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네, 알겠습니다. 사건을 조사해 보죠." 서장은 무심한 어투로 무성의하게 말하면서 책상에 놓여 있는저류들을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그는 벌써 내게서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이 남자를 증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이상이었다. 그를 향해 겨자처럼 맵싸한 반감이 솟아났다. - P47
대기가 푸른빛으로 바뀌며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깊고 둔탁한 울부짖음이 사방을 온통 불안감으로 채웠다. 나는 죽음이 항상 문 앞에 있다고, 즉 가까운 곳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죽음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언제나 우리의 대문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가장 좋은 대화는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최소한 의미 전달 과정에서 오해의 소지는 없을 테니까. - P49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몰랐다. 사람이가끔 분노를 실감하게 되면 모든 게 단순 명료해진다. 분노는 질서를만들고, 세상을 간략히 요약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분노는 다른 감정 상태로는 얻기 힘든 ‘선명한 시야‘를 우리에게 확보해 준다. - P50
나는 잠을 설쳤다. 내 몸 어딘가에는 아직도 불안과 초조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열기가 들끓는 용광로와 붉은빛의 뜨거운 벽에둘러싸인 보일러실에 대한 똑같은 꿈들이 줄곧 나를 괴롭혔다. 꿈속에서 용광로에 갇힌 화염이 굉음을 내며 빠져나오려 했고, 엄청난 폭발과 함께 세상 밖으로 터져 나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이러한 꿈들이 내 질환과 관련된 증세인, 밤의 열병 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P51
개는 총알처럼 집 밖으로 달려 나가 소변을 보면서 허공으로우스꽝스럽게 뒷다리를 들어 올렸는데, 마치 자신이 암컷인지 수컷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나서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단언컨대 그 순간 개는 내 눈동자를 깊이 응시하고있었다. 그러고는 곧장 왕발의 집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렇게 개는 서둘러 자신의 감옥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나는 개를 소리쳐 불렀다. 너무도 쉽게 왕발의 마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에 짜증이 났고, 속박의 메커니즘에 익숙해진 무기력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 P52
이따금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머무는, 거대하고 넓은무덤 속에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차갑고 불쾌한 잿빛 어스름에 물든 세상을 보았다. 어쩌면 감옥은 바깥이 아니라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어느 틈엔가 우리는 감옥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P52
필멸의 운명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는대지에 의해 삼켜지리라
ㅡ윌리엄 블레이크 - P55
알고 지내던 누군가의 죽음은 우리에게서 자신감을 앗아 간다. - P57
그날 오후 디지오가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감기에 걸려있었다. 요즘 우리는 블레이크가 남긴 미완성 육필 원고 중 하나인 「멘탈 트레블러를 번역하는 중이었다. 첫머리에 등장하는 단어 mental의 번역을 놓고 곧바로 논쟁이 벌어졌다. 문자 그대로 ‘정신적인‘으로 번역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영적인‘으로 번역하는 게 나을지. 디지오가 코를 훌쩍이며 닝독했다.
I travel‘d through a Land of Men, A land of Men & Women too, And heard & saw such dreadful things As cold Earth wanderers never knew.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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