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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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에 이어 달과 6펜스
서머싯 몸이 그려낸 스트릭랜드가 폴 고갱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스트릭랜드가 가졌던 순수한 예술적 열망이 그의 삶을 고결하게 만들었지만, 폴 고갱의 삶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6펜스의 세계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소설과 현실의 괴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난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네. 내가 보기엔, 사랑에 자존심이 개입하면 그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야. 

나는 그가 말하려는 것을 짐작해 볼 도리밖에 없었다. 스트릭랜드는 그때까지 자신을 얽매어왔던 굴레를 과감히 깨뜨려버렸던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뭐랄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힘으로 넘치는 새로운 혼을 발견했던 것이다. 강렬하고 특이한 개성을 대담하고 단순하게 묘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살결은 열정에가득한 어떤 관능, 불가해한 어떤 것을 품고 있는 관능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채색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중량감, 그러니까 육체의 무게를 뚜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중량감에 그치는 것만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떤 영적인 것이혼을 어지럽히는 전혀 새로운 어떤 영성(性)이 깃들어 있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상상을 이끌어 가면서, 영원한 별들만이 빛나는 어둡고 텅 빈 우주를 벌거벗은 영혼이 두려움에 떨면서 새로운 신비를 찾아 모험의 여정을 나선 그런 우주를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이 설명이 수사적으로 여겨진다면 그건 스트로브가 수사적이었기 때문이다(사람이 감정에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소설을 쓰듯이 이야기한다지 않는가). 스트로브는 여태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어떤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을 보통의 어휘로 표현해 낼 줄 몰랐다. 그는 마치 언어로는 기술할 수 없는어떤 것을 말로 설명해 보려고 애쓰는 신비주의자 같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표현했다. 사람들은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

그저 아무것이나 아름답다고 말한다. 옷도 아름답고, 강아지도아름답고, 설교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아름다움자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돼먹지 않은 과장된 수사로 장식하려는 버릇이 있어그 때문에 감수성이 무뎌지고 만다. 신령한 힘을 어쩌다 한번체험하고선 그것을 늘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속이는 돌팔이 의사처럼, 사람들은 가진 것을 남용함으로써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스트로브는 구제할 길 없는 어릿광대이면서도, 아름다움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영혼처럼 성실하고 정직한 사랑과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신자들이 경외하는 신과 같아서 그것을 볼 때에는 외경심을 느꼈다.

스트릭랜드가 왜 갑자기 그림을 보여주겠다고 했는지 알 수없었다. 잘됐다 싶었다.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가면을너무 철저히 쓰고 다니다가 정말 그 가면과 같은 인격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옷가지를 쇳조각처럼 칠한다 해도 쇳조각처럼 보일 리는 없다. 아무리 특이하게 꾸민다 해도 평범한 정신을 감출 수는 없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작품에서도 날카로운 관찰자는 영혼의 깊은 비밀을 읽어내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치 이국 땅에 사는사람들처럼 그 나라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온갖 아름답고 심오한 생각을 말하고 싶어도 기초 회화책의 진부한 문장으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다. 

정말 아브라함이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을까? 자기가 바라는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섬 생활에 신나는 일은 없어요. 바깥 세상
하고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생각해 보십시오. 타히티까지오는데만도 나흘이 걸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린 섬 생활이 행복해요. 어떤 일을 시도해서 그걸 성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죠.
우리 생활은 소박하고 순진합니다. 야심에 물들 일도 없고, 자부심을 가진다고 해봐야 그건 우리 손으로 해낸 일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런 자부심뿐이고요. 악의를 가질 일도 없고, 부러움으로 속상해 할 일도 없어요. 아, 정말이지, 선생, 사람들이신성한 노동이다 뭐다 하는데 그건 헛말이에요. 하지만 내게는그게 아주 절실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작품해설 중

가정을 팽개쳐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일을 작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씀으로써 오히려 내적충동의 필연성과 신비감을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세속의 윤리와가치를 일거에 넘어서버리는 그 비약을 비약 자체로 남겨둠으로써오히려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나레이터를 처음부터 주인공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들었던 것도 같은 효과를 겨냥한 수법이다. 이야기의 중반 이후는 나레이터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엮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수법은 흔하지만 여기에서는 신비감을 고취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 독자는 주인공이 산 삶의 중요한 부분을 직접보거나 들을 수 없어 서로 다른 관점을 통해 그의 삶의 성격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진실이나 자유의 정체는 결국 그런방식으로밖에 접근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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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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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 삶은 언제나 크지만, 책을 읽어온 사람들을 신뢰한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좋아하는 작가라면 더더욱 신뢰한다. 이 두 가지에 해당하는 작가의 책을 읽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무지는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모든 언어가 소음으로만 들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느껴진다. 소음과 위협, 공포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불행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의외로 타협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도평화를 준다.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더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귀를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나 빼고는 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저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 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 아파 억울해 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기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어떻게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

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가까스로 비명이 멈췄고 물결도 잔잔해졌다. 갑판 바로 열까지 다가온 혹등고래는 눈을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고래의눈은 무표정한 물고기의 눈과 달랐다. 새끼를 위해 지구 반바퀴를 헤엄쳐온 포유류의 눈은 따스했다. 물론 이 시선에 뭔가의미를 부여하고 위로받고자 하는 것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그런 어리석음이라도 있기에 견뎌낼수 있는지 모른다. 쉽게 보답이 주어지지 않는 삶을.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깊이 공감하는 구절을 만났다. 삶을 이루는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것이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이구아수폭포를 보고 싶다, 남극에 가보고 싶다 등 크고 강렬한 비일상적 경험을 소원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쾌락에 불과하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사람이라고." 마치 동화 『파랑새』를 연상시키는 일견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은 굉장히 과학적인 말이기도하다. 인간의 행복감에 관한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공통적으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야간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시간. 교수님이 처음에는정해진 자료에 따라 강의하시다가 점점 관련 연구 이야기를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에 간 구법승이 혜초 외에도많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살아서 돌아왔는지가 궁금해졌단다.
그래서 온갖 고문헌을 추적하여 구법승들의 생환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물론, 슬프게도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언젠가 쓸모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실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또 긁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일을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면, 이 불확실한 삶에서 한 가지 쓸모 있는 일을 이미 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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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성찰 시리즈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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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 대체로 옳다.
고 여기기는 하여도 과학이 인생의 모든 일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저 때를 기다리다 보면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일도하사불성‘ 같은 허무맹랑한 정신주의에 매몰되어 있지도 않으며, 매사가 항상 잘되는 것만은 아니어서 달도 차면 기울듯이 때가 되면 집착을 버리고 물러서야 한다고도생각한다. 내가 지키려고 하는 원칙들은 엉켜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맹신으로 보일 만큼 하나의 종교적 원칙에 맞추어 정돈할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자연과학이라는 확고부동한 원리에 따라 이 모든 것을 재단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되어가는 대로 크게 세상사와사람들과 어긋나지 않는 한 두어두되, 뭔가 문제겠다 싶으면 이리저리 재어보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지킬 건지키고 고칠 건 고치려 한다. 아주 오랫동안 변함없이 지켜온 것은 사실상 없다. 무엇이 나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인지를 규정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뚜렷하게 내놓을 수 없고,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그저 ‘나는 존재하는 생물‘이라는 것뿐이다.

파스칼은 말한다.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우리의 모든 탐구는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에 있다. 더러는 바다를 건너가기도 하면서 더러는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때로는 오뒷세우스처럼 때로는 에이해브처럼,

데카르트는 여전히 신을 찾아 갈등하는 사람이고, 칸트는 싸늘하게 신을 버린 사람이다. 칸트 이후의 시대는 신 없이 살 수 있다. 그저 사는 것이다. 이것이잘 사는 것인지,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 보람 있게 사는것인지, 덜 떨어진 삶을 사는 것인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지 않고 남들과 부딪히지 않고 그렇게 그렇게 사는 것이다. ‘좋음‘에 대한 물음 없이 사는 것이다. 좋음에 대한답은 각자의 내면에서 각자가 내려가면서 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궤적이 곧바로 자신의 삶의 정당화 근거가되는 삶이다. 공동체가 합의한 규약과 절차를 어기지 않는 한.

외부의 경험이 나에게 주어지고, 내가, 나의 신경세포가 그것에 의해 변화하고, 다시 외부로 자신을 투사하고, 그러한 오고감이 수없이 되풀이된 다음에야 ‘의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의식은 오로지 나의 것인가. ‘오로지 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알 수 없다. 내가 의식이라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외부의 자극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우연히 주어진다. 분명히 외부로부터 나에게들어와서 나의 의식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으니 뭔가 있기는 하다. 어디까지인지 경계를 확정할 수 없으니 오로지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남의 것이라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나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유일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에서 주고받은 모든 작용의 총합이다. 유일한 총합이다. 그 총합들 각각은 다르다. 그것을 편견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구나 그러한 것을 자기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내가 얻게 되는 최소한의 통찰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자기 안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자신을단단하게 만들어 강한 사람이 되려 하지는 않는다. 안으로 들어가서 신을 찾는다. 아직은 신이 필요하다. 살육의전장이 그를 신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도 관념론이다. 관념론은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이 진리라는 신념이다. 이 진리는 우리 인간이 아닌 저기에 있다. 인간이 어찌하든 저기에, 객관으로서 있다. 객관으로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이말하는 진리인,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은 저기에 있다.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고, 노력해서 그것을 알아야만 하고, 그것을 온전히 가져야만 하고, 온전히 가지지 못하면 그것을 모방이라도 해야 하고, 그것이 진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언젠가는 수정할 것을 각오하고서 ‘진리 닮은 것‘이라도 가져야만 한다. 근대 이후의 삶을 지배하려 해온 자연과학의 법칙들도 저기에 있는 보이지 않는것들을 잠정적 진리로 간주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그

렇다고 믿든 아니든 진리로서 있다. 그것은 우리 동네에서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전 우주에서 작동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이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은 그것이 진리임을 전면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궁극의 것은 논증(apodeixis)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틀림없이옳은 진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든 틀린 것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품고 있다. 그 걱정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여야만 과학자이고, 이들 과학자들은공동체를 형성하여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한다. 우리는 보편적 진리를 탐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릴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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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까지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는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의미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었다.

필립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다감한 필립이 꼭 행복을 찾았으면 했다. 크론쇼가 준 양탄자에서 스스로 답을 얻고, 삶의 무늬를 직조하는 필립을 응원한다. 그리고 나를 응원한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의 중함.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곧 그의 인생이라는 말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도대체 살아서 뭐 한다는 말인가? 필립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자문해 보았다. 산다는 게 온통 허망하게 여겨졌다. 크론쇼도마찬가지였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 살았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있겠는가. 그는 죽어 잊혀지고 말았다. 팔리다 만 그의 시집이헌책방에 놓여 있을 뿐. 주제넘은 저널리스트로 하여금 한 편의서평을 쓰게 만든 것뿐, 그의 삶은 어떤 것에도 이바지한 게 없어보였다. 필립은 속으로 소리질렀다.
「도대체 살아서 뭐 한단 말인가?」노력과 결과는 전혀 맞아들지 않았다. 젊은 시절 빛나던 회망을 가졌던 대가는 쓰라린 환멸뿐이었다. 고통과 병과 불행의비중이 너무 무겁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인생을 시작할 무렵의 그 드높았던 회망, 그의 육체에서 비롯했던 어쩔 수 없었던 한계, 친구다운친구가 없어 느꼈던 외로움, 청년기 내내 견뎌내야 했던 애정의 결핍 등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만 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이런 비참한 실패를 맛보아야 한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조건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또 어떤 사람들은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도 실패한다. 만사가 순전히 우연이란 말인가. 비(雨)는 착한 사람에

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내린다. 5) 그런데 인생에서는 어느 것에도 이유나 까닭이 없다.
크론쇼를 생각하며 필립은 그가 주었던 페르시아 융단을 떠올렸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했었다. 갑자기 그 해답이 떠올랐다. 그는픽 웃었다. 답을 알고 나니 수수께끼 문제를 받았을 때와 같은기분이 들었다. 답을 알아맞추기 위해 골머리를 앓다가 답을 듣고 나면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해답은 분명했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우주를 돌고있는 별의 한 위성 지구 위에서, 이 유성의 역사의 한 부분을이루는 조건에 영향을 받아 생물이 발생했다.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탄생했듯이 그것은 다른 조건 아래에서는 끝장을 볼지도모른다. 다른 생명체보다 하등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 그인간도 창조의 절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물리적 반응으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필립은 동방의 어떤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필립은 벅찬 기쁨을 느꼈다. 소년 시절, 신(神)을 믿어야 한다는 무거운 신앙의 짐을 벗어버렸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이제 책임이라는 마지막 짐까지도 벗어버린 듯한 기분이였다. 처음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셈이었다.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제까지 자기를 박해한다고만 생각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세상도 잔혹하다고 할 수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성공 역시 의미가 없다. 그는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순간, 지구의 표면을 점유하고 있는 바글대는 인간 집단 가운데 아주 하찮은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혼돈 속에서 허무의 비밀을 찾아냈으니 그는전능자라 할 만했다. 필립의 벅찬 상상 속에는 온갖 생각들이얽히고설키며 잇따라 떠올랐다. 그는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며길게 심호흡을 했다. 펄쩍펄쩍 뛰며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 삶이여!」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 삶이여, 그대의 독침은 어디 있는가?

삶에 아무런 뜻이 없음을 마치 수학 공리의 증명처럼 힘있게입증해 준 상상의 분출과 함께 또 하나의 사상이 용솟음쳤다.
크론쇼가 페르시아 양탄자를 선물했던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려 했던 듯하다. 직조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람의 행동이 사람의 선택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삶도 나름의 무늬를짜고 있다고.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뿐이다. 살아가면서 겪는온갖 일들과 행위와 느낌과 생각들로써 그는 하나의 무늬를 다시 말해, 정연하거나 정교한, 복잡하거나 아름다운 무늬를 짤수 있다. 선택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또한 현상과 달빛을 함께 얽어 짤 수 있는 환상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그렇게여겨지면 그런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거대한 날실에 (알지 못할 샘에서 흘러나와 알지 못할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은), 사람은 다양한 실가닥을 선택하여 무늬를 짬으로써•자기만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하나 있다.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생산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다는 무늬가 그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훌륭한 다른 무늬들도있다. 행복이 없는 무늬,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무늬가 그것이다. 그것들에서도 한결 착잡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삶들은 -헤이워드의 삶도 그중 하나이지만.
-우연이라

그래서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위안이 편하다. 크론쇼와 같은는 눈먼 무관심에 의해 디자인이 완성되기도 전에 끊겨버린다.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늬다. 그러한 삶도 그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관점이 바뀌고 옛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
필립은 행복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미망()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척도로 삶.
을 잰다면 이제까지 그의 삶은 끔찍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척도로도 잴 수 있음을 알고 나니 절로 기운이 솟는 듯했다. 고통도 문제가 아니듯 행복도 문제가 아니었다. 살면서 만나는 행복이나 고통은 모두 삶의 다른 세부적인 사건들과 함께 디자인을정교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한순간 그는 삶의 우연사들을 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은 전처럼 그에게 영향을미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든이제는 삶의 무늬를 더 정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는 동기가 될뿐이다.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리라.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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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맥주 영화
유성관 지음 / 일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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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실은 없고 모두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각자에게는 절박한 진실일 수도 있다.

맞춤법이 의식적으로 흥미를 느낀 앎이었다면, 알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누구나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다. 이쪽이 조금 더 위험하다. 맥주 쪽에 그런게 있는데, 맥주에도 와인처럼 페어링이 있고, 그중 유명하고 고전적인 페어링은 기네스와 굴이 있고, 스타우트와 같은 커피 향이나 초콜릿 향이 나는 맥주와는 브라우니가 어울린다. 발라스트 포인트의 스컬핀 같은 향이 짙고 쓴맛이 강한 아메리칸 IPA의 경우, 의외로 카레와 잘맞는다는 것은 비슷한 풍미가 나는 술과 음식이 어울린다는 페어링 공식과 개인적인 실험에 기인한다.
위의 문단에는 내용상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최종 3단계인 스컬핀과 카레가 잘 어울린다는 것은 남들이 잘모를 것이라 나도 의식한다. 스컬핀도 알까 말까인데 개인적인 실험으로 알게 된 정보이니. 그러나 기네스와 굴이 잘 어울린다는 전통적인 페어링에 대해서는 제법 알려진 상식이라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기네스는 아주 유명한 맥주가 아니던가. 여기가 2단계다. 1단계는 맥주와 페어링이 되는 음식이 있다는 일종의 대전제다. 3단

계에 머물러 있는 나는 2단계를 거쳐 1단계의 대전제 같은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만난 편집자 N은 기네스와 굴의 이야기에 고개를갸우뚱하더니, 맥주 페어링이라는 것조차도 생소하다고이야기했다.
여기까지, 안다는 것의 개인화에 대한 몇 가지 개인적 사례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지한 영역에 대해서는 슬쩍 치고 빠졌다. 모든 개인은 이처럼, 본인이 의식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 어쩌다 보니 남보다 많이 아는것, 남에게는 상식이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것, 모두 모르는 것을 나도 모르는 것 등 이러한 집합을 이루는 원이 각자의 크기로 각자의 관계를 그리며 자리하고 있을것이다.
앎의 여러 기능 중 하나는 상대와의 대화를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의 여러 기능 중 하나는서로가 가지고 있는 앎이 그린 원들의 지형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불행히도 모든 원이 불일치하는 경우 우리는 (같은 직장에 있는 경우라면) 회사 이야기밖에 할 것이 없다. 그중 인간의 성향상 험담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내 앎의 원과 교집합이 생기는 그의 원이 있는 것을 알게 될수도 있다.

두 사람이 있다. 그 둘에게 같은 상황이 주어졌다고가정해보자. 그들은 상황을 자신의 입장에서 경험한다.
같은 경험을 각자의 입장, 서 있는 위치에 맞게 취사선택해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둘은 각자 상황을너무나 객관적으로 인지했다고 믿는다.
그다음 단계에서 그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객관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믿는 그 상황을 자신의 경험과 관심사, 정치적 성향과 직업, 주변의 사람들과 가족 관계,
살아온 햇수와 성별, 공감능력과 지능 등 헤아릴 수 없는 조건의 조합으로 구성된 개인적 통찰로 해석한다. 그렇게 이해한 것을 개인 저장소(두뇌)에 저장하고 ‘정답‘
이라는 라벨을 붙인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 시간이 지나 그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개인 저장소에서 꺼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유리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왜곡한다는의미가 아니라, 상황에 포함된 자신을 본능적으로 방어

하게 된다는 뜻이다.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약간 내입장에서 말하는 거 같은데, 그래도 난 최대한 객관적으로말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이 정도면 됐지, 이런 정도.
움찔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그런다. 여기까지가 인식의갈림길 3단계다.
만약 세 번째 단계에서 두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듣는 사람이 같은 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오호통재라. 그 사람은 같은 상황에 대해 완전히 다른 말을 양쪽에서 듣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모두 거짓말을 한다.
혹은 모두 진실을 말한다. 경험과 인식, 그에 대한 생각과 결론,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 한 이야기. 하나의 이야기가 사람을 타고 넘어갈수록 다른 이야기가 되듯, 나의 기억이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경험으로 남듯, 같은경험이 각자에 의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의 각도는 생각보다 크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조차도 매우 단순화된 버전이다.

결국 진실은 없고 모두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각자에게는 절박한 진실일 수도 있다. 20년직장 생활을 하며 소소하게 깨달은 것들이 몇 개 있는데그중 하나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굳이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저쪽에는저쪽의 상황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환자는 저만의 이유로 의사에게 거짓말을 했을 것이고,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는 어떤 이유로 자신이 지지한다는 소신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거짓말이지만 각자의 입장에서는진실일 수도 있겠다는 것. 정말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는의식은 없지 않았을까. 적어도 합리적 이유는 있지 않았을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하고, 절대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걸 알 방도는 없다. 그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은 없다‘고 대부분의상황을 넘기면 그게 정답일 것이다. <엑스 파일 The XFiles>이라는 TV 시리즈가 있다. 여기에도 명언이 하나있으니 "The Truth is Out There"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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