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후반부의 강력한 울림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고심하다가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진정한 나를찾느라 번민하는 이들, 혹은 너무 많은 나 앞에서 자신을 위선자라자학하는 이들에게, 이 일본 소설가는 그냥 우리에게 여러 개의나가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나‘란 나눌수없는
‘개인個人, in-dividual‘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ㅅdividual

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사람을 언제나 똑같은 ‘나‘
로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즉, 분인)이 생긴다는 것.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이런 관점으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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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연필 촉에 수반되는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법을, 그러면서도 이상적인 형태를 향해 계속 정진해야 한다.
세상일은 어찌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각자가 놓인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잘 생각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면서도 현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것이다.
ㅡ데이비드 리스 "연필 깎기의 정석"

그리하여 연필깎기의 기술은 삶의 기술이 된다. 연필 촉을 완벽하게 가다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평범한 우리들의 삶이다. 어디그뿐인가. 깎으면 깎을수록 짧아지는 연필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노력할수록 우리의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질 뿐이다. 그것이 바로향나무와 흑연의 쌉싸래한 연필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연필을 깎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야만 한다.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없습니다.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는 1978년부터 1980년 바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를 담은 강의록이다. 바르트는 첫 번째 강의를 단테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단테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삶의 노정 중간에서 이 구절을썼을 때 단테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지금의 나는 그보다 나이가많고, 따라서 산술적으로 계산해보아 삶의 노정에서 중간보다 멀리 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중간은 산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일종의 분기점이다. 분기점에 선 그는 생각한다. "뭐라고요? 죽을때까지, 내가 죽을 때까지 단지 바뀔 뿐인(아주 조금!) 주제들에 대해 늘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하고, 강연을 하게-기껏해야 책을 쓰게될 거라고요?"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는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특별한 존재와 평범한 존재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존재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관계다. 남에게는 평범한 존재가 내게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존재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 평범한 존재는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특별해진다.
-장유승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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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프랑수아 누델만의 책 『철학자의 거짓말』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글을 쓰면서는 더 많은 거짓말을 한다. 글로 구현된 ‘나‘는 이미 내가 아니라 나로부터 기원한, 나보다 조금 더 낫기를 바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거짓말들을 우리의 상으로 삼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철학자들처럼,
모두 거짓말을 향해 나아가는 진실한 인간들일지도 모른다."

인생에 한가지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유일한 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삶에 최후의 정답이 없는 만큼이나 책에도 최후의 성배란 없다(물론 최후의 성배로서의 책이 존재하는 세계를 다룬 책은 있다).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이행해가는 그 모든과정에서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연속적인 열린 과정만이 책의 경이를 담보한다. 그는 책과 책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갈아타기‘가 아니라 인간의 애석한 운명을 넘어 다른 이의 몸을 입어가는 ‘확장하기‘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장‘은 필연적으로 홀로 성공하기보다 여러 삶을 끌어안기를 요청한다.

서른 살에 쓴 「고백」이라는 글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제는 삶을 끌어안고 분투하느라 보낸 이십 대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보내려 합니다. 이십 대가 자신의 소임을 다 한 덕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을 테지요. 침대맡에도 주머니 속에도 달라붙어 있겠지요. 끈질기게 저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이므로, ‘무엇이든 무마할 시간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됩니다.‘
• 임레 케르테스, 박종대, 모명숙 옮김, 『운명』, 다른우리, 2002. 계속 무마해보겠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에게만 무마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와 무마의 순환 속에서 항해는 이어진다.

"이제 누가 책을 읽냐"는, 조롱조지만 진지한 장문의 댓글을 받은 적이 있다. 요지는 학생들의 말과 같았다. 정보는 이미 인터넷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고, 재미는 굳이책에서 찾을 필요 없다는 것. 책을 읽는 건 이제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그 말에반박할 수 있다. 책만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책은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가장 깊은 수준의 경청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그 독서 캠프의 강연장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한 사람의 일관되고 내밀한 이야기를, 적어도 수 시간에서 수 주에 이르기까지, 흐름과 논리를 따라가며 집중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학생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 어느 강연을 가도 여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없다. 수 시간은커녕 수십 분을 하기도 쉽지 않은 경험이니까. 하지만 책은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아니, 책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나는 그걸 안다.

인간은 태어나기를 삶에게 두 가지 제물을 바치도록 태어났다. 그 두 가지는 노력과 우연이다. 인간이 세상을 정복해나가는 동안 그러한 사실은 어느새 잊혀서 우리는 삶에 덕지덕지 어설픈 이름표를 붙이게 됐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운과 우연, 사건과 사고로 이루어지며, 운과 우연과 사건과 사고는 혼돈의 다른 이름이다. 혼돈을 보는눈을 감아버린다면, 그래서 지진이 벌어지고도 바늘을 들고 물고기의 살에 이름표를 꿰매게 되면, 그 바늘이 언젠

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박음질하리라는 두려움도 슬그머니 잊게 된다.
통제 밖의 세계, 의미가 없는 삶. 그렇기에 겸손하게 노력하는 마음. 그것은 어느 순간 우리를 해방시킨다. 내가자기혐오에 빠질 때마다. 나의 못남을 탓할 때마다, 나의삶에 구멍이 나고 균열이 생긴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내가 나의 못남을 탓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나의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그만 투덜대고, 다시 한 발짝 내디뎌야 한다. 혼돈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가이 맞이하며.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길 때 질문이 자라난다.
다음과 같은 명제를 보자: 땅은 사고팔 수 없다. 인간은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자연은 변형할 수 없다. 동물은소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네 가지 명제 모두 하나같이 불온한 명제들이다. 아니 어떻게 감히 이런 생각을? 고개를살짝 끄덕인 사람도, 화들짝 놀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삶의 어느 부분도 당연하지 않다. 저 각각의 명제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고도 끈질긴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사느라 저 명제들에 질문할 기회를 놓치며 살아간다.
정말로 나도, 기적처럼 이 모든 것을 바꿔줄 기술이 마법처럼 나타났으면 좋겠다. 나도 스마트폰을, 커피를, 딸기를, 사람들과 함께하는 낭만적인 저녁 식사를, 국가 간의 안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마음껏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고 싶고(밝히건대 나는 자연파와 도시파 중 철저한 도시파 여행자다), 이런 험악한 글 대신 우아한 글을 쓰고 싶다. 소비로 인한 자기비난도 그만하고 싶다. 하지만늘 기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오늘 쓴 텀블러를 세척하

고 재활용품을 분류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한숨을 쉴지언정 그런 의식이 큰 문제에 있어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하게끔 도와주는 작은 계기임을 상기한다. 계속해서생각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기는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질문이 자라나는 곳에서 시간이 멈추듯, 질문이 멈춘 곳에서 관성이 자라난다.

어디 가서 일을 해도 긴장하거나 지적받을 일이 줄어가는 삶에서 이런 미숙함이 반갑다. 얼마나 안정된 삶을 꾸리든지 우리는 영원히 삶의 초보니까. 그리고초보자의 미덕은 겸손이다. 오만과 습관을 내려놓고 알고 있는 스탭을 연습 또 연습할 일이다. 배드민턴이야 초보라는 이유가 많은 것을 용서해주지만, 삶은 곧장 흘러가 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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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 선의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
이소영 지음 / 어크로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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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고 선명한 것을 선망했다. 그런 것을 품고 그렇게 완전하게 말하는 것이 부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불완전하고 희미한 것에 묵직한 진실이 담겨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이 작가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위안이 되었다.
별것 아닌 선의로 지속되는 삶을 꿈꾼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데리다 이론에 정통하지 않았다.
그의 난해한 저작들을 완독하지도 못했다. 2차 문헌들과 해설서를 읽고 얻은 얕은 지식을 서툴게 전달했을 뿐이다. 그러니 자아성찰하며 도서관으로 곧장 가서 공부에 매진함이옳았지만, 마음이 붕 들뜬 나는 버스를 갈아타는 것마저 잊고 구시가지 번화가로 갔다. 시간강사에게 도래할 ‘방학 보릿고개‘ 걱정은 잠시 접어둔 채 근사한 디저트 가게로 들어가산딸기초코케이크와 탄산수를 사먹었다.
난 고작 그 수준의 초보 선생이었다. 당시 학생 눈에 비친내 모습은 나의 허영과 허식이 상대방의 선망과 어우러져빚어낸 허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허상에 대한 그학생의 신뢰 덕분에 나는 한심하고 미숙한 상태로도 고단한여정을 계속해나갈 힘을 한 줌 얻어 가질 수 있었다.

그분은 모르실 거다. 글쓴이가 얼마나 얕고 나약한 사람인지. 갖가지 예쁜 단어를 끌어와 그럴싸하게 단장한 글 속의나와 실제의 나는 얼마나 다른지. 그날 우편함을 확인하기직전까지도 사소한 일로 주변인들에게 얼마나 고집스럽고속좁게 굴었는지. 그래서 부끄러웠지만, 그렇기에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이토록 한심하고 불완전함에도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 전할 수 있다면, 그게 내가 지닌 쓸모 중 하나라면, 나는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글을 쓰고, 더욱 마음을 담아서 쓸 것이다.

스토너는 수업에서 처음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읽고 세상이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강렬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경힘은 그의 삶을 결정지었다. 하지만 그가 빠졌던 사랑은 냉정히 말해 일방적이었다. "이 소네트 의미가 뭐지?"라는 교수의 질문에 그는 변변히 답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느낌을 어떻게 언어로 설명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었을뿐이다. 그렇게 평생 스토너가 사랑했던 공부는 그에게 새침한 옆모습을 보여주었다. 힘겹게 달려가 어깨를 잡아 돌리면견고한 등을 내어보였다. 그것은 연구 대상을 온전히 장악하지 못한 연구자의 한계였으리라. 아울러 그는 딱히 뛰어난교육자도 아니었고, 그 점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생기 넘치던 것들이 자신의 말 속에서 시들고, 감동을 주었던 것들이강의 도중 차갑게 식어버린다는 것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각에 고민한 나머지, 그고민이 구부정한 어깨만큼이나 일부가 되어버린 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자리에서 매일의 일들을 해나간다.

392쪽에 달하는 이 소설의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일상의 연속이다. 큰 결실을 맺지 못한 노력들이 누적된 삶. 그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었다. 말하자면 소설은 천재의 실패담이 아닌 ‘삶이라는 투쟁‘이었다.
지구 저편에서 이 소설을 처음 읽던 무렵의 나는 "학위 따려고 유학 가는 건 신식민지적이라 생각해요"라고 함부로말하던 되바라진 아이였다. 새로운, 더 새로운 것을 찾으며,
내 공부는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되바라진 아이는공부의 긴 여정에서 엎어지고 깨어지면서 차츰 알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엄정하고 깊어져야 하는지. 나 같은 초학이 망가지지 않기 위해 어떤 조심스러움을 가져야 할지도.
새침한 옆모습만 보여주는 연구 대상 앞에서 이제는 한문장 한 문장을 이어가기가 무척 고되다. 온전히 이해하지못한 이론을 한층 난해한 서술로 뭉뚱그려보려는 유혹과 싸우고, 치밀하게 파고들 지점에서 붕붕 날아다니기부터 하는논지를 붙잡아 끌어내리며 특유의 감상적 문체를 고치는 작업은 그야말로 전쟁이다. 그 난리를 치르며 만들어낸 문장들이 타전되지 못한 채 식어버릴 수 있음도 안다.
그럼에도 가끔 글 쓰다 떨려올 때가 있다. 말하고 싶은 것

이 있고, 잘 전하고 싶은 마음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때가 있다. 휴강한다고 좋아서 학생들 몰래 입 찢어졌으면서도 수업하다 알아들은 눈빛들을 마주하면 선생이랍시고 자애로움이 퐁퐁 솟아난다. 함께 이거 공부하고 그다음에 저거 해봐야지 하며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스토너》를 다시 읽으면서 주인공에게 깊이 이입되었다.
아무 장식 없는 표지를 손으로 쓸어보며 자신이 책을 썼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장면에서 학생들이 연구실로찾아오기 시작하고 과제물에 조심스러운 애정과 상상력이드러나기 시작하자 그가 기운을 얻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일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 장면에서도. 첫 페이퍼 쓰고서 좋다고 그걸 베개 아래에 넣고 잠잤던, "재밌네. 대학 수업이란게 이런 거네" 하던 학생들의 대화를 훔쳐 듣고 화장실로 달려가 문 잠그고 히히히 웃던 내 모습이 문장들 위에 겹쳐 보였다. 나와 그대,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스토너들이 떼어놓는 작은 발걸음들이 저마다의 세상 끝 날 이 소설처럼 남겨지기를 소망한다.

각자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캄캄한 데 버려졌다고 낙담했을 날들이 도리어 그들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시절이었다. 당시 미처 알지 못했겠지만, 아니 인정할 수없었겠지만,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당위적인 그리움에 갇힌정부점소설 유유하며 애써 마음을 부정하던 그때, 둘은 화양성화(花)를 관통 중이었던 거다. 어두운 터널 끄트머

리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깨닫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그터널이야말로 찬란했음을. 그리움에 사로잡혀 뒤돌아보던우리 머리 위로 반짝이는 순간들이 하늘의 별처럼 가득했었다는 사실을. 이 역시 훗날 또 다른 그리움으로 남을 것임을.
나는 안다. 끝이라 생각해온 어느 지점은 끝이 아니다. 거기에 빛나는 것들이 새로이 채워 넣어질 것이다. 두근거리며기다릴 무엇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은 시기에도 우린 저마다 아름다운 시절을 하나 더 통과하는 중일 수 있다.
어쩌면 오늘도 그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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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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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가 추천한 도서라 읽어보고 싶었다. 철학이 날씨릉 바꾼다니.. 제목도 나의 흥미를 돋구었다. 인내심이 필요한 신착 도서를 기다리는 시간 끝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그것도 내가 처음 펴보게 될 책으로!! 책을 마주한 벅찬 감정을 만끽하며 바로 빈 자리에 앉아 읽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용이!?
제목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다만 생각의 끝에 서있는 철학자의 문학적인 박식함과 삶에 대한 고찰을 엿볼 수 있었다. 책을 처음 펴는 것은 쉬웠으나 끝까지 읽는데는 꼬박 2주가 걸렸다. 시간 날 때 계속 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치만, 문장 문장들이 멋졌다. 수 십년간 자기 안에 쌓인 경험과 지식을 문학적인 감성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간이 넉넉할 때 한 문장 한 문장 다시 곱씹어 보고 싶은 책이다!

악상에 대한 고민에 빠졌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에게만해답이 되어 민요조의 분위기를 지닌 <7번 교향곡>의 4악장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해답은 널려 있지만, 제대로된 문제를 가진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는빈털터리가 그것을 집어 들면 그저 돌멩이, 아니면 영문 모를
‘42‘라는 숫자로만 나타난다.
소설로 돌아가보자.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
이 문제이기나 한 것인가? 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문제는 모든 것을 노력 없이 단번에 알아내겠다는 미련한 욕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마치 전혀 공부하지 않은 이가 침대에 빈둥거리며 누워 내일 시험에서 백점 맞을 궁리를 하는 것처럼. 저질문의 정답은 확실히 ‘42‘이다. 그러나 질문을 자신의 삶에서절실하게 피워내지 못한 이에게 질문은 추상적인 남의 질문이며, 따라서 해답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저 거대한 문제가 제대로 된 질문의 모습이 되기 위해선, 의미심장하게도
‘지구‘라는 컴퓨터가 자신의 장구한 전 역사를 조금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하나 몸소 체험해야 했다.

(...) 당신은 저와 함께 계셨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않았습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당신(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늦게 이루어지는 반추속에서다. 배움이란 늘 늦게 되새겨보는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고, 과거는 현재에 반복됨으로써만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 반복의 체험을 우리는 프루스트Marcel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유명한 마들렌 과자 체험에서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마들렌 체험은 어른이 된 후반복한 마들렌 체험 속에서야 비로소 그 행복한 비밀을 알려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어떤 것을 겪을 당시엔그 의미를 모르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반복할 기회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역사를 창조하는 일 역시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만큼이나 반복을 자신의 철학에서 핵심으로 삼은 하이데거는 어떤 의미에서 저런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반복을 계승한다고 해도 좋을 텐데, 그는 과거를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을반복이라 여겼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입문》에서 이렇게말한다.

하나의 시작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잘 알려진 것을그저 똑같은 방법으로 모방해서 단순하게 반복함으로써가 아니라, 출발이 ‘원천적으로 고유하게‘ 다시 시작됨으로써, 따라서 진정한 시작이 지니는 모든 난처함,
어둠, 불확실성과 함께 다시 한번 출발함으로써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과거란 먼지 쓴 유물처럼 사망한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함을 통해 현재에 반복된다. 과거를 다시 시작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오늘을 위한 역사를 만든다.

반면 그런 공통성을 전제하지 않는 ‘차이‘는 사람들 사이에어떤 위계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와 공통의 척도를 지니지않는 자에게 내 이해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까닭이다. 공통의 척도가 없는 대상에 대해 자신만의 잣대를 억지로 들이대려 할 때 우리는 폭력의 행사라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렇듯 차이는 사람들의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며 위계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보호한다.

진실은 순식간이다(그 후에는 모든 게 그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 그 순간은 그저 그 자체였다. 그것은 다른무엇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모든 게 충족되었으며, 모든 걸 보상받았다.
최고의 순간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다. 그 이후에 흘러가는시간은 바로 이 순간의 의미를 지키고 또 반복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후의 시간, 계속 스쳐 지나가는 현재는 그 자체로 충족적인 저 최고의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지시해 보이는 기호일 것이다

"9현재라는 순간을 영위하는 것들은 과거의 것들이 변장한모습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버마스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보들레르를 읽어나가며 말하듯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현실성은 오로지 [현재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영원의 교차점으로서만 구성된다. 지금 생기롭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조각상처럼 서 있는 영원한 과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현재라는 순간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와 지금의 교차
‘로서 현재의 순간‘은 인간이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말한다.
과거의 이미지는 획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
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뜻한다. 10과거는 박제나 골동품처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와 단절한 채 완벽한 새로움 속에 등장하지도않는다. 과거의 지도를 받으면서만 우리는 현재의 사건들을

인지할 수 있다.
만일 과거의 빛나는 한순간이 지금 순간에 개입해서 더할나위 없이 의미 있고 소중한 현재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벤야민의 말을 빌려 현재의 모든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프루스트가 마들렌과 함께 차한잔을 마시는 현재의 순간 속으로 과거의 콩브레가 들어와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만들 듯이 말이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한 채 다가오기에 우리에게 현재는 늘 새롭고 유일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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