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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키우는 성장소설 - 성장기 소년.소녀들의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아름다움
김유정 외 지음 / 꿈꾸는사람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10년 전,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남편이 결혼 후에 기숙사 짐을 정리해 돌아왔다. 얇은 이불 하나와 라이터, 트럼프 같은 잡동사니에 두꺼운 책 한 권이 다였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빨아야 할 이불과 책뿐이었는데, 이 책이 바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을 모아 놓은 귀한 책이었다. 김동인, 황순원, 주요섭, 현진건, 김유정, 이효석 등의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렸던 글과 주로 삼중당 문고로 읽었던 단편들이 수십 편 실려 있어 며칠간 이 책에 푹 빠져 살았는데, 워낙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들이라 작가와 제목도 헷갈리고 내용도 가물가물해 새로운 이야기를 읽듯 재미있게 읽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나 톨스토이와 같은 외국 작가의 단편을 읽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단편소설들은 나의 정서와도 꼭 맞아 더 쉽게 몰입하면서 가슴이 아린 경우가 많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로 10년 전 우리나라의 단편소설을 읽었던 것처럼, 딸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것을 계기로 현대의 창작물이나 판타지 말고도 우리나라의 단편소설도 접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키우는 성장소설」이라는 책을 골랐다. 이 책에는 황순원, 김유정, 이효석, 주요섭님의 주요작품 여섯 편이 실려 있는데, 또 다시 읽어도 새로운 우리나라의 단편소설에 푹 빠져보았다.
황순원님의 작품으로는 갑작스럽게 세차게 쏟아지다 뚝 그치고 만 소나기처럼, 소년의 가슴에 햇살 같은 눈부심으로 다가왔다가 소나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만 윤초시댁 손녀딸 이야기로 언제 읽어도 마음이 짠해지는 ‘소나기’와 얼굴도 모르는 그리운 엄마와 못생긴 누이를 연관 짓고 싶어 하지 않는 철부지 소년이 누이가 죽은 후에도 아름다운 엄마별과 같은 존재가 되면 안 된다며 눈을 감고 고개를 내젓는 ‘별’이 실려 있다.
김유정님의 작품으로는 어른이 된 것 같아도 아직은 꽃다운 처녀의 연정을 눈치 못 채 마름 댁의 천방지축 딸 점순이에게서 이유 있는 괄시와 괴롭힘을 당하는 소작농 아들의 이야기인 ‘동백꽃’과 딸만 내리 셋을 둔 탓에 농사일 거들 사람이 필요해 들인 데릴사위가 4년을 참고 기다려도 장인이 혼인을 시켜주지 않아 불퉁거리는 ‘봄봄’이 실려 있다.
장돌뱅이 허생원이 동료인 조선달과 어린 장돌뱅이 동이와 함께 메밀꽃 밭을 걸으며 젊은 시절 매밀 꽃이 하얗게 핀 밤, 개울가 물레방앗간에서 한 처녀와 밤을 지새운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자신처럼 왼손잡이에 봉평이 고향이라는 동이를 보며 감회에 빠지는 이효석님의 ‘메밀꽃 필 무렵’, 하숙을 하는 선생과 엄마의 미묘한 심리상태를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세밀하게 그려낸 주요섭님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가 실려 있다.
사투리와 고어들이 많이 쓰여 술술 읽어 나가는 데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으나, 주석을 달아 이해를 돕고 있고, 여섯 편의 단편들이 모두 큰 사건을 중심으로 쓰인 글이 아니라 대부분 섬세한 마음의 움직임을 쫓아 쓴 글이라 읽는 동안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인다. 「마음을 키우는 성장소설」이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 그대로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복합적인 심리상태와도 맥을 같이하는 이야기다. 찬찬히 읽다보면 어느새 책 속 주인공들과 한 마음이 되어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분노에 휩싸이기도 하고, 슬퍼도 하는 우리네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된다.