개 석상에서 이야기해줄 것을 역28설했지만 이 역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 P525

서방 연합군 중 오직 폴란드 당국만이 유대인 학살을 멈추기 위한직접 행동에 나섰을 뿐이다. 1943년 봄까지 제고타는 숨어 있던 유대인 약 4000명을 돕고 있었고, 폴란드 국내군은 유대인을 갈취하는자들은 총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5월 4일,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들이 싸우고 있던 그때, 망명 정부 수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모든 동포에게 요청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죽어가고 있는 저들에게 피란처와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십시오. 동시에, 지난 시간 너무나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온 전 세계에 밝힙니다.
나는 저들의 범죄를 강력히 규탄합니다."  - P525

마이다네크 같은 곳으로의 강제추방 소식은 폴란드인들을 남녀할 것 없이 폴란드 국내군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언제든 강제노역 대상자로 붙잡혀 강제수용소로 보내질 수 있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바르샤바 지상에서 사는 것보다 더 안전하게 보였다. 

또한 지하조직에서는 공포를 이겨내게 해줄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고, 복수를 통해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독일은 과거 1939년 침공 당시 수만 명, 1940년 AB 악치온 당시 수천 명에게 그랬듯이, 고등 교육 이상을 받은 폴란드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림으로써 자신들의 노동력 끌어모으기 과정에서 레지스탕스 조직이 생겨나는 사태를 막으려 했다.
- P529

독일군의 패배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분명 반길 만한 소식이었지만, 마찬가지로이내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접수할 것이라는 예상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폴란드 국내군이 독일군과 공개적으로 싸워 승리한다면, 그들은 붉은 군대가 자신들의 집을 차지하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었다. 

반대로 그들이 독일군과 싸워 패배한다면, 곧 들이닥칠 소비에트에게 자신들은 손쉬운 상대이자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꼴밖에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와(혹은 서방 동맹국들과) 협상할 자리조차 얻지 못할 것이었다.
- P536

스탈린은 카틴 발견(폴란드의 발견) 이후 폴란드 정부와 외교 관계를 끊어버렸고, 이는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또 하나의이유가 되었다. 스탈린이 스스로가 벌인 대학살을 폴란드 정부와 외교 관계를 끊는 빌미로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자가 어떤 협상이든 선의를 가지고 임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카틴:소련군이 폴란드 장교들 학살한 곳. 자기네가 학살 한 후, 발각되자 되려 외교 끊음) - P537

그 개인의 집요한 끈기가 전쟁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윈스턴 처칠의 경우를 보자. 그는 영국의 동맹인 폴란드에게도움은커녕 소련과 타협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이미 1944년 여름처칠은 폴란드 수상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에게 모스크바를 찾아가 그동안의 소련-폴란드 간 단교를 회복시킬 합의를 청해보라고,
조언했다. 미코와이치크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1944년 7월 말 영국대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건넸다. 

즉 폴란드 영토의 절반인 동쪽 땅을 포기하고, (학살의 책임은 소비에트가 아닌 독일에 있다는) 소련 버전의 카틴 대학살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미코와이치크가 알고 있던 것처럼, 루스벨트 역시 카틴에 대한 소비에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된 그 순간 미코와이치크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인 미코와이치크는 스탈린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지만, 스탈린은 이마저 거절했다. 

이에 이번에는 처칠이 스탈린에게폴란드인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스탈린은 8월 16일, 자신은그런 "멍청하고 위험한 행동"을 도와줄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로 이를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 P551

어느 폴란드 국내군 병사는 자신의 시에 "우리는 그대를 붉은 역병을 기다린다 우리를 이 흑사병에서 구해주기를"이라고 적었다. 
- P555

소련이 입성하기 하루 전에도, 독일은 바르샤바에 남은마지막 도서관을 불사르고 있었다.
- P55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4-28 16: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끝이 보입니다~!!

청아 2021-04-28 16:58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