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이후의 현대철학에서는 인식이 존재와 따로 분리되어 설명되지는 않는다. 세계는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해석대로 존재한다. 하나의풍경으로부터 일어나는 서로 다른 감흥은, 풍경 자체가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마다의 각자 다른 소유이기도 하다. 그것 자체로야 뭐 특별할게 있겠나. 의미를 담고서 바라보는, 그 시선 끝에 맺히는모든 것들이 특별할 뿐이다. 그런 개개의 관점을 소유하게끔 하는 저마다의 조건은, 어떤 시간의 결을 살고 있는가의문제이기도 하다. 하여 무엇을 보고 있는가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자기정체성의 단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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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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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왕이 정치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문득 이런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때가 내게가장 중요한 때인가? 어떤 일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가?
어떤 사람이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가?‘ 왕은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어느 신하도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고, 왕은 "내가주는 녹을 먹으며 살아온 자들 중에 내가 정말 문제에 봉착해서 묻는 것에 답을 줄 놈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 하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한 신하가 시골 어딘가에 훌륭한 성인이 은둔하고 있다고말했다. 왕은 당장 신하들을 데리고 그 은자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가는 길에 왕은 자객의 습격을 받았고 그 자객은 신하의 칼을 맞고도망쳤다. 왕은 가던 길을 재촉해서 은자를 만났다. 왕은 그에게도

신하들한테 물었던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은자는 아무 대꾸 없이 자기 일만 할 뿐이었다.
그때 어떤 남자가 피를 흘리며 뛰어와 ‘살려 달라‘고 외쳤다. 왕은 얼른 수건으로 그의 상처를 싸매서 피를 멎게 해주었다. 부상자는 고개를 들어 왕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납작 엎드리며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까 길에서 당신을 습격한 사람이 접니다.
왕께서 제 아버지를 죽였기에 복수를 하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도나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치료까지 해주시니, 용서해주신다면 앞으로 충성스러운 백성이 되겠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왕은 은자에게 다시 앞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은자가 답했다. "대답은 이미 다 했소.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이 순간이고, 당신이 할 일이란 바로 저 사람을 보살피는것이고,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요."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가 쓴 단편 <세 가지 질문>의 줄거리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함석헌의 글 <이제 여기서 이대로>에서 읽었다. 함석헌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힘써 할 일, 다시 말해 참된일이란 멀리서 구할 것도 없고 ‘각별한 때‘에 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부족하나마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모든 때는 똑같이 소중하다. 우리 삶에 각별한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각별한 때‘는 우리가 모든 순간을 소중히 생각할 때 찾아온다. 함석헌이 다른 글에서 쓴 역설적 표현을 빌

리자면, ‘각별한 때‘를 따로 두지 않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할 때
‘각별한 때‘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정말 믿는사람에게는 ‘때가 장차 오지만, 지금도 그때‘라는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장차의 그때‘란 ‘지금의 이때‘이기도 하다는 것,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다.
‘장차의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 그런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사람은 미래를 준비하는 무척 겸손한 사람일 수 있고, 제 허물을 돌아볼 줄 아는 양심의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겸손과 양심이종종 행동을 늦추는 핑계, 어떤 소심함을 감추는 위장막이 될 수도있다.
매번 그렇게 많이 반성하건만, 그리고 그토록 많은 회개를 하건만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누군가는 그의반성과 회개가 철저하지 못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함석헌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양심에 과민한‘
사람들은 제 잘못을 지나치게 오래 붙잡고 있는 나머지 어떤 암시에 빠져들고 만다. 내 잘못을 자꾸 지적하다 보면 점점 그 잘못에서빠져나올 힘을 잃어버리고 ‘나는 안 돼‘라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은 사람을 창백하게 만든다. 양심이란 죄를 감시하는내 안의 공안 경찰과 같아서, 공안경찰이 지나치게 나서면 사회의활력이 떨어져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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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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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신‘을 떠받들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소홀히 한다는 뜻이다(여기서 말하는 ‘신‘은 종교적인 신일 수도 있지만, 돈일 수도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어떤 성공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우리가 믿고 떠받드는 그 어떤 것도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음악을 듣는지, 어디가 아픈지, 위생은 어떤지, 기후는 어떤지. 이것들은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것들이다. 내 일상을 돌아볼 때 그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내 삶에 큰 중요성을 갖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떠받드는 어떤 것 때문에 그것들을 소홀히 한다. 추상적인 인류 평화보다 내가 요즘 듣는 음악이 내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철학이란, 그것들을 다루고 가꾸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근거하고 있던 절대가치의 붕괴로 받아들여지면서 서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주었다. 철학자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진리를 추구하는자신의 의지와 태도를 문제 삼게 되었고, 심리학자들은 무의식과충동에 대한 니체의 분석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화가들은 화면에서 소실점이 갖는 패권성을 제거하고 원근법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으며, 음악가들은 화성 체계를 깨는 실험을 시작했다. 정말로니체의 사상이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런 엄청난 스펙터클 속에 니체의 위대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일, 즉 연기를 피우고 소리 내는 일을 니체는 ‘거짓 불개‘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니체의 위대함은 소박함에 있다.
니체는 ‘모든 것의 가치전환‘이라는 표현을 종종 썼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반대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지혜로운 자는 저렴한 비용으로도 잘살 수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비싸게 치는 것을 그는 별로

높이 보지 않고, 그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소홀히 하니,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도 귀중한 것들을 쉽게 모을 수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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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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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언가를 배우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 걸까? 우리가 몰랐던 지식과정보일까? 스승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전해주는 사람일까? 1818년루뱅 대학의 한 프랑스 문학 강의실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의 이런생각을 무색하게 한다.
처음에는 선생도 학생도 참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덜란드령이었던 이 지역 학생들 대다수는 네덜란드어를 구사했다.
이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 그런데 프랑스인 강사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몰랐다. 학생은 선생의 언어를 모르고, 선생은 학생의 언어를 모르는데 무언가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가능할까. 그런데놀랍게도 그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말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어 문장을 거의 작가 수준으로 써냈다. 선생은 가르칠 수 없었지만, 학생들은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제프 자코토! Jacotot. 당시 네덜란드어에 무지한 채로 네덜란드학생에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아니 가르칠 수는 없었지만 배우게했던 선생의 이름이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Ranciere는 자코토를
‘무지한 스승‘이라고 불렀다.(출처: 《무지한 스승>>> 학식 있는 선생이 그학식을 제자에게 전달한다는 통념에 비추어 본다면, ‘무지한 스승‘
이라는 말은 교육학의 통념에 관한 대단한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자코토의 교수법, 즉 가르칠 수는 없었지만 배울 수는 있었던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보자. 자코토는 자신과 학생들을 연결할 끈을 하나 찾았다. 당시에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대역판으로 출간된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이야기책이 있었다. 이 책에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함께 실려 있었기에,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 번역문을 참조해서 프랑스어를 배우게 했다. 그는 학생들로 하여금 텍스트 일부를 암송하게 하고 그것이 잘되는지만 확인했다. 자코토는 프랑스어 철자법도, 동사 변화도 도무지 가르칠 수 없었다. 네덜란드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신이 아는 단어에 상응하는 프랑스어 단어를 보고는 이치를 깨달았다. 선생인 자코토는 여전히 네덜란드어를 말하지못했지만, 학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프랑스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코토가 가르치지 않았고 가르칠 수도 없었던 프랑스어의

철자법과 동사 변화를 이해해버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스승인 자코토 자신도 학생들이 했던 체험을겪어봤다는 점이다. 1792년에 그는 중학교의 수사학 선생이었다.
그때는 프랑스 혁명 직후였기에 정세가 불안정했다. 그해에 무장봉기에 대한 호소를 듣고 그는 곧바로 포병대에 입대했다. 우연한 상황에서 동료의 추대를 받아 장교가 된 그는 별수 없이 포탄의 궤적을 이해해야 했는데, 놀랍게도 수준급의 포수 실력을 발휘했다. 수사학 교사이자 라틴 문헌학자였던 그가 대단한 포탄 사수가 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화약을 다루는 부서에 얼마간 근무한 뒤에 군에 입대한 노동자에게 속성으로 화학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얼마 뒤에는 신설된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닉‘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하게 됐는데, 그와중에 수학자가되어 디종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는 나중에 히브리어까지 가르쳤다. 항상 상황은 너무 위급했고 여러 경우에 그는 스승 없이 해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에게서 배우는 능력이 발휘된다는 걸 느꼈다.
언뜻 보면 대단한 능력자, 대단한 천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우리가 자코토를 천재라고 불러야 한다면, 천재성은 그의 화려한경력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천재성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도출해낸 결론, 즉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 인간은 모두 똑같은지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자신이 천재라면 모든 인간이 천재라

고 하는 결론을 도출한 데 있다.
"물론 이것이 곧 스승이 쓸데없는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것은 배움의 과정 중에 스승이 어디쯤에서 어떻게 개입하는가이다.
분명 자코토는 아이들에게 학식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무언가를 하게 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아이들을 어떤 상황 속에몰아넣었다. 배움의 의지가 발휘되어야 하고 또 발휘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배우는 자들이 혼자 설 수 있도록 했다. 자코토 자신도그랬고, 나중에는 그의 학생들도 그랬다. 그가 개입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학식 쪽이 아니라 의지 쪽이었다. 그는 제자로 하여금 선생의 내면에 있는 지식에 도달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 안에있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돕는 선생이었다. 자코토는 입버릇처럼말했다고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신들은 무엇이든할 수 있다"고 당신과 동일한 지적 능력이 명사도 만들었고, 수학기호도 만들었으며, 책을 썼고, 그림도 그렸다고.
사실 지적인 능력을 포함해서, 인간의 ‘능력‘은 잠재적이어서 그것이 모두에게 똑같이 부여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잴 수있는 것은 단지 지적 능력이 실현된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한 인간의 성취가 차등적 능력 때문인지, 동일한 잠재 능력의 차등적 발현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능력은 평등하다‘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선험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믿음이다(물론 그 반대, 즉 ‘인간의 능력은

불평등하다‘는 것 역시 믿음에 불과하다). 내생각에 자코토의 위대함은 그런믿음이 아니라 그것을 입증하려는 노력에 있다. 그는 누군가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것을 능력이 불평등한 증거로 삼지않았다. 대신에 능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돕고자 했다.
이것이 그가 평등을 입증하는 방식이었다.
아마도 자코토 역시 세상에 ‘바보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가 내린 ‘바보‘의 규정은 남들과 다르다. 바보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다. 바보는 다만 ‘욕구가 멈추어버린 자들‘, ‘의지가 꺾인 자들‘이다. 의지가 꺾인 곳에서 지능은 발휘되지않는다. 불평등의 현실을 본래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때, 또 현실사회에서 우월한 자들이 실제로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이라고 생각해버릴 때, 우리는 정말 ‘바보‘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바보‘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 차별을 그대로인정하고 심리적으로 수긍하기 위해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자신을무시하는 사람이다.
자코토의 철학(그리고 그에 대한 랑시에르의 해석)은 스승과 교육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문제는 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자신들이빠져 있는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늪에서 말이다." 교육이란 학생의 머릿속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각성시키는 일이다. 내가 아는 것을 그가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해방된 인간임을 아는 것, 그 자신이 능력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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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을 익히는 방법을 만들고 익히게 하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가?
관찰을 하면 관찰하는 방법을 알게된다는 말인데
잘 하는 방법을 교사가 안내하는 것이 교사의 책무인 것인가?

데카르트는 진리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모루’와같은 ‘사전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그것을 얻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준비 없이 곧바로 진리를 얻는 일에 착수해서는 안된다고. 그에 대해 스피노자는 진리를 얻기 위한 사전 준비는 없다고 말한다. 준비는 그 ‘준비를 위한 준비‘의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이고, 마치 공부를 한다면서 연필만 깎고 있는 학생처럼, 인식은 지연되고 결국에는 회의주의자들처럼 우리에게는 인식할 수 없다고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사람들은 실제로 금속을 연마하고 사유를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삶을 생산하기 위한 선행조건 같은 것은 없다. 방법이란 공부의 선행물이 아니라 공부의 결과물이다. 예컨대 수영법을 알고 난 후에야 물에 들어가 수영을 할 수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물에 들어가 조잡하게라도 수영을 시작한뒤에 우리는 수영법을 알게 된다. 사실 ‘수영법을 안다‘는 말은 ‘수영을 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수영을 하는 것‘과
‘수영을 하는 방법‘은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수영을 할 수 있는 한까지 우리는 또한 수영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셈이다.
데카르트가 든 예시에 스피노자의 생각을 풀어보자면 이렇다. 아마도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모루‘같이 세련된 것이 곧바로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망치로 쓸 수 있는 것은 주변에 널린자갈에 지나지 않고, 집게라고 하는 것은 그저 나뭇가지에 지나지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인식의 시작이고 공부의 시작이다. 우리가 그것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한에서 말이다. 그다음에는 부싯돌을 서로 부딪쳐 불을 만들어내고 그 불로 청동을 뽑아낸다. 청동으로 만든 망치로 철광석을 캐내서 철을 추출하고 결국에는 모루도 만들어내고 투구와 칼을 생산해낼 것이다. 투구와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루‘는, 청동 망치가 그렇고 나중에 얻는투구와 칼이 그렇듯이, 삶의 과정에서 얻는 것일 뿐 무슨 절대적인사전 준비물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자갈과 나뭇가지뿐이어서 아직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공부를 늦추는 핑계일 수는있어도 공부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아니다. 공부는 언제든 할 수있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시작함으로써만 시작되는 것이다. 공부란 자신이 가진 미약한 것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삶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는 것이지, 어떤 방법을 알아내서 단번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따로 없고 진리가 가는 길이진리의 방법이다. 그리고 공부란 그 길을 스스로 내면서 나아가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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