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프랑수아 누델만의 책 『철학자의 거짓말』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글을 쓰면서는 더 많은 거짓말을 한다. 글로 구현된 ‘나‘는 이미 내가 아니라 나로부터 기원한, 나보다 조금 더 낫기를 바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거짓말들을 우리의 상으로 삼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철학자들처럼,
모두 거짓말을 향해 나아가는 진실한 인간들일지도 모른다."

인생에 한가지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유일한 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삶에 최후의 정답이 없는 만큼이나 책에도 최후의 성배란 없다(물론 최후의 성배로서의 책이 존재하는 세계를 다룬 책은 있다).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이행해가는 그 모든과정에서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연속적인 열린 과정만이 책의 경이를 담보한다. 그는 책과 책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갈아타기‘가 아니라 인간의 애석한 운명을 넘어 다른 이의 몸을 입어가는 ‘확장하기‘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장‘은 필연적으로 홀로 성공하기보다 여러 삶을 끌어안기를 요청한다.

서른 살에 쓴 「고백」이라는 글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제는 삶을 끌어안고 분투하느라 보낸 이십 대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보내려 합니다. 이십 대가 자신의 소임을 다 한 덕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을 테지요. 침대맡에도 주머니 속에도 달라붙어 있겠지요. 끈질기게 저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이므로, ‘무엇이든 무마할 시간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됩니다.‘
• 임레 케르테스, 박종대, 모명숙 옮김, 『운명』, 다른우리, 2002. 계속 무마해보겠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에게만 무마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와 무마의 순환 속에서 항해는 이어진다.

"이제 누가 책을 읽냐"는, 조롱조지만 진지한 장문의 댓글을 받은 적이 있다. 요지는 학생들의 말과 같았다. 정보는 이미 인터넷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고, 재미는 굳이책에서 찾을 필요 없다는 것. 책을 읽는 건 이제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그 말에반박할 수 있다. 책만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책은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가장 깊은 수준의 경청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그 독서 캠프의 강연장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한 사람의 일관되고 내밀한 이야기를, 적어도 수 시간에서 수 주에 이르기까지, 흐름과 논리를 따라가며 집중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학생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 어느 강연을 가도 여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없다. 수 시간은커녕 수십 분을 하기도 쉽지 않은 경험이니까. 하지만 책은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아니, 책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나는 그걸 안다.

인간은 태어나기를 삶에게 두 가지 제물을 바치도록 태어났다. 그 두 가지는 노력과 우연이다. 인간이 세상을 정복해나가는 동안 그러한 사실은 어느새 잊혀서 우리는 삶에 덕지덕지 어설픈 이름표를 붙이게 됐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운과 우연, 사건과 사고로 이루어지며, 운과 우연과 사건과 사고는 혼돈의 다른 이름이다. 혼돈을 보는눈을 감아버린다면, 그래서 지진이 벌어지고도 바늘을 들고 물고기의 살에 이름표를 꿰매게 되면, 그 바늘이 언젠

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박음질하리라는 두려움도 슬그머니 잊게 된다.
통제 밖의 세계, 의미가 없는 삶. 그렇기에 겸손하게 노력하는 마음. 그것은 어느 순간 우리를 해방시킨다. 내가자기혐오에 빠질 때마다. 나의 못남을 탓할 때마다, 나의삶에 구멍이 나고 균열이 생긴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내가 나의 못남을 탓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나의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그만 투덜대고, 다시 한 발짝 내디뎌야 한다. 혼돈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가이 맞이하며.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길 때 질문이 자라난다.
다음과 같은 명제를 보자: 땅은 사고팔 수 없다. 인간은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자연은 변형할 수 없다. 동물은소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네 가지 명제 모두 하나같이 불온한 명제들이다. 아니 어떻게 감히 이런 생각을? 고개를살짝 끄덕인 사람도, 화들짝 놀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삶의 어느 부분도 당연하지 않다. 저 각각의 명제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고도 끈질긴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사느라 저 명제들에 질문할 기회를 놓치며 살아간다.
정말로 나도, 기적처럼 이 모든 것을 바꿔줄 기술이 마법처럼 나타났으면 좋겠다. 나도 스마트폰을, 커피를, 딸기를, 사람들과 함께하는 낭만적인 저녁 식사를, 국가 간의 안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마음껏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고 싶고(밝히건대 나는 자연파와 도시파 중 철저한 도시파 여행자다), 이런 험악한 글 대신 우아한 글을 쓰고 싶다. 소비로 인한 자기비난도 그만하고 싶다. 하지만늘 기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오늘 쓴 텀블러를 세척하

고 재활용품을 분류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한숨을 쉴지언정 그런 의식이 큰 문제에 있어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하게끔 도와주는 작은 계기임을 상기한다. 계속해서생각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기는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질문이 자라나는 곳에서 시간이 멈추듯, 질문이 멈춘 곳에서 관성이 자라난다.

어디 가서 일을 해도 긴장하거나 지적받을 일이 줄어가는 삶에서 이런 미숙함이 반갑다. 얼마나 안정된 삶을 꾸리든지 우리는 영원히 삶의 초보니까. 그리고초보자의 미덕은 겸손이다. 오만과 습관을 내려놓고 알고 있는 스탭을 연습 또 연습할 일이다. 배드민턴이야 초보라는 이유가 많은 것을 용서해주지만, 삶은 곧장 흘러가 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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